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괄호가 계속 오류를 일으켜서 재업합니다)
소피스테스 245a부터 ‘있음‘과 ’하나’를 언급하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큰 것 같음. 등장인물인 엘레아 학파의 손님은 아래와 같은 발언을 함(박종현 교수님의 번역본에서 발췌).
“바로 이런 식으로 모두 그리고 전체이면서 하나일 수 없게 할 것은 아무것도 없네. (...) 참으로 하나인 것은 그 바른 의미 규정에 따라 전적으로 부분이 없는 것을 말해야만 하는 게 틀림없네. (...) 왜냐하면 '있는 것(실재)'이 하나인 것(일자: to hen)과 같은 것은 아니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하나인 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이며, 만물은 하나보다도 더 여럿일 것이기 때문이네. (...) 더 나아가 만약에 ‘있는 것(실재)' 이 하나인 것으로 인한 이 속성을 갖게 됨으로써 전체는 아니지만, 전체 자체는 있다면, ’있는 것(실재)'은 자기 결여 상태가 되네.“
손님의 발언을 요악하면, 있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이지만, 각각의 것들도 그 자체로 하나일 것인데, 그럴 경우 존재라는 하나 속에 각각의 하나들이 있는, 즉 각각의 하나가 하나의 자격을 상실하는 것을 의미함. 여기서 잠시 파르메니데스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자.
파르메니데스는 엘레아 학파의 수장이었음. 파르메니데스는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만나기 전에 스승으로 모신 분이기도 한데, 이 분이 핵심 등장인물로 나오는 파르메니데스 편도 있고, 테아이테토스 편에서도 언급되며, 소피스테스 편에서는 중요한 구간에 언급되는, 플라톤 철학에 있어 정말 중요한 인물임을 알 수 있음. 테아이테토스 편에 인용된 그분의 발언은 아래와 같다(물론 정확한 인용이 아니라고 정준영 교수님의 주석에 나오긴 하지만, 파르메니데스가 말하는 핵심은 전달함. 아래 인용문은 정준영 교수님의 번역본에서 발췌).
“그것은 유일하고,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있음'은 모든 것에 대한 이름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있음‘은 곧 ’존재’를 대변할 것이라고 봤기에, 존재는 쪼개질 수 없는 하나이고, 이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것의 본질을 반영하지 못하는 허황된 것이라고 봤음을 알 수 있음. 파르메니데스가 있음을 하나로 보기만 한 것을, 플라톤은 각각의 것들 모두가 전부 하나의 속성을 지님을 소피스테스 편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임.
그렇다면 이 두 입장의 차이가 어떤 영향을 일으킬까? 만약 파르메니데스처럼 존재는 오직 하나이며 각각의 것들을 이름 붙이며 구분하려는 행위는 그저 우리가 하나뿐인 존재들이 서로 다른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라 생각할 경우, 각각의 존재가 지니는 의미는 불필요하고, 오직 전체로서 존재하게 됨. 마치 곤충 사회처럼 존속을 위해 각자 역할만 충실해야 함. '너'와 '나'라는 이런 개념이 불필요해지고 오직 '우리'만 존재할 것임. 이것이 현실에서는 전체주의로 구현되었고, 쟈마찐의 우리들이나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의 경우 더욱 극단으로 가서 오직 시스템을 유지하는 도구로 전락한 인간의 존엄성을 보여줌.
반면 플라톤은 각각의 존재의 의미에 중요성을 뒀고, 심지어 기존엔 ‘없는 것(to me on)’이라고 퉁쳤던 것들을 소피스테스 편에서는 ’~이 아닌 것(to me on)'으로 변환하여, ’다름(heteron)’으로서 존재의 자격을 부여한 것임. 즉 ‘무엇이 아님‘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아하! 이것과 다를 뿐인 다른 것이구나!‘ 라며 새롭게 바라볼 여지를 줌.
근데 한 가지 의문점이 남음. 국가 편은 개인의 개성보다, 효율성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구간들이 나옴. 가령 ‘황금의 인간’과 ‘구리의 인간’을 구분하며 각자에게 그들만의 역할이 있다고 주장하는 구간이나, 수호자는 수호자의 일을, 장인은 장인의 일을, 즉 각자 할 일을 제대로 하는 것이 훌륭한 사회라고 주장하는 논지나 결국 플라톤은 개성은 등한시한 시절이 있던 것 같음. 그런데 왜 저렇게 바뀌었을까? 국가 5권에도 나오듯이 플라톤의 중기 철학 시절에도 형상의 결합에 대한 아이디어는 존재하는데, 아래와 같음(박종현 교수님의 번역본 발췌).
“각각이 그 자체는 하나이지만, 여러 행위 및 물체와의 결합(교합, 관여: koinonia)에 의해서 그리고 그것들 상호간의 결합에 의해서 어디에나 나타남으로써, 그 각각이 여럿으로 보이네.“
분명 그 자체는 하나이지만, 결합으로 인해 여럿으로 보인다고 분명 언급함. 즉 이 중기 시기 플라톤의 입장은 아마 이럴 것 같음. 각각의 것은 그 자체로 하나임. 그런데 그것은 그것이다 라고 표현하기에는 존재가 가진 복합적인 면모를 결코 담아내지 못함. 그저 이를 인식하는 단계인 것 같음. 즉, ’~이지 않은 것(to me on)‘의 가능성까지 나아가진 못한 모양. 하지만 이 to me on 용법의 변환으로, 우리는 있음과 없음, 참과 거짓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 ‘다름’을 포용할 수 있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법률 편에서 서로 다른 구성원들이 결합(koinonia)하여, 불안정함에도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는, 티마이오스 편의 데미우르고스가 질서를 부여하듯, 법률이 그 역할을 해주리라 기대한 것 같음. 플라톤은 중기 시절 각각의 하나들이 배타적으로 각자 따로 존재하는 것만 생각했었으나, 테아이테토스 편에서 극단적인 고립의 위험성을 직감하여, 소피스테스 편에서 마침내 포용하여 결합하는 가능성을 도출한 것이라 추측함.
결국, ‘하나(Hen)'가 의미하는 바는 단지 하나가 아니며, 우리 사회의 질서에도 영향을 미치는 사고의 전환을 야기할 힘을 가진다고 생각함. 더 나아가 '하나(Hen)'를 찾는 여정은 나를 지우고 전체의 부품이 되는 과정이 아니라, '다름(Heteron)'이라는 거울을 통해 비로소 온전한 '하나'로서의 나를 발견하고 타자와 결합하는(Koinonia) 과정일 것임.
참고하길 권하는 글:
to on을 ‘~인 것’으로 번역한 박종현 교수님의 통찰
<파이돈> 해제 속 박종현 교수님의 '아리스토텔레스 비판'(의 마지막 문단 일부)파이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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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입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