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현 교수님이 <파이돈> 해제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 ”이데아 설과 관련되는 한, 특히 후기 대화편들에서 체계화된 내용은 모른 채로,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로 <파이돈> 편에 제시된 원형적 이데아 설을 공격 대상으로 삼는다“ 라며 다소 비판적으로 언급하신 이유가 궁금했었는데, 최근 정준영 교수님의 <테아이테토스>를 읽으며 마침내 살짝 이해하게 되었음. 그 힌트는 <테아이테토스>의 525번 주석(운동하는 있음) 설명에서 발견함. 

“<필레보스>는 '한도' 내지 '한도 지우는 것'인 'peras'와 '한도 지어지지 않은 것'인 'to apeiron'을 혼합(mixis)시키는 맥락이기 때문이다. (...) <필레보스>는 (<소피스트>처럼 ‘있음’과 ‘생성’을 구별하는 관점을 유지하면서도) 그 둘의 새로운 결합 가능성을 모색하는 대화편으로 보인다. 우리는 이런 두 차원의 것을 결합시키는 설명이 <티마이오스> 전체의 논조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

이는 곧 혼돈 상태(chora)에 이데아가 본(paradeigma)으로서 질서와 의미를 부여한 것이라는 의미이며, 이는 <필레보스>에서 ‘한도(peras)'와 ’한도 없음(to apeiron)‘의 혼합, 즉 정지와 움직임의 결합이 시도된 것이라는 뜻이 됨. 더 나아가 <티마이오스>에서 데미우르고스가 우주에 질서를 부여하는 구체적 실천으로서 동적 이데아 설이 완성되었음을 의미함.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과 <자연학> 같은 저서에서 질료 속에 형상이 내재한다고 주장하며,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현실과 분리되어 있다고 비판하는 노선을 취함. 하지만 플라톤이 <티마이오스>에서 보여준 모습, 즉 이데아가 질서의 원리가 되어 형상을 부여하는 과정은, 이데아가 박제된 원리가 아니라 현실에 적극 개입하는 힘을 가짐을 의미하므로, 사실상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형상과 질료의 결합과 궤를 같이함.

결론: 플라톤의 거대한 손바닥 안?
결국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데아의 정적 성격'을 비판하며 세운 자신의 체계는, 이미 플라톤이 후기에 도달했던 '역동적 존재론'의 범위 안에 있었던 셈. 박종현 교수님의 발언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스승이 이미 수행한 사유의 진화(분리를 넘어선 결합)를 간과한 채, <파이돈> 같은 플라톤 형상이론 초기의 단편적인 모습만을 공격하여 본인의 철학을 구축한 것에 대한 학술적 비판이었을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해봄. 

근데 따지고보면 이미 <국가> 5권에서 형상들의 결합(koinonia)이 언급되는 구간이 있는데, 다음과 같음. 

"그리고 '올바름'과 올바르지 못함', '좋음'과 나쁨'의 경우에도, 그리고 또 [그 밖의] 모든 형상(eidos)의 경우에도 이는 마찬가지여서, 각각이 그 자체는 하나이지만, 여러 행위 및 물체와의 결합(교합, 관여: koinonia)에 의해서 그리고 그것들 상호간의 결합에 의해서 어디에나 나타남으로써, 그 각각이 여럿으로 보이네."

이를 통해 이런 아이디어들(형상 결합)이, <파르메니데스> 집필 이전 시절부터 자리를 잡은 상태였을 수 있다는 것이 박종현 교수님의 생각이었고, <테아이테토스>에서 ‘헤라클레이토스주의’로 묘사되는 극단적인 유전설을 철저하게 분석해서 반박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 과정에서 플라톤 본인도 정적 이데아론은 그 자체로 위태롭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인식했을 수 있나봄. 아마 <국가> 시절까지는 형상의 결합에 대한 아이디어는 있어도 이것의 동적인 가능성을 내다보지 못했을 수도 있는데, 그 예로 <국가> 5권 478b부터 478e에 걸쳐 의견(doxa)을 ‘있음’도 ‘없음’도 아닌 ‘중간의 것’이라 함. 하지만 <소피스테스>에서는 ‘있음’을 ‘~인 것’으로 변환하여, 원래라면 그저 ‘없는 것’ 취급할 거짓 진술이 ‘사실이 아닌 있는 것’으로 됨. 이는 <테아이테토스>에서의 치열한 분석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싶음. 결과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 형상 이론은 플라톤도 결론내렸던 ‘있음으로의 생성’ 분야였다고 봐야할지도 모르며, 아리스토텔레스 입장에서는 자기 철학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플라톤의 초기 이데아 설만 공격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조심스레 추측해봄. 

- dc official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