다양한 위계의 눈물─눈물은 고통, 무력, 굴욕 등 항상 어떤 하나의 결여에서 솟구친다. 그러나 신적인 종에 속하는 눈물도 있으니, 영혼의 신적인 한 대상을 지탱하고 그 본질에 필적하여 그것을 모조리 소진할 만한 힘의 결여에서 생기는 눈물이다. 이야기 하나, 몸짓 하나, 연극 한 편은 삶의 비통한 것들을 모방함으로써 눈물을 자아낼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겉으로 보기에 인간의 어떤 것과도 닮지 않은 건축물(혹은 너무나 정확한 나머지 불협화음과 다름없이 거의 찢어질 듯한 화음)이 당신을 눈물의 경계로 데려간다면, 당신이 느끼는 저 막 피어오르려는 넘쳐흐름, 당신의 이해 불가능한 깊이로부터 밀려오려 하는 그 이슬방울은 헤아릴 수 없이 값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에게 가르쳐주기에: 당신이 자신의 인격에, 그 역사에, 그 이해관계에, 필멸자로서 당신을 에워싸는 모든 용건과 사정에는 전적으로 무관하고 쓸모 없는 사물에 감응할 수 있다는 것을.


─폴 발레리, 잡록 中




좀 더 직접적이고, 조금도 형이상학적이 아닌 레벨에서, 우리들은 다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즉, 우리들은 우리들의 감각의 비견할 바 없는 다양함 속에서, 친숙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예를 들어서 시각의 세계와 청각의 세계라고 하는, 어떤 점에서도 서로 닮지 않고, 생각해 보면 완벽한 불일치라는 인상을 끊임없이 주는 것과 우리가 타협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우리들은 그러한 불일치가 관례나 습관에 의해서 소거되고, 말하자면 용해되고, 모든 것이 일치 협력하여, 단 하나의 '현실'을 만든다고 거침없이 말하기도 한다... 뭐, 대단한 의미가 있는 말은 아니지만.


─폴 발레리, 인간과 조개껍질 中




마음은, 세계의 두려운 형상에 맞선 투쟁 속에서, 거의 언제나 결국에는, 욕망의 힘을 거듭함으로써, 이 광대함과 방사의 괴물을—우리를 낳고, 우리를 먹이고, 우리를 가두고, 우리를 위협하고, 우리를 매혹하고, 우리를 의혹케 하며 삼켜버리는 그것—담기에, 건설하기에, 혹은 방출하기에 충분할 만큼 강력한 어떤 존재의 관념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이 존재는 심지어 하나의 인격이 될 것이니, 곧 그와 우리 사이에는 어떤 유사성이 있을 것이고, 정의할 수 없는 합일에 대한, 뭐라 말할 수 없는 어떤 희망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마음이 발견하는 바이다. 마음은 신으로써 스스로에게 답하려 한다.


─폴 발레리, 팡세에 대한 변주 中




발레리도 소크라테스도 자기 안에서 기원과 궁극적인 목적에의 향수를 뿌리째 뽑았다고 믿는다. 그들은, 만약 인간이 만들어져야-할-존재라면, 인간 안에 있는 신적인 것은 인간의 창조물일 수 밖에 없다고 믿는다.


발레리는 말라르메가 그랬듯 예술에게 <대지의 오르페우스적 설명>이기를 요구하지 않으며, 또 작품에게 무엇인가를 증명하길 요구하지도 않는다. 찢어질 듯한 아름다움이 관조자를 초인적인 긴장과 경배의 상태 안으로 이끌어 들이는 것, 그에겐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마르셀 레몽, 발레리와 정신의 유혹 中





소신: 발레리가 시 관두고 산문에 집중한 건 신의 한 수








여담이지만,


혹자 말마따나 프랑스적 유물론은 독일처럼 관념론이 설정한 문제 지형에서 도출된 귀결이 아니라는 걸 늘 상기할 필요가 있음


자기 자신을 조망하는 지도제작법, 자기 변용의 조율을 위한 수행들


몽테뉴와 파스칼은 당연하고 루소, 디드로, 비랑, 보들레르, 발레리, 심지어 들뢰즈까지


이들은 관념론을 '논박'하기 위해 유물론을 '채택'하는 게 아님


그냥 다른 곳에서 시작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