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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쓰는 독후감이다. 이전에 독후감을 어떻게 썼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다. 그동안 익힌 글쓰기 감각이 많이 둔해졌으리라 생각하지만, 아무튼 나는 써야만 한다. 잠시 떠오른 생각은 글로 붙잡지 않으면 증발하기 때문이다. 마침 「아르세니예프의 인생」의 첫문장도 이러하다. "아직 기록되지 않은 사실과 행위는 어둠에 덮여 망각의 무덤 속으로 들어가지만, 기록된 사실과 행위는 마치 생명을 얻은 것만 같다." 이반 부닌은 자신이 살면서 느꼈던 것들에 영원을 부여하기 위해 「아르세니예프의 인생」을 썼고, 나는 「아르세니예프의 인생」을 읽으며 잠시 떠오른 생각을 인터넷 위에 고정시켜두기로 했다.
제목이나 소개 문구를 보면 철저히 자전적인 작품처럼 보이지만, 「아르세니예프의 인생」은 사실 픽션이다. 물론 부닌 자신의 생애나 부닌이 사랑했던 인물들이 모티브가 된 것은 맞지만, 흐름은 부닌의 추억을 충실히 따라가는 듯 보이다가 실제로 일어난 일에서 멀어진다. 그래서 이 소설은 자전적인 경험을 재구성하며 다시 감상하는 오토픽션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실제로 문체 자체에 서사보다도 묘사와 감상이 훨씬 풍부하다. 플로베르를 방불케 하는 미문이지만 플로베르의 소설보다도 플롯이 흐릿해서, 당시의 세상 그 자체보다 그 세상을 직접 보았던 부닌 자신의 시각을 체험하게 만드는 신비한 작품이다.
그러면 생애 내내 부닌은 무엇을 느꼈을까? 망명 작가의 대표격인 부닌의 생애는 무언가를 이뤄가는 과정이라기보다는 잃어가는 과정이었다. 유년 시절부터 체험한 가정의 몰락, 피비린내 나는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환멸, 끝내 영원히 잃어버린 고향. 어찌 보면 급변하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도련님의 안이한 생각이라고 평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부닌 자신이 겪은 슬픔에 대해서 제3자는 왈가왈부할 수 없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 모든 사람은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준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까봐 늘 두려워한다!" 무언가에 정을 붙인다는 것은 곧 그 무언가를 잃었을 때 느낄 슬픔을 키운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행복한 사람에게는 불안이 늘 공존한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언젠가 다가올 끝을 막을 수는 없다. 단지 그 순간이 오기까지 행복을 더 크게 느끼기를 바랄 뿐이다.
일찌감치 삶으로부터 그런 감각을 느낀 부닌에게 혁명은 정말로 무가치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저 열정을 불지필 땔감이 필요했던 철없는 사람들이 새로이 찾은 오락일 뿐, 결국 언젠가는 그리워하게 될 것들을 자기 손으로 더 일찍이 내다버리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감성에 취한 부닌도 사회주의 자체에 대한 염증과는 별개로 자신이 알고 지내던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사랑은 버리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는 끝내 형을 사랑했고, 자유를 갈망하다가 자유를 박탈당한 형과의 이별을 슬퍼했다. "이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슬프더라도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고, 우리는 여전히 행복해지기를, 서로 사랑하기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일찌감치 이런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부닌(혹은 알렉세이 아르세니예프)이 예술가의 길로 들어서는 것은 숙명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유토피아를 실현하기 위한 선전 예술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살았고 사랑했던 풍경을 그대로 그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 부닌의 지향점이었다. 물론 이상주의를 완전히 폐기할 수는 없다. 「아르세니예프의 인생」도 어디까지나 픽션이 아닌가. 하지만 행복을 붙잡는 것보다 행복으로 달려드는 발버둥에 부닌은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물론 감수성이 정의의 지침이 되어주지는 못한다. 알렉세이는 작품 내내 다른 시민들과 다르게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다. 스스로 선택한 길에 얽매인 셈이다. 한편 5권은 볼수록 답답한 마음이 강해졌다. 알렉세이는 방랑벽과 자유에 취해 리카의 피해자에서 리카의 가해자로 돌변한다. 세상사에 초연한 듯 보이던 사람이 결국에는 인간성에 가장 충실했다. "괴테가 말했지. '우리는 자신이 만들어놓은 것들에 얽매여 있다.' 우리가 전혀 저항할 수 없는 감정이 있는 법이야. 이따금 뭔가에 대한 어떤 관념이 내 마음속에 떠오른 곳으로 가고 싶다는 고통스러운 갈망을 불러일으키곤 해. 말하자면 이 관념 너머에 있는 뭔가를 향한 갈망 같은 거지. 이해하겠어? 관념 너머에 있는 거 말이야!" 다행히 리카와의 이별은 실제 일어난 사건과 다르게 각색된 이야기라고 한다. 하지만 자신에 취하는 것도 이상에 취하는 것만큼이나 무서운 일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어쩌면 부닌이 끝내 고향 러시아를 거부한 것도 신념보다 자신에 대한 우수가 앞서서, 즉 고집 때문에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제 20대 중반이다. 아직 잃어버린 것들이 많지는 않을 나이다. 하지만 이런 나도 추억에 한번 취하면 감정을 주체하기 어렵다. 사실 흘러간 시절에 행복을 굳이 의식한 적은 없지만, 돌아보면 그 시절이 드리운 그림자가 너무도 아름다운 것이다. 「아르세니예프의 인생」으로부터 비슷한 감성을 느꼈다. 이미 지나가버린, 그것도 자기 발로 뒤돌아서 떠나버린 곳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심정이 나를 먹먹하게 만든다. 돌아가라고 등을 떠밀어도 돌아갈 수 없게 돼버렸지만, 그리고 지금조차도 더 큰 자유와 행복을 좇아 떠날 채비가 돼있지만, 그래도 과거에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 더 아름다웠다는 생각이 끝내 시야를 흐리고 만다. "아, 마지막 햇살의 고요하고 슬픈 아름다움은 얼마나 가슴에 사무치는가!"
나는 평소에 책에서 교훈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애써 교훈을 찾지 않고 그대로 놓아주려고 한다. 그냥 가끔 내 마음 속에 밀려오는 불합리한 애수가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위안을 받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아르세니예프의 인생」은 이반 부닌의 인생에서 흘러나왔고, 이제 내 인생으로 스며들었다. 세상은 내가 사랑하던 모양에서는 진작에 벗어났고, 앞으로는 더욱 멀어질 것이다. 그런 흐름 안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어떻게든 건져보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내 자유이자 고집이다. 이것이 옳은 것인지 아니면 당장 집어쳐야 할 태도인지는 지금 판단하지 않겠다. 아르세니예프의 인생이 그랬듯 내 인생도 일단은 이런 모양이라는 점, 그리고 다른 이들의 인생도 아마도 이런 모양일 것이라는 점만 느끼고 책을 덮으련다.
저도 <교훈>찾기 독서를 완전히 보내버렷습니다ㅋㅋ 그냥 책이 주는 고양감 흥분감 절망감 상실감 느껴보지못햇던감정을 느껴보는걸로 노선을 틀엇어요 잘읽었습니다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