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어바흐같이 널리 이해되고 검증을 마친 버지니아 울프 해석에 대한 소개가 아니라
 오히려 그에 좀 반하는 그냥 내 감상이고 내 이해를 쓴 글임

의미 이해라는 키워드로 글의 성격과 의도를 빠르게 밝히는데는 도움이 되는 것 같아 굳이 사용했음


그럼에도 오해가 있었다면 시간 낭비하지 마시고 뒤로가기 ㄱ


그동안 독갤에서 작성한 다른 글들의 연장에 있기도 한 글이기도 하고
이미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확고하신 분들에게도 권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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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un had not yet risen.  

The sea was indistinguishable from the sky


이건 파도의 첫 문장이다만

등대로도 여기서부터 설명을 시작할 필요가 있다

이 문장은 구분이 성립하기 이전의 순간에 대한 묘사이자

언어가 어떤 의미를 전달하기 이전에 애초에 그 구분이 성립하는 순간의 조건에 대한 의문을 암시하는데

그건 발화의 동기와 형식을 비롯한 그 언어의 배경에 대한 이해의 요구이기도 하다

동시에 '어떤 식으로 말하는게 좋을까?' 와 같은 고민이라기 보다
말하고 싶고 해야겠다고 느낀 것을 최대한 표현하는데 더 무게를 두면서도 미리 놓는 배려기도 하고

 '등대로'는 그 ‘어떻게 말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더 전면에서 작용하고
 형식에 비교적 덜 제약받는 언어 파도의 이해에 필요한 조건이자 기반으로 길잡이가 되는 역할도 하면서 
두 작품은 그렇게 분명한 의도로 구별되고 또한 구체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

등대로의 그 형식은 작가가 스스로 명명한 H구조란 것이고 

H에서 가로축은 시간이고 세로축은 그 시간에 할애된 언어의 물리적인 분량을 의미한다

표면적으로 보면 시간과 사건과 행동의 일치를 통해 정화에 이르는 고전주의적 논리에 따르는 것으로도 보이고

처음의 한나절과 마지막의 한나절만이 강조되고
그 사이의 대략 10년이 넘는 시간은 거의 비워진 느낌으로의 그 구조적 대칭에서 감각적으로 연속성이란 인상을 받지만

그 감각은 H라는 기호의 시각적 이미지에 의존해서 일치를 연상케하는 트릭에 의한 반응이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10년이란 시간의 물성에 대해서 고전주의의 원칙은 모른척할 수 없고

 작가 역시도 그걸 몰라서 우격다짐으로 우길 생각으로 쓴게 아니란 거지

울프에게 있어 H라는 구조는 일치를 실현하는 형식이 아니라
무언가를 일치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장치일 뿐이고

형식적으로는 규칙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규칙이 의미를 보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이런 울프의 태도는 다분히 단테,셰익스피어적이다

형식의 권위를 빌리지만 그 권위가 의미를 담보하지 못하도록 치밀하게 역설을 설계하는 그 방식들 말이다


이 구조 위에서 램지 가족의 소통은 “모범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등대로 갈 것인가의 문제는 표면적으로 사소한 갈등이고

비록 그 묘사의 밀도가 그리는 것은 그 표면의 갈등이 주가 아니라 그들이 이미 형성하고 있는 삶의 방식이였음이 드러나더라도

고전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거기엔 극적으로는 빈약한 갈등이 여전히 서사의 관습대로 주어지고 있고

그 갈등이 극을 통해 감정적 일치로 전혀 구축이 안됐음에도 10년간 유지되는 일치의 구조 속에서 끝내 봉합된다


말하자면 고전주의의 평가 방식이란 관점에서 울프의 언어는 섬세하고 유약한 여성성이 빚은 가냘픈 떨림이고  
달리 말하면 그 갈등과 소통은 설득력이 약하고 문체딸이나 치면 되는 서정시인이라는 말을 하기도 하는 이유라고나 할까

이미 현대문학의 거성인 버지니아 울프가 저평가 되고 있다 말할 순 없겠다만
 그녀의 언어가 공공연하게 의식의 흐름이라는 그 형식에서 비롯하여 섬세함 여성성 결국 여성주의로 환원되는데

그 현상의 상당한 이유가 그녀의 작품이 고전주의적 의미의 정화를 구성하지 않는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음에도
H구조는 마치 그 고전주의에 구조적으로 명백히 속하는 것으로 보여 거기서 그녀의 섬세하고 유려한 문장력은 인정하더라도
그 언어들이 심오해지는데는 실패하고 있다는 인식이 있는 것 같단 말이다

뭐가 됐든 애초에 울프는 그러한 소통을 목표로 한 적이 없다


램지 부인의 죽음 후에 가족 사이에서 나타나는 화해는 뚜렷한 동기나 구조적 필연 위에서 발생하지 않았고에서

이어지는 말들은

스스로를 스폰지라고 여겼던 여성이 사라지면서 자신의 이상을 감정적으로 투사해온 막을 잃어버린 배우들이 더 이상 뭔가를 연기를 할 필요가 없어졌을 뿐인 상태를

관성적으로 화해며 정화라고 이해한데서 오는 평가들인 것이다

 그 배우들의 정화는 빈약한 화해인 대신 관성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이며
그것은 긴 인간의 역사속에서 반복되는 가장 보편적이고도 실존적인 침묵이자 좌절에 대한 이해다


울프는 고전주의가 요구하는 ‘신성한 일치’를 의도적인 H빔 구조로의 재현으로

실존이 거기에 부응할 수 없는 만큼 그 "일치"가 얼마나 환상을 위한 작위인지 역설적으로 드러내고야 만 것이다


그 10년! 어쩌면 더 길었을 그 시간을 생각해 보라!
 

대략 3~4일의 시간 속에서
완결된 의미를 구성하는 고전적 구조를 기준으로 보면
그 10년의 길이는 1000번의 카타르시스가 있어야 할 시간이지만 동시에 가족 관계에서 받은 트라우마 앞에서는 여전히 충분할 수 없는 시간이고

결코 신성한 일치를 보증하지 않는 간격의 시간이지만 처음 이야기한대로 그 등대에 사람들이 10년이 지나고서도 도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도착을 위해 이 작품에서 그 시간은 램지들 사이에서는 거의 아무런 극적 의미는 물론 현실적인 변화도 생성하지 않는다

램지 가족의 관계에서 시간은 오직 죽음의 도래의 매개일 뿐이다
그들은 그 시간 속에서 고전적 의미의 변화로 조직되지 않고 그 마지막 등대로의 도달조차 그냥 속으로 생각하는 혼잣말로 이른 체념이

그냥 영원한 과거에 미리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대낮에 육지에서 등대로 자연스럽고도 의무적으로 향하게 한다

램지 씨가 평생 추구했던 이상이자 q까지 도달했으리란 그 지성은 질서안에서 부여받은 보증일 뿐이니

그 이상이 그의 실존 안에서 유효하게 작동하기 위해선 오직 그 보증이 유효한 곳에서 그 결대로 빛을 반사해주는 표면이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 표면이었던 램지부인이 죽고 없으면 10년이 지난 어느날이라도 문득 등대로까지 가야만하는 것이 견딜 수 없는 시간 앞에서의 실존인 것이다
 

역시 자연스럽게도 거기에선 그들이 기다린 신성한 의미나 특별 빛을 느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 울프가 바라본 긴 시간 동안의 인간을 그 관점에서 인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만


릴리를 통해 드러내는 그녀가 스스로 추구하는 태도의 본질을 이해하는 건 좀 복합적인 접근을 요구한다


그녀가 그린 그런 고전적 시간의 논리를 거스르는 퇴행이란 실존은 의미를 부정하기 위해 고안된 비젼이 아니다

그건 시간에서 신성한 약속보다 마모를 먼저 보는 의미의 회귀나 복원이라는 언어에 더 가깝다

그것은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마모 즉 죽음이라는 본질적인 조건의 의미에 대한 인식이기도 하며
중요한 것은 그것을 해결하는 것 혹은 그런 것을 줄 수 있다는 약속이나 믿음을 벗어나 그 아무 보증이 없는 삶에서 어떻게 오직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일 것인가에 있다

그렇기에 그 mass를 덜어내고 싶고 또 그 증거를 화폭에 담고 싶었는 릴리에게

같은 그 10년의 시간은 구체적으로 그 mass의 메타포가 되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결국은 그것을 부정하는 무언가 있었음을 의미하는 선을 캔버스를 갈라 남기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실존의 승리 선언이나 대단한 깨달음이나 열반 같은 것이 아니고 순간의 포착에 대한 찬양도 아니다

죽음이 허무가 아니며 심지어 허무를 직시한다고 해도 그게 허무주의는 아니고 아름다움을 보여준다고 유미주의가 아니다

그 확신에 찬 문장의 선언은 등대로를 상징하는 구절이 되어 신성한 대접을 받고 있지만
그건 계시가 아니라 능동적인 결심이 있었음을 드러낼 뿐이다

그건 낮에 날기로한 나방의 선택과도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이 나방은 실제 생물로서의 나방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가 아니라
울프의 의식 속에서 작동하는 형상이다만

그 인식 속의 나방은 어떤 이해에서 부터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밤에도 낮에도 같은 종류의 나방들이 각자의 시간에 날아다니는 존재니까)

그저 움직이는 형상 그 자체고

그러나 낮에 나는 나방에서 느끼는 우아함이 파생하는 의미를 부정할 수가 없고 어느 시간에 나는 나방이더라도 여전히 거기에 대해서 아무도 아무것도 모른다 

릴리가 그리는 선은
바로 그와 같은 것이다

그 직선은 램지의 알파벳처럼 타인에게 보증을 주고 확신을 주는 이성 혹은 의미라 불리는 기호도 아니며
두 세로 구조 사이를 이어 시간의 일치를 증명하는 구조물도 아니어야 하고

또한 그것은 고전주의가 말하는 자연 소통 정화와 같은 이름으로
미리 보증된 질서 위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그럼에도 기어이 성립을 하기에 아니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미지와 같은 논리로 그것을 묘사한다

그것은

그러한 기준을 벗어난 자리에서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 상태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려는 움직임이 있었음을 오직 스스로에게 비추는 빛과

어제와 오늘을 확고히 연결하는 증거로서의
하늘의 태양이나 별과 같은 빛의 구분이기도 하다

그저 신성한 빛 아래에서만 그런 서로를 서로가 그저 견디며 누구에게도 의미 없이 긴 세월 뒤 한낯에라도 도달해야 했던 등대가 있었음을
또 한편에선 긴 세월을 들여 기어이 누구도 보지 않을 것이라 말하면서도 그저 선 하나를 긋고 감격에 휩싸이는 개인에 대해서 말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또한 거기서 

The sun had not yet risen.  

The sea was indistinguishable from the sky

이 문장들은 비로소 등대로에서 있었던 그 구분의 선이자 빛이 아직 닿지 못한 순간임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것은 셰익스피어가 말한 The rest로써의 Silence의 즉 맥락이 있는 0을 상기시키지만 

동시에 Sun이라는 미리 정해진 신성한 약속을 구체적을 지목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어떤 힘이 화폭의 표면을 어디로 흐르게 할 것인지 또한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