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원작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유명한 영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작품 <시계태엽 오렌지>.


폭력적, 선정적인 내용으로 당시 커다란 파문을 빚은 작품이지만,


동시에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꼽히는 거장의 작품.





정작 원작자인 앤서니 버지스는 자신의 작품이 이 영화의 원작 취급받는 걸 싫어했다고 하는데...


후술하겠지만, 영화와 원작이 담고 있는 메시지가 정반대임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다.




아무튼 분명히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시계태엽 오렌지>는 명작의 반열에 든 영화이다.


그것 하나만큼에는 누구도 반론을 내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나는 이 유명한 영화를 본 적이 없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기에 이름 정도는 들어봤지만 어디까지나 그 정도.


따라서 이 작품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 하나 없이 원작 소설을 펼쳐야 했다.




그렇게 내가 이 작품을 읽으며 가장 먼저 느낀 감상은... 찝찝한 불쾌함이었다.






















주인공 알렉스는 불량한 십대 청소년이다.


친구들도 마찬가지로 불량한 십대 청소년들이다.


그런데 이 불량함이란 단순히 학교를 빼먹고 놀러다니는 수준이 아니다.


시작부터 책을 읽던 선량한 노인을 폭행하는 것은 예사요,


열살 배기 소녀 둘을 집으로 끌어들여 술을 잔뜩 먹여 강제로 덮치거나(영화판에선 나이가 각색되었다고...)


한 작가의 집에 쳐들어가 작가를 두드려 패고 작가의 아내를 윤간하고,


고양이를 키우던 노파의 집을 강도질하다 그녀를 폭행해 죽이기까지 한다.




이 모든 대목이 알렉스의 일인칭 시점으로 몹시 유쾌하게 서술되어 있기에,


독자들은 이 작품을 읽으며 지독한 불쾌감을 느끼게 되고,


주인공인 알렉스라는 존재가 뼛속까지 악인임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런 알렉스는 친구들의 배신으로 결국 붙잡히게 되고,


노파를 강도질하다 죽인 죄로 14년 형에 처해지게 된다.


그러나 그런 알렉스에게 주어진 선택지.


새롭게 만들어진 정부의 정책 '루도비코 갱생 프로그램' 에 협조 하면 형을 대폭 감형받아 곧바로 출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루도비코 갱생 프로그램'이 도대체 무엇이냐 하면...(혐짤 주의)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도 짤이나, 혹은 타 작품 속 오마쥬를 통해 봤을 이 장면.


이 장면이 바로 작중에서 루도비코 갱생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장면이다.


루도비코 요법이란 쉽게 말해, 대상의 악행을 강제로 교정하는 요법이다.


메스꺼움과 구토를 유발하는 약을 주사하고서, 악행을 저지르는 영상이나 영화를 보여준다.


그러면 대상은 악행을 저지르려 마음에 떠올릴 때마다 그때의 트라우마가 재생되어 강제로 악행을 멈추게 된다.


원작자인 앤서니 버지스는 프레드릭 스키너의 조작적 조건형성이론(operant conditioning)에 영향을 받아 이 작품을 집필했다고 하는데, 그 영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쥐를 이용한 실험으로 유명한 프레드릭 스키너의 이론.


지렛대와 먹이가 나오는 접시를 연결해 쥐에게 지렛대=먹이가 나옴 이라는 사실을 주입시킨다.








그래서 우리의 주인공 알렉스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파렴치한 악인이던 그는 사람 하나 해치지 못하고,


오히려 이전에 자신이 폭행한 노인을 만나도 역으로 얻어맞을 뿐,


악행을 저지르려는 발상 자체를 떠올리기만 해도 고통스러워하는 몸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선해진 것일까?


이 작품이 던지고자 하는 질문이 바로 이것이다.





알렉스는 악인이다.


무언가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악한 일을 즐기는 성격인 것이다.


그런데 그는 강제적 조작에 의해 악을 미워하고 선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는 정말로 선해진 것일까?




단순히 생각해 보면, 악인을 선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 루도비코 요법은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실제 속마음이 선하든 그렇지 않든,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공리적 관점에선 결국 좋은 일 아닌가?


그러나 작가는 바로 그 부분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기 위해, 주인공 알렉스에게 특이한 설정을 부여한다.





바로 알렉스가 음악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특히나 그는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사랑한다.


알렉스의 안에서 아름다움의 극치인 음악과 더러운 악행은 하나로 합쳐진다.


그는 아름다운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심취해서 들으며 십대 소녀 둘을 강간한다.




그리고 루도비코 요법은, 알렉스의 악행과 마찬가지로 그가 사랑하던 음악을 들을 수 없는 몸으로 만들어 놓는다.


이것이 정말 옳은 일일까?


어느 사람의 마음 속 한 부분을 잘라내어 조작한다면, 그것이 정말 사람이라 부를 수 있을까?


선함이 선을 숭상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악한 부분을 잘라내서 만들어진 선함이라면, 그것은 정말 선함일까?




작품의 끝부분에서 정부는 비인도적 실험에 대해 비판을 받게 되고,


알렉스는 결국 루도비코 요법으로부터 치료를 받는다.


그는 다시 폭력과 강간과 강도질을 사랑하게 되고, 다시 태어난 자연스러운 모습인 악인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알렉스는 한동안 나와서 불량배 생활을 계속하다가,


어느 날 자신의 불량배 친구가 번듯한 어른이 된 모습을 보고는 현타를 느껴 불량배 생활을 청산한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알렉스의 악행을 고친 건 종교도, 선한 마음씨도, 혹은 마음을 강제로 고치는 루도비코 요법도 아닌 그저 '성장'이다.


알렉스는 십대에서 벗어나 어른이 되어 불량배 생활을 접는다.


누군가는 이것을 죄책감 하나 없는 가증스러운 도피라 부를 수 있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작중에선 성경의 구절을 빗대어 사람을 과일에 비유한다.


신이 인간을 과일처럼 심어 길러내듯이,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라나 성장하는 존재이다.


십대인 알렉스는 언젠가 어른이 된다. 이것은 옳고 그르고를 떠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런데 루도비코 요법은 사람을 강제로 선하게 만든다.


이것은 마치 자연스런 과일인 오렌지 안에 인공적인 태엽을 박아 돌아가게 만드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모습과 같다.




선이란 무엇인가?


사람에게서 악을 도려낸다면 그것을 선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은 옳은 일일까?


어쩌면 그것은, 그 도려낸 악행보다도 끔찍한 더한 악행이 아닐까?


이 작품은 그런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던진다.




원작자인 앤서니 버지스가 영화판을 싫어했던 이유는,


이런 작품의 메시지를 담은 결말부를 훼손시켰기 때문이다.


영화판의 결말에서 주인공 알렉스는 루도비코 요법을 치료받아, 다시 절대악인으로 돌아간다.


물론 이는 영화판 <시계태엽 오렌지>가 소설과 시사하고자 하는 바가 달랐기 때문이지만...


원작자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불쾌할 만한 각색이었으리라.




























열심히 썼으니 개추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