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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하인리히, <맑스의 자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읽었다.

자본론의 첫 두장을 문단 하나하나, 주석 하나하나를 성서주석학급의 빽빽한 밀도로 주해하고 있는 책이다.
읽다보면 굳이 이렇게까지 섬세하게 독해해야할까 싶을 만큼 빽빽하다.

독해상의 독특한 점이라면, 저자는 책을 독해하는데 있어 최대한으로 내재적이고 문자적인 독해를 한다는 점인데,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헤겔을 비롯한 다른 텍스트는 물론이요 맑스의 다른 텍스트들, 심지어 자본론의 (아직 다루지 않은) 뒷부분까지도 최대한 배제한 채로 한 문단 한 문단 전진해가며 독해하는 스타일이다.

이러한 저자의 독해 방식은 저자가 자본론을 규정하고 해석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준다.(그리고 꽤 동의한다.)
요컨대, 프린키피아를 이해하기 위해 뉴턴의 신학 연구를 끌어와 은유적으로 독해될 필요가 없듯이, 과학 텍스트는 그 자체로, 문자적으로 독해할 때, 세계의 심층적 구조를 표상하거나, 최소한 경험적으로 참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맑스의 저작은 과학(이라고 자칭하는)인 동시에 철학적이므로, 물신숭배에서 인간 소외를 읽어내고 시초축적에서 우발성의 유물론을 읽어낸다고 해서 상관은 없지만, 최소한 그 때 해석자는 자신이 자본론을 과학이 아닌 철학으로서 독해한다고 시인해야하지 않겠나.

이러한 독해의 결과물들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건 가치론-화폐론 부분이다.
마르크스는 추상적인 교환 과정의 가정으로부터 가치와 화폐의 개념을 이끌어내고, 실제 역사적 작동은 그 다음에야 온다.
이는 마르크스의 논증이 역사적 순서가 아닌 논리적 순서를 따름을 의미한다.
요컨대, 마르크스는 현실에서 상품 교환이 발전해온 순서가 아니라, 상품 교환은 논리적으로 단순한 교환부터 화폐상품에 이르기까지 발전하지만, 이는 현실 역사에서 발생한 순서가 아니라, 이미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자본주의 경제의 이면에 이러한 논리적 인과가 도사리고 있음을, 즉 단순한 상품교환은 이미 자본주의 경제인 것의 논리적 기원일 뿐이다.

저자가 동의할지는 모르겠지만, 저자의 독해는 사실 알튀세르와 약간은 닮았다.(심지어 1844년의 마르크스와 자본론의 마르크스 사이의 단절을 주장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자본주의는 논리적 기원에 따라 발생하지 않았으며, 자본주의가 이미 탄생한 후에 논리적 기원이 따라 나온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저자는 가치와 화폐를 노동 과정에서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교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얻어지는 것으로 본다(그러므로 노동가치론에 대한 통속적인 비판이 별로 의미가 없기도 하다).
가치와 화폐를 이렇게 관계론적으로 정의하는 것도, 어딘가 포스트-구조주의적인 느낌을 풍기는데, 이는 어쩌면 마르크스 자신이 이미 포스트-구조주의적 성격이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가끔 자본론이 이렇게까지 파헤쳐질만한 텍스트인가.. 하는 생각도 들기는 하는데, (경제학사가가 아닌 이상 누가 케인즈의 <고용, 이자, 화폐의 일반 이론>같은 책들을 이정도로 파헤치겠나) 뭐, 그게 철학 텍스트의 숙명이 아니겠나.
라이프니츠의 미적분학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해석이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은 아마도 철학사가 끝나는 날까지도 새로운 "진정한" 독해가 또 나올 것처럼.
하인리히가 자본론을 과학으로서 읽고자 하고, 실제로 그 방식이 맞다고 어느정도 공감하지만, 그의 시도 자체가 미적분학에 가까운지 모나드론에 가까운지도 명확한 것 같다.
아무도 프린피키아의 "진정한" 해석을 두고 논쟁하지 않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