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으로 이데아론이 나온다.
상기설도 물론 메논에서 본 적이 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소크라테스의 역사적 사건에 맞물려서 논의되는 건 파이돈편의 특징이다. 그러면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직접 이런 말을 죽기 전에 했더라면 어째서 극 초기 대화편에서는 나오지 않았던 것일까? 버넷에 따르면 플라톤이 청년 시절부터 소크라테스를 알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소크라테스 주위에 핵심적인 인사였을 근거가 없다고 한다. 즉 소크라테스 사후 플라톤의 생각으로 덧붙였다는 말이다.
콘퍼드 <종교에서 철학으로>, 거스리 <희랍철학 입문>, 해크 <그리스 철학과 신>에서 일관되게 서술된 내용은 피타고라스 학파의 영향이다. 피타고라스는 또 오르페우스교(이에 대한 플라톤의 수용과 비판은 나중에)와 연관된다. 파르메니데스를 위시한 철학과 종교 순환, 그리고 신화의 소용돌이에서 탄생한 플라톤 철학의 초기 정수가 <파이돈>편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파이돈의 이데아론은 상당히 거칠다. 영혼에 대한 논의를 생각해 보자. 영혼은 불사이며 신적이며 불변적인 이데아와 유사하게 그려지고 있다. 그에 반면에 신체는 다양하며, 해체 가능하고 변화된다. 파이돈의 이원론은 영혼과 신체로 분리시킨다. 물론 이런 설명은 우리가 이전에 본 <크라틸로스>에서 이미 본 적이 있다.
<크라틸로스> 400b
-어떤 사람들은 이것(soma)을 혼의 무덤이라고 말하니까. 현생에서 혼은 그 안에 묻혀 있다고 해서지.-
플라톤이 이러한 논의를 한 이유는 무엇일까? 신비주의로 영혼 불멸~ 죽음이 더 개꿀이야~는 정신승리를 말하기 위함이었을까? 얼토당토않은 논의로 이 세계는 두 세계이며, 이쪽이 있고 저쪽이 있다~는 말을 함으로써 우리가 고등학교에서 이데아론을 문제풀이 주입식으로 배운 대로 그냥 그렇고 그런 걸까? 이에 대한 답으로 주저리 허접한 내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하기보다 대가들의 이야기를 적는 편이 독회에 더욱 도움 되리라 생각한다.
프리도 릭켄 <고대 그리스 철학>과 로위 <플라톤의 철학>에 나온 이데아 설명을 살펴보자.
1.이데아설은 의미론이다. 즉 이데아설은 보편적 술어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에 답하려는 이론이다.
우리가 이전 독회에서 읽었던 <클라튈로스>가 대화편을 어떻게 마무리했는지 다시 인용해 본다.
439~440c
-만약에 이름들을 통해서 사물들을 최대한 배울 수 있다면, 또한 사물들 자체를 통해서도 그럴 수 있다면, 어느 쪽 배움이 더 훌륭하며 더 명확한 배움이겠는가? 모상에서 모상 자체가 진실을 훌륭히 표현하고 있는지를 그리고 그 모상인 진실을 배우는 것인가, 또는 진실 자체에서 진실 자체를 그리고 그것의 모상이 적절하게 만들어졌는지를 배우는 것인가? 그러니까 사물들을 어떤 식으로 배우고 발견해야 하는지를 안다는 것은 나나 자네로선 아마도 버거운 일일 게야. 그러나 이름들에서가 아니라 사물들 자체에서 이것들을 배우고 탐구하는 것이 이름들에서 그러는 것보다도 훨씬 더 낫다는 이 점에 동의하게 된 것도 만족스러운 일일세. 그러면 더 나아가 다음 것도 고찰해 보세나. 이들 많은 이름들이 같은 데로 향하고 있는 것으로 우리를 속아 넘어가게 하지 않도록, 이름들을 정한 사람들이 정말로 모든 것들이 언제나 운동하며 흐르는 상태에 있는 걸로 생각하고서 정한 것인지. 우리는 자체로 아름다운 어떤 것 그리고 자체로 좋은 어떤 것 그리고 이처럼 '있는 것들 중의 하나인 각각'이 있다고 말할 것인지 아니면 없다고 말할 것인지? 어떤 특정한 얼굴이나 그와 같은 것들 중의 어느 것이 아름다운지가 아니거니와, 이것들 모두는 유동하는 걸로 생각되네. 그러나 '아름다움 자체'는 그런 것으로서 언제나 있다고 우리는 말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언제나 사라져 가고 있는 이것을 처음엔 그것이라고, 다음엔 그런 것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들 옳겠는가? 아니면 이것은 바로 다른 것으로 되었으며 차츰 사라지고 있으며 더는 이런 것이 아니라고 말해야겠지? 그러면 결코 같은 식으로 있지 않는 그것이 어떻게 어떤 것일 수 있겠는가? 만약에 그게 같은 상태로 있다면, 적어도 그 시간 동안에는 아무런 변화도 하지 않은 게 명백하네, 만약에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고 동일한 것이라면, 제 모습에서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는 터에, 실로 이것이 어떻게 변화를 하거나 운동을 하겠는가? 하지만 앞의 경우라면, 누구에 의해서도 인식될 수가 없네. 인식을 하게 될 사람이 접근함과 동시에 그것은 다른 것이 그리고 다른 성질의 것이 되어, 여전히 이전의 어떤 성질의 것으로서나 그런 상태의 것으로 알려질 수가 없기 때문이네. 어떤 상태로도 제 모습을 유지하지 않는 것을 아는 그 어떤 인식도 없는 게 틀림없네. 그러나 크라튈로스여, 만약에 모든 사물들이 변하고 아무것도 멈추는 것이라곤 없다면, 인식조차도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네. 왜냐하면 만약에 이것 자체가, 곧 인식이 인식임에서 변화를 하지 않는다면, 언제나 인식으로 머물며 인식일 것이기 때문이네. 그러나 만약에 인식의 형상 자체가 변한다면, 인식의 다른 형상으로 바뀜과 동시에 그것은 인식이 아닐 것이네. 그러나 언제나 변한다면, 언제나 인식은 없을 것이며, 이 이치에 따라 인식하는 것도 인식되는 것도 없을 것이네. 반면에 언제나 인식하는 것이 있고, 인식되는 것이 있으며, 아름다움이 있고, 좋음이 있으며, 있는 것들 하나하나의 각각이 있다면, 이것들은 우리가 방금 말하던 것들, 곧 흐름과도 이동과도 전혀 닮지 않은 것으로 내게 보이네. 따라서 도대체 이게 이러한지 또는 헤라클레이토스 일파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많은 이들이 주장하듯 그러한지, 이를 검토하기가 쉽지 않네.-
2. 이러한 의미론적 물음은 존재론적 물음으로 이어진다. 플라톤은 이 의미들의 존재 양식에 대하여 말하며, 또 술어들의 존재론적 전제 조건에 대하여 말한다. 이데아는 보편적 술어의 의미이며, 그것은 동일한 보편적 술어가 어떻게 여러 개별적 개념들을 서술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3. 이데아는 인식론적 개념이다. 초기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도덕의 개념이나 술어들의 의미를 묻는다. 우리가 이 개념들을 사용하는 것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서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이나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을 말하는 경우이다. 그러므로 경험이 우리에게 이 개념들의 의미를 매개해 줄 수는 없다. 우리는 그 의미를 선험적으로, 경험에 앞서 인식해야 한다. 그러한 인식은 어떻게 가능한가?
<파이돈> 79a~b
-존재하는 것들에는 두 종류가 있어서, 그 하나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겠는데... 이는 우리가 인간들의 본성에 대응하는 것들로서 하는 말이다.-
감각적 지각의 능력을 넘어서는 이성의 능력, 즉 누스nous라 불리는 인간의 능력이 관계를 맺는 영역이 있음을 주장한다. 하지만 박종현 선생님이 쓰신 것처럼 '감각에 의해서 지각되는 것들'과 '지성에 의해서 알 수 있는 것들'은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다. 파이돈의 혼과 몸은 몸 안에서 구별될 뿐이지 분리되지는 않고 있다. 다시 말해 혼은 몸과 결합된 상태로 있으면서 이 둘은 우리의 인식 주관에서 구별되는 대상일 뿐이다. 이때의 결합. 우리가 살아 숨 쉬고 먹고 마시는 이 세계에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결합(koinonia)되어 있는 것들로 펼쳐져 있지 않던가.
<파이돈>100d
-그러나 내가 단순히 그리고 솔직하게 또한 어쩌면 순진하게 견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일세. 즉 그것을 아름답도록 만드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저 아름다움의 나타나 있게 됨(parousia)이거나 결합(koinonia)이거나 또는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이건 간에 말일세.-
박종현 <헬라스 사상의 심층> 164p
-요컨대, 자연에 있는 모든 것은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간에, '감각에 의해서 지각되는 것'과 '지성에 의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처음부터 결합된 상태로 있는 것이고, 그런데도 이런 구별을 우리가 하게 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우리의 인식 주관이 처한 조건에 따른 것이지만, 사물에 있어서 '지성에 의해서 라야 알 수 있는 것'에 대한 앎이 없이는 그 사물을 제대로 알 도리가 없다는 것을 강조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성에 의해서 알 수 있는 것' 이야말로 사물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거친 이데아론에서 유명한 '하나의 형상이 다수의 사물들에 현재 하면서도 하나로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한' 난점과 '아페이론'에 대한 설명은 <파르메니데스>와 <소피스테스>, <티마이오스> 등의 후기 대화편으로 이어지니 나중에 살펴보자. (박종현 선생님과 콘퍼드 같은 유명 플라톤 학자들에게 통용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성급한 비판에 대한 재밌는 내용도 미뤄두자.)
그런데 이런 이데아론의 설명은 후기 대화편으로 가서 보충되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어딘가 부족해 보인다. 그러니 우리는 여기에 더해 파르메니데스의 일자와 허무주의에 대한 극복을 시작점으로 잡고 아래 소은 박홍규 선생님의 비교적 '쉽고' 짤막한 개관을 살펴보자.
~~아래 인용은 소은 박홍규 전집에서 가장 쉬운 <서양 고중세 철학사 개관>에서 가져온 내용이다.~~
- 플라톤의 철학은 소크라테스 철학의 직접적인 연장이며 생과 사의 총체적인 문제를 다룬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하는 형이상학적 방법론에 있어서는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에서 출발한다. 파르메니데스의 시는 서문, 진리의 세계, 의견의 세계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서문에서는 파르메니데스를 진리의 길로 이끄는 여신의 기능이 그려져 있다. 플라톤 철학에서는 이 여신의 기능이 능동인(能動因)으로 탈바꿈하여 들어온다. 파르메니데스의 진상(眞相)은 일자(一者)였으나 플라톤에서는 다(多)가 진상의 세계로 들어간다. -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그러니 있다. 파르메니데스의 일자는 얼핏 보면 진실되게 보이면서 극도로 허무주의적이고 염세적인 철학이다. 없는 것은 없으니 당연히 있을 뿐이라는 말이 얼마나 명쾌한가. 하지만 다른 교수님이 우스갯소리로 말씀하신 것처럼 이건 일자무식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일자는 모든 것이 하나로 수렴되니 생성과 운동을 설명할 수 없다. 아주 간단한 말로 새로운 것이 없다. 마치 모든 것이 이미 주어졌다는 말과 같다. 하지만 세상을 둘러보라. 움직이고, 변하는 만물의 테두리는 일자로 가두기에는 너무나 광대하다. 변한다는 말은 내가 아닌 것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타자화된다는 것, 이는 일자가 아닌 다자의 세계이다. 하지만 존재는 모든 것이 타자화되는 와중에도 자기동일성을 유지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학문이란 말 자체도 사용하지 못할 것은 물론이고, 파르메니데스의 일자와 동일하게 존재와 무의 극단적인 절대 모순이나 다를 바 없게 될 테니까. 세상을 설명하기 위함. 이것이 이데아론이 태동하게 된 계기이다.
- 그에 의하면 다의 진상은 그것이 진상인 한 파르메니데스의 일자의 모습을 지닌다. 파르메니데스의 일자는 무 속에 들어 있었다. 즉 아무것도 그것을 은폐하는 것이 없다. 다의 진상은 다른 모든 타자로부터 분리되어 그것의 고유한 내용만 홀로 있으므로 그것을 가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진상을 뜻하는 희랍어 알레테이아(aletheia, truth)는 가려져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것은 다른 타자에 매달려 있지 않으며 자존한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위와 같은 것이다. 더 나아가 그의 이데아는 그 자체 속에 타자를 포함하고 있지 않으며, 속과 겉이 없으며 일자로서 직관에 주어지며 그것의 내부에 분열이나 파멸의 원인이 없으므로 그것은 영원히 존재한다. 그의 인식론을 따르면 이데아를 인식하는 주관도 역시 타자에 가리워져 있지 않으며 홀로 존재하여야 한다. 인식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만 성립하며 대상을 변화시키면 성립하지 않으므로, 이데아는 가장 완전한 인식의 대상이며 이데아를 대상으로 한 인식만이 진정한 인식이며 학이 된다. 플라톤이 주장하는 바를 따르면 변화하는 감각의 대상은 진정한 인식의 대상은 아니며, 그것이 인식이 되는 것은 그 속에도 얼마만큼 변하지 않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변화하는 세계의 내용은 끊임없이 흔들리며 가리워져 있으므로 거기에 대응하는 인식 과정도 항상 흔들리며 어둡다. 여기에는 주관적인 견해가 들어간다. 플라톤에 있어서 인식론이 중요한 것은 우주의 본질적 내용이 변하지 않고 그 자체로 있으며 이것에 접근하는 방식이 인식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주장에 따르면 사람의 신체는 생성계에 들어 있으므로 인식 능력이 확대되는 과정과 순화(純化)되는 과정은 신체를 포함한 생성의 영역에서 벗어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인식은 신체적인 것과 신체를 벗어나는 것,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사람이 신체적인 부분을 벗어날 때 성립하는 바, 신체를 포함한 생성의 영역은 인식 주관(플라톤은 이것을 영혼이라 함)과 그 대상을 허무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가리는 것이므로 진정한 인식의 주관과 진정한 인식의 대상은 신체나 생성의 영역 속에 들어오기 전에 미리 있어야 한다는 것이 플라톤의 주장이다. 이때에는 진정한 인식이 성립한다. 인식 주관이 신체 속에 들어오자 진정한 인식의 내용은 가려지고 그 기능은 분열되고 변질되는데 이렇게 가려지는 것을 그는 망각이라 부른다. 감각을 통해서 진정한 존재의 인식으로 옮겨가는 것은 망각된 과거의 진정한 인식을 다시 되찾는 것이며 플라톤은 이것을 상기(想起)라고 말한다. 플라톤에 있어서 대화는 완전한 인식이 있다는 증거이며 기하학, 수학도 역시 완전한 인식이 있다는 증거가 된다. -
파르메니데스에게 일자는 일자로서 완전히 드러나 있는 것이다. 감추어지지 않았다. 여신의 속삭임대로 온전하게 내게 들어온 것일지도 모른다. 플라톤의 다자에게 이데아는 분명 파르메니데스의 일자처럼 진상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우리 세계는 어떤가. 정말 진상이 있는 그대로 모든 것으로 내게 접해지던가? 소피스트의 멋진 혀놀림만으로도 양성되는 거짓들, 수많은 산파술의 대화에서 건져낸 대로 그것은 난점으로 내게 오는 것이지. 어느 것 하나 오롯이 진실되게 찾아오는 건 쉽지 않다. 그래서 플라톤은 감각 세계와 혼을 말한다. 이 또한 세상이 요지경인 걸 설명하려 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사유라는 것.
- 플라톤의 형이상학에서 이데아는 진상의 뜻만 지닌 것이 아니다. 이데아는 시공간에 퍼져서 변질되어 나타난 비슷한 사물이 갖는 내용의 완전한 상태이며, 이 우주의 생성을 어떠한 본질을 실현시키는 과정으로 볼 때, 이데아는 생성의 영역에서 실현되는 내용의 완전한 상태, 즉 이상적인 상태이며 가장 좋은 것이 실현된 상태이다. 즉 선(善)이다.
우주가 통일된 하나의 본질을 실현시키는 과정이라면 선도 또한 하나이며, 우주 내부에 실현되려고 하는 내용이 많은 경우에는 선도 또한 많다.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불완전한 생성의 영역은 완전한 이데아의 세계로 향하고 거기에 매달리는 까닭에 존재하는 바, 감성적 영역 그 자체 속에 영혼을 이데아의 세계로 이끄는 요인이 들어 있다. 즉 아름다움이 들어 있다. -
그리고 이후 후기까지 포함된 내용은 따로 설명하지 않고, 인용만 해두는 것으로 넘어가자. 나중에 후기 대화편을 하면서 볼 내용이니까.
- 플라톤에 의하면 진상의 영역에는 운동이 또한 들어 있다. 즉, 경험적으로 주어지는 운동은 필연적으로 암흑과 혼란과 무질서 속으로 퍼져서 상실되므로 이 한정된 우주의 일정량의 운동은 일정한 시기가 올 때 사라지고 말 것이므로 진상으로서의 운동이 있어 끊임없이 사라져 가는 경험적인 운동에 대하여 영속적으로 운동을 공급해야 한다. 따라서 이 운동은 타자에 매달리지 않으며, 경험적인 운동과 역으로 진행하는 운동이어야 한다. 플라톤은 영혼이 이러한 자기 운동을 하며, 스스로 내부에서 운동을 생성하며, 암흑 속에 침잠하는 존재를 빛 속으로 이끌어내는 구실을 한다고 말한다. 즉 인식 기능은 바로 이러한 기능의 하나라는 것이다. 플라톤은 운동인을 데미우르고스(demiourgos :기술자)라고 그의 후기 대화편인 『티마이오스』편에서 의인화하여 표현하고 있는데, 이 기술자는 이데아를 보고 생각하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성의 영역에 일정한 불변의 질서를 집어넣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의 우주관은 동태적으로 볼 때 발생론적 우주관으로 변하여, 우주의 발생과 더불어 그 속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의 발전 과정을 문제로 삼는다. 이 발전 과정은 한편으로는 이데아의 구조적인 법칙의, 또 한편으로는 데미우르고스의 기술적인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진상과 대비하여 끊임없이 변하면서 흔들리고 퍼지는 생성의 영역이 플라톤적 세계관의 하부 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그 기본 인자는 아페이론(apeiron: 무제한자, 무규정자)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아페이론은 불투명성, 혼란, 연속성, 의존성 등의 원인이다. 아페이론은 진상의 영역에서 갈라져 있는 이데아와 운동인을 엉키게 하고, 끊임없이 시공간으로 퍼지게 하면서 혼란과 불투명 속으로 이끌어가는 구실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극한에 이르러서는 모든 것이 엉켜서 구별되지 않게끔 한다. 즉 플라톤의 세계관에서 만유에는 진상으로 가는 운동과 혼란으로 자기 상실되어 가는 두 종류의 운동이 있는데, 진상의 영역은 이데아와 운동인으로 나누어지므로 진상으로 가는 운동도 두 갈래로 다시 나누어지는 바, 사람에 있어서는 혼란으로 가는 운동과 진상으로 가는 운동이 함께 엉켜 있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면 사람은 죽는 것이지만, 플라톤은 그의 대화편 『파이돈』에서 영혼이 신체에서 벗어남으로써 이루어지는 죽음만을 취급하고 있다.-
앞서 말한 파르메니데스의 일자에서 설명할 수 없는 운동.
이런 정지와 운동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을 읽어보는 것으로 마무리하자.
박종현, <헬라스 사상의 심층> 213~215p
-여기에서 더 나아가 플라톤은, 물질적인 것들이든 비물질적인 것들이든 간에, 존재하는 것들에 공통되게 ‘보다 함께 있게 된 것’(to symphyes gegonos)은 ‘디나미스’(dynamis: 힘, 능력)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힘’은 능동적으로 ‘작용하는’(poiein) 쪽의 것일 수도 있고 수동적으로 ‘겪는’(pathein, paskhein) 쪽의 것일 수도 있으며, 아주 미약할 수도 있는 것이겠으나, 어쨌든 이 ‘힘’이야말로 ‘있는 것들’(ta onta)을 ‘있다’(einai)고 말할 수 있게 하는 표지(기준: horos)라고 한다. 이 표지(기준)에 의해 이른바 순수한 형상론자들(hoi tōn eidōn philoi)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이 시작된다. 이 형상론자들의 무리에서 자신을 단연코 제외시킨 플라톤은 자신이 제외되는 이유까지도 이제부터 밝히려 한다. 우리는 생성(genesis)에 대해서는 몸(sōma)에 의한 감각(aisthesis)을 통하여 관계를 맺지만, 참 존재(hē ontōs ousia)에 대해서는 혼(마음: psychē)에 의한 논구(논증, 추론: logismos)를 통하여 관계를 맺는다. 이런 양쪽의 ‘관계 맺음’(koinōnein)이 다름 아닌 바로 앞서 밝힌 dynamis, 즉 힘(능력, 작용)이며 능동적 작용으로 서의 ‘인식함’(to gignōskein)이 성립하려면 ‘인식되는 것’(to gignoskomenon)이 있어야만 하고, 이 관계가 성립되는 한, 인식되는 것은 어떤 걸 겪게(paskhein) 마련인데, 그런 한에서 어떤 운동(kineisthai) 관계가 성립한다. 이렇게 해서 ‘언제나 똑같은 방식으로 한결같은 상태로 있다’고 우리가 말하는 것, 즉 ‘정지하여 있는 것’(to ēremoun)인 형상에 운동과의 관계가 성립하게 되었다. 그뿐더러 운동(kinesis), 삶, 혼, 지혜, 이해함, 지성(nous) 등이 ‘확실히 있는 것’(to pantelōs on)에 포함되지 않을 수는 없다. 지성을 지닌 것은 살아있는 것이며, 지성·삶·생명을 지닌 것이 전혀 운동을 하지 않고 정지하여 있을 리가 만무하다. 그러므로 운동하게 되는 것도, 운동도 있다. 모든 것이 운동하지 않는 것이라면, 삶도 방금 말한 관계맺음도 없을 것이니, 지성 또한 어디에도 어떤 것에도 없을 것이며, 어떤 것과의 관계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반면에 모든 것이 운동하고 있을 뿐이라면, 역시 우리는 지성을 존재하는 것들에서 제거하게 된다. ‘정지’(靜止: stasis) 없이는 ‘동일한 것과의 관계에 있어서 똑같은 방식으로 한결같은 상태로 있는 것’이 도대체 있을 수가 없고, 이런 것들이 없다면, 이것들을 인식하는 지성 또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식(epistēmē)과 지혜(phronēsis) 및 지성(nous)을 귀히 여기는 철학자는 모든 것을 정지시키는 사람의 주장이나, 존재를 모든 면에서 운동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의 주장 중의 어느 한 쪽만 받아들이지 말고, 존재(to on)는 그리고 일체(to pan)는 양쪽 다라고, 즉 운동하지 않는 것들(akinēta)과 운동하게 된 것들, 그 모두라고 말해야만 한다고 한다. 그러하여 ‘운동’도 ‘정지’도 성립하는 것, 즉 ‘있는 것’(to on)이다. 운동도 ‘실재성’(존재: ousia)에 관여하고, 정지도 ‘실재성’에 관여(koinōnein)한다. 즉 운동도 정지도 실재성과 결합(koinōnia) 관계에 있다. 그러나 ‘있는 것’(to on)은 실상 운동도 정지도 아니며, 이들과는 다른 어떤 것이다. 따라서 이들 각각은 서로 다른 것으로서 ‘타자성’(thateron)과 결합 관계에 있을 뿐만 아니라, 각기 자기 동일적인 것으로서 ‘동일성’(tauton)과도 결합 관계에 있다. 반면에 ‘운동’과 ‘정지’ 사이에는 결합 관계가 성립하지 못한다. 이렇게 해서 어떤 것들은 서로 결합하되, 어떤 것들은 서로 결합할(epikoinōnein) 수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결합 관계를 metalambanein(관여함), methexis(관여), koinōnia, epikoinōnia(결합), symmeixis, meixis(섞임, 혼합), (sym)meignysthai(섞이게 됨), symphōnein(조화됨) 등의 여러 가지 용어로 표현한다. 이처럼 어떤 형상들은 서로 섞이며, 어떤 것들은 서로 섞이지 않는지를, 어떤 형상은 모든 형상과 결합하고 또 어떤 형상은 모든 것을 통해 분리(diairesis)를 가져오는지를, 어떤 형상들이 소수의 경우에 결합되고, 어떤 형상들이 많이 결합하는지를 구별할(diakrinein) 줄 아는 학문이 바로 변증술(dialektikē)이다. 철학자를 찾는다면, 아마도 이런 데서 찾아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운동은 존재(to on)에 관여함으로써 ‘있으면서도’(on) 존재와는 다른 것, 즉 존재 자체는 ‘아닌 것’(to mē on)이다.-
마지막 문장이 가장 중요하다. 운동은 존재에 관여함으로써 있으면서도 존재와는 다른 것, 즉 존재 자체는 아닌 것이다. 여기서 베르그송 <시론>을 함께 독회하면서 봤던 '동일하면서도 또한 동시에 변화하는 존재자'라는 문구가 생각난다면 좋을 텐데 베르그송은 아무도 안 하니까...
다른 이야기를 좀 주저리 하자면, 소은 선생님이 중요시 여기고 설명하신 파르메니데스에서 플라톤의 이행은 꼴레쥬 드 프랑스 고대철학 교수였던 베르그송의 설명과 동일하다. 놀랍게도 이 강의록은 소은 선생님이 돌아가신 이후에 발간된 내용이다.
소은 선생님은 어떻게 베르그송의 문제의식을 꿰뚫어 보았는지... 고대 철학에 정통한 사람들의 사유가 관통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아래에 베르그송 강의록을 플라톤 도입부만 적어놓겠다. 베르그송은 본인 저서만큼 강의도 쉽게 하는 사람이므로 부담 없이 읽힐 것이다.
베르그송 <시간관념 역사>
-파르메니데스가 세우는 모순율의 모습이 바로 '어떤 것은 이다(존재한다)이거나 아니면 아니다(존재하지 않는다)이다'라는 것입니다. 모순율의 근본적인 모습이지요. 실로 오로지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만이 참된 것이라고 누군가가 선언한다면, 그는 그것에 의해 모순율을 이러한 모습으로 정립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다(존재한다)와 아니다(존재하지 않는다) 사이에 중간은 없다는 것, 첫 번째 결론은 다수라는 것은 생각될 수도 지적으로 이해될 수도 없으며, 따라서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파르메니데스가 내리게 되는 결론 중 하나입니다. 우리의 관심을 더 많이 끄는 두 번째 결론은, 모든 종류의 변화, 즉 모든 종류의 생성은 지적으로 이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은 존재한다 이거나 아니면 아니다 라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게 되면, 생성이란 없게 됩니다. 어떤 것도 생성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즉 논리나 언어의 조건만을 줄곧 철저하게 배타적으로 고집하지 않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에게는, 이 왜를 이해하는 것이 제법 어려운 일입니다. 어떤 것은 이다 이거나 아니면 아니다라는 이 논리적 원리를 세우게 되면, 바로 그것에 의해 생성은 배제되고 맙니다. 생성은 어떤 것이 이다(존재한다) 이면서도 또한 아니다(존재하지 않는다)인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떤 것이 이것이면서도 또한 이것이 아닌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저것으로 되는 것, 이러한 되기(생성)는 '이다이면서도 또한 아니다인' 어떤 것의 되기입니다. 실로 이러한 것은 어떤 것일 수 없습니다. 어떤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출발점이 무엇인지는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난번에 설명했던 바로 그 문제, 엘레아학파의 철학자들이 제기했고 그들 스스로가 나름의 방식대로 말했던 바로 그 문제입니다. 즉 어떻게 우리가 모순 없이, 부조리 없이, 생성(되기)이라는 것을, 즉 지속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 말입니다. 어떻게 더위가 추위가 된다는 것, 작은 것이 크게 된다는 것, 어린아이가 청춘이 되고 어른이 된다는 것을 모순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만약 모순율을 그 절대적인 완고한 형태에서 받아들인다면, 여기에는 실로 모순적인 것이 분명히 있게 됩니다. 더위는 더위이고, 추위는 추위이며, 아이는 아이이고, 어른은 어른이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어떤 것이 다른 것이 된다는 것은 이 어떤 것이 그 자신이면서 또한 그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에는 부조리처럼 보이는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생성이나 변화는 사물들의 존재의 근본 자체인 것입니다. 플라톤은 실재란 불변적인 것, 즉 개념이라는 것을 여전히 고수하면서도 운동을 인정하고 설명해 보려 합니다. 그는 그렇게 하기 위해 어떻게 했을까요?-
다음은 드디어 국가입니다.
매주 1장씩 천천히 하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향연 재독 마려운데 아직 안 읽은 것부터 먼저 봐야겠다...
여기서 등장하는 영혼 불멸에 대한 논증은 굉장히 허점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영혼 불멸을 증명하려는 시도라기보단, 그것이 논리적으로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설득의 시도라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닙니다 애초에 이데아의 실재를 자명한 가정으로 뒀을 때 성립하는 것이기도 하고, 더욱이 여기 논증의 핵심은 결국 철학 추구의 권유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한 영혼이 몸과 떨어질 것에의 권유, 그리고 영혼이 몸과 분리되는 것, 곧 죽음을 다루는 대화편인 만큼 분리에 대한 알레고리가 은연합니다. 결국 제자와 스승의 헤어짐을 배경으로 둔 작품이니깐요 (물론 플라톤은 부재하고 있지만, 대화 자체가 대부분 플라톤의 창작인만큼, 스승의 실제 죽음과 거리두기를 하려는 시도로 보입니다. 괜히 액자식 구조를 쓰는 게 아니죠)
아이러니하게도 저는 본질적으로 비본질주의자에 가깝고 또한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기에 그리 와닿을 수는 없을 대화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며 살아온 사람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어떤 독자에게든 큰 울림을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그 가르침을 따를 것인가는 별개의 문제겠지요 저 또한 읽으면서 과격한 금욕주의가 아닌 에피쿠로스식 쾌락주의 정도로도 여기서 좇는 형상에 충분히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죠
@무르망 아 댓글 알람이 안 울려서 이제 봤네요. 플라톤 영혼이 하데스 이러쿵 저러쿵과 불멸을 믿을 수 있는지 아닌지의 관점으로 파악하면 피타고라스 학파와 오르페우스 종교의 영향 아래있는 영혼으로만 읽게 되는 거라서 조금 아쉬운 것 같아서. 혹시 플라톤의 영혼을 몸에서 빠져나가서 슈우웅하고 날아갈 수 있는 어떤 존재로 보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비본질주의자에 가깝고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는 말은 저런 슈웅 날아가는 영혼을 믿지 않는다는 것인가요. 사실 여기 영혼은 본질이냐 비본질이냐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인간의 인식 과정과 우리가 무엇을 아는데 있어서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지 설명하면서 나온 것이라서요. dynamis 능력이죠.
@레알이랑 메논에서 굳이 영혼 개념을 사용한 것은 상기론을 위한 것이었고, 파이돈은 그런 측면에선 메논에 대한 보론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영혼을 일상적 의미(제가 믿지 못하는 것...)로만 보고 넘기면 아쉬운 부분이 많긴 합니다 사실 향연에서의 에로스와 비슷하게, 영혼도 영원불멸의 세계와 변화의 세계의 중간자라고 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파이돈 후반부에서 당연하다는 듯 가정된 이데아의 실재라는 것이 저에게는 하나도 와닿지 못했고, 이에 영원불멸의 세계니 영혼이니 하는 것의 논의도 약간 붕 뜬 감이 없잖아 있었습니다 제게 이데아라는 것은 실재하는 본질이라기보단 (플라톤이 들으면 아주 어이없는 소리겠지만) 크라튈로스에서의 이름과 동일한 도구로서밖에 여겨지지 못하는 것이지요
@레알이랑 어쩌면 저는 비트겐슈타인을 공부하지 않은 비트겐슈타인주의자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래서 역으로 플라톤 저작을 열심히 탐닉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스스로를 비본질주의자라고 일컬은 것도 이것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다만 최화 선생님께서 이데아만 아는 것은 플라톤 형이상학의 1/3밖에 모르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저는 파르메니데스는커녕 국가마저 읽지 못했으니 그마저도 못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데아에 대한 논의는 사실상 이제부터 시작이고, 앞으로 전개될 논변이 제 영혼을 어떻게 돌보게 될지 기대가 될 뿐입니다...
@무르망 아 그래서 이쪽 육체는 변하니까 온전한 지식이 아니고 저쪽 세계 영혼의 불변함이 있어야 온전한 것이다~라는 식의 이데아론. 이런 실재하는 본질로 미리 전제한다음 그 위에 하나둘 구축해나가는 철학만으로 이해하시는 분들이 있으실 거 같아서 본문에 이런 저런 써놓았습니다. 파이돈에 나오는 영혼론도 왜 그런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생각해보지 않으면 나중에 파이드로스 - 후기 대화편에서 보충되는 영혼론에 계속해서 갸우뚱하게 되거든요. 결코 그렇지 않겠지만 혼이 쏙 빠져나가서 저승도 쑥 돌아본다는 꼬마 유령 캐스퍼식 논의로만 읽게될까봐 노파심에 댓글을 남겼습니다. 후기 대화편을 기대해주세요. 항상 독회에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