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이 행복을 눈에서 아주 멀리 치워두고 무덤 저편의 다른 세계로 옮겨놓는 것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곳에서는 개념들을 혼란시키기가 더 쉬울 것이라 믿기 때문이겠지요. 당신들이 당신들의 저 천국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든 — 혹은 당신들의 진정한 속내가 드러나지 않도록 오히려 침묵하든 간에: 당신들이 그것을 시간에 의존하게 만들고 다른 세계로 옮겨놓는다는 그 유일한 사정만으로도, 그것이 감각적 향유의 천국이라는 사실은 반박할 여지 없이 증명됩니다.
여기에는 천국이 없다고 당신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저편에는 있을 것이라고요. 청컨대 묻겠습니다: 저편에서 이곳과 다를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분명히 단지 세계의 객관적 성질, 즉 우리 현존의 주변 환경(Umgebung)일 뿐입니다. 따라서 당신들의 의견에 따르면, 현재 세계의 객관적 성질이 이 세계를 천국에 부적합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하고, 미래 세계의 객관적 성질이 그것을 적합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당신들의 지복(Seligkeit)이 주변 환경에 달려 있으며, 따라서 감각적인 향유라는 사실을 더 이상 숨길 수 없습니다.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복된 삶에의 지침, 또는 종교론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존재 불가능성인 구역질 속에서, 동시에 우리는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로 고정하게 되며, 숨 막히는 협소한 순환 속에 가두게 된다. 우리는 그저 거기에 있으며(On est là), 있는 것 이상의 아무것도 행하지 못한다. 또는 우리가 완전히 넘겨진 채로, 모든 것을 소진해 버렸다는 것. 이 사실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덧붙이지 못한다. 이것은 우리가 이 작업의 도입부에서부터 약속해 온 것, 즉 순수한 존재에 대한 경험 자체다(c'est l'expé-rience même de l'être pur). 그런데 '더-이상-아무것도-해 볼-것이-없음(il-n'y-a-plus-rien-a-faire)',이란, 어떤 행위도 쓸모없어진 한계상황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보다 자세히 말해 우리에게 남겨진 선택은 오로지 이 상황에서 탈출하는 것뿐이라는, 바로 그 최상의 순간을 지시하고 있다. 순수한 존재에 대한 경험은 이와 동시에 내적으로는 대립되는 경험, 즉 이 순수한 존재에 대한 경험이 부과한 탈출의 경험이다.
─에마뉘엘 레비나스, 탈출에 관해서
따라서 문제는 우리가 스스로가 초래해 온 복종들의 역사를 다시 더듬는 일이 될 것이다. 말하는 모든 행위에 내재한 숙명. 요컨대 '여기, 이 소여 X'를 메타-X라는 정립 안에 기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소여를 그것이 스스로를 내어주는 그대로 내버려두기, 어떠한 보통명사도 그 위에 군림하지 않게 만들기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고유명사에 머무를 수 없다는 불가능성은, 철학함의 행위 안에서 어떤 2차적인 숙명—모든 소여와 모든 발화를 단지 공통적인 기표만이 아니라, 주권적인 기표의 지배 아래로 기입하도록 몰아넣는 그 숙명—으로, 과오도 출구도 없이 이어지는 것일까? '산'이라고 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근거'라고 말하도록 몰아넣는 바로 그 숙명을? 만약 긍정적 기입이라는 것이 언제나 이미 하나의 환상이었다면? 만약 코이논(koinon)의 정립이—그것이 강요하는 포섭과 더불어—칸트가 초월론적 이념들에 대해 말하듯, 언제나 이미 그 청중들을 기만해 왔고, 결코 성공한 적도 없었으며, 성공할 수도 없었다면? 만약 정립된 지시체들의 전문가들이 진실로는, 그리고 그 자신들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이 소여를, 또 저 소여를 남겨두는 일을 결코 멈춘 적이 없었다면? 정치철학에서는 말한다: 공통자(국가...)를 정당화하되, 개인을 지워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그러나 거기에는 적지 않은 순진함이 있다. 공통자와 단독자 모두 우리를 얽맨다면, 이는 오히려 우리가 황폐해진 장소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라이너 쉬르만, 부서진 헤게모니
파핏이 통속적인 자아 동일성을 분해한 끝에 후련한 해방감만큼이나 저릿한 현기증을 느낀다고 고백했을 때, 들뢰즈가 내재성은 철학적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며, '철학의 현기증'이라 그저 가리켜만 보였을 때... 모두가 같은 것을 본 게 아닐까
자아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통찰은 지적으로 매혹적이지만, 이걸 진정으로 체화하기란 네르발이 '실현한' 것처럼 자아를 물리적으로 소거해야 가능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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