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스페이스는 왜 그렇게 불리는가‘, 9회中




필자는 지금까지 포스트모던화와 정보화의 관계에 대해 고찰해 왔다. 양자의 결부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분명하다.

포스트모던의 움직임은 1970년대에 전면화되었다. 캘리포니아의 SFX 영화이든, 일본의 애니메이션이든, 독일의 테크노 뮤직이든, 혹은 그 셋의 공통된 배경에 있는 비디오게임이든, 1960년대 이전의 컨텍스트에서는 감상도 비판도 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포스트모던적’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새로운 표현들이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생겨났다. 그리고 그것들은 이후 확실히 영향력을 키워, 1990년대에는 일종의 문화적 패권을 쥐기에 이르렀다.

또한 이 시기에는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큰 구조 변화가 발생하고 있다. 제임슨은 그 지표로서 베트남전쟁의 종결과 서밋의 시작, 생태학과 소수자 문제의 출현, 브레튼우즈 체제(고정환율제)의 붕괴 등을 들고 있다. 새삼 지적할 필요도 없지만, 이러한 사건들은 모두 1990년대의, 즉 냉전이라는 "큰 이야기"가 명목상으로조차 역할을 끝내고, 세계화된 시장경제 아래에서 작은 정책 공조가 반복되는 시대의 세계체제와 직결되어 있다. 이 밖에도 우리는 1970년대에 시작된 "포스트모던적인 것"의 예를 무수히 들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포스트모던의 문제의식 자체가 1970년대에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보화의 움직임 또한 같은 1970년대에 급속히 전개되기 시작했다. 컴퓨터 과학의 탄생은 1930년대이고, 또 세계 최초의 컴퓨터가 개발된 것은 1940년대이지만, 그 네트워크화, 멀티미디어화(인터페이스화), 개인화의 기원은 모두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에 집중되어 있다. 상징적인 연호를 차례로 들어 두자면, 인터넷의 기원으로 여겨지는 알파넷(ARPANET)이 가동된 것이 1969년, 더글러스 엥겔바트에 의해 최초의 윈도 시스템이 공개된 것이 1968년, 앨런 케이에 의해 개인용 컴퓨터의 구상(다이나북)이 제시된 것이 1972년의 일이다. 또 같은 시기의 캘리포니아에서는, 이러한 전문가들의 기술적 성과와 나란히, 아마추어들의 컴퓨터 이용이 반체제 문화 및 신좌익 운동과 결부되면서 하나의 문화운동으로 집결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1980년대의 사이버펑크와 비디오게임 문화, 더 나아가 1990년대의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 등은 모두 이 시기에 준비되고 있다.

이와 같이 포스트모던화와 정보화는 완전히 동시대적인 움직임이며, 그러므로 양자는 실질적으로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위에서 든 SFX 영화나 테크노 음악에 한정되지 않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작품들은 정보기술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경우가 많으며, 또한 이 30년 동안 진행되어 온 정치경제의 글로벌화는 정보환경의 변화와 떼어놓을 수 없다.

포스트모던화와 정보화는 필자의 지적을 기다릴 것도 없이 빈번하게 결부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그 결부의 질이다.

‘포스트모던화’와 ‘정보화’라는 두 말은 본래 서로 다른 성질의 현상을 가리키고 있다. 전자는 사회 전체의 구조 변화(상징계의 기능부전), 이른바 거시적 현상을 가리키는 반면, 후자는 사회 안에서 오가는 커뮤니케이션의 질적 변화, 즉 미시적 현상을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양자의 관계는 결코 자명하지 않으며, 실제로 정보기술의 변화가 사회 전체의 구조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인터넷이 보급된 1990년대에 들어서고 나서부터라고 해도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양자는 1970년대 이래 늘 어떤 상상력 속에서, 더구나 기묘한 왜곡을 수반한 채 결부되어 왔다.

‘정보화’는 미시적인 변화를 가리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은 흔히 구체적인 정보기술의 혁신이라기보다, 오히려 거시적인 역사적 변화를 나타내는 지표로 사용되어 왔다.

맥루언의 <구텐베르크 은하계>(1962년), 이어지는 <미디어의 이해>(1964년), 피터 드러커의 <단절의 시대>(1968년), 앨빈 토플러의 <미래의 충격>(1970년), 대니얼 벨의 <탈공업사회의 도래>(1973년) 등,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친 미국에서는 정보화를 산업혁명 이래의 중요한 변화로 파악하는 논의가 다양한 시점에서 잇따라 나타났다. 그리고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은, 당시 우리가 본론에서 “정보화”라고 부르는 움직임(예시로 든 것과 같은 컴퓨터의 네트워크화, 멀티미디어화, 개인화)은 아직 거의 구체화되어 있지 않았고, 많은 경우 그 실현 가능성조차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논의는 기술적 뒷받침을 결여한 채 정보화가 지닌 충격력을 강조하기 위해, 정작 핵심적인 곳에서는 커다란 가설적 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 틀은 당시 "미래학"이나 "미래예측" 등으로 불렸으며,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를 앞둔 일본에서도 우메사오 다다오, 가토 히데토시, 고마쓰 사쿄 등 주로 교토의 지식인들에 의해 활발히 소개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그것은 산업혁명 이래 근대사회의 진전에 여러 가지 한계를 보면서도, 그 한계를 넘어설 가능성을 새로운 과학기술(우주개발, 바이오테크놀로지, 로봇공학……, 컴퓨터 기술도 그중 하나였다)에 기대하는, 지금에서 돌아보면 낙관적인 역사관이다. 매클루언의 "글로벌 빌리지", 드러커의 "지식사회", 토플러의 "제3의 물결", 벨의 "탈공업화 사회"와 같은 거대한 키워드는 모두, 각각 사정거리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그 역사관을 배경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중에서도 매클루언의 역사관은 몽상적이어서, 훗날 그것은 피터 러셀과 같은 뉴에이지 사상가들에 의해 세계의 네트워크화를 생명진화의 정점(지구의식의 탄생)으로 파악하는 기묘한 신비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137). 필자는 제4회에서, 딕에게도 영향을 준 그 신비사상을 "정보론적 범신론"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미래학의 발상은 1960년대에 급속히 고조되었지만, 1970년대 후반에는 이미 힘을 잃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과정은 당시 선진국 사회가 놓여 있던 양의적인 상황을 잘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 시기는 다른 한편으로, 리오타르가 '거대한 이야기'의 해체라고 부른 상황, 즉 '진보'나 '미래'나 '성장'과 같은 개념의 가치 저하가 급속히 진행되었고, 그 변화의 의미에 대해서도 다양한 논고(이른바 포스트모던론)가 나오기 시작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래학이란 사실 포스트모던의 도래를 고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변화에 대한 방어 반응, 즉 '거대한 이야기'의 실추를 보완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자아내기 위해 나타난 담론이었다고 파악할 수 있다.

미래학적 담론과 포스트모던의 현실 사이의 이 상반된 관계는 실제로 몇몇 논자들에 의해 지적되고 있다. 예컨대 포스트모던의 개념을 건축비평에 도입한 것으로 알려진 찰스 젠크스는, 1971년의 <건축2000>에서 자신 나름의 미래관을 제시하는 데에 앞서, 우선 벨 식의 예측 가능성 논의를 비판하는 것에서 시작하고 있다. “다니엘 벨과 전문가들이 가정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이러한 부정적 결과들 가운데 몇 가지를 어느 정도 예언할 수 있고(아마도 그것은 옳다), 따라서 균형을 긍정적 통제의 쪽으로 이동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잘못되게도, 모든 파라미터가 알려져 있는 닫힌 유한한 시스템을 다루고 있음을 전제한다. 실제로 뒤에서 보게 되듯이, 생물학적 및 문화적 체계 안에서 두드러진 요소는 그것이 열려 있으며 결코 닫혀 있지 않다는 점이다. [……] 그것은 또한 사실상 보수주의자에 대한 혁명가의 응답이기도 하며, 보수적 자유에 맞서는 혁명적 자유의 개념이기도 하다(138).”

젠크스가 여기서 정치적 어휘를 사용하는 것은 1968년의 이른바 5월 혁명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1968년의 파리 혹은 캘리포니아의 거리에서야말로 '결코 닫혀 있지 않은' 정치적 가능성이 언뜻 드러났으며, 포스트모던의 건축 언어는 그것을 계승해야 한다(정확히 말하면 그가 '포스트모던'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77년의 저작부터이지만, 문제의식은 공통적이다). 그러나 싱크탱크 주도의 당시 미래학은 그 가능성을 중시하지 않았고, 반대로 다가올 새로운 기술사회(J.K. 갤브레이스가 말한 '새로운 산업국가')를 이끌 관료제를 긍정하고 만다.

정보화를 둘러싼 담론은 미래학적 발상(서사의 재구축)에 근원을 두고 있었으며, 그것은 본래 포스트모던화를 둘러싼 문제의식(서사의 기능부전)과 대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러한 대립이 1970년대 중반에 나타난 포스트모던론에서는 반쯤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되어 왔다고 여겨진다는 점이다.

예컨대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의 조건>은 바로 벨의 저서를 참조하여, '포스트모던'과 '포스트산업화 사회'를 거의 등치하는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다(139). 보드리야르의 <상징교환과 죽음>은 더욱 노골적으로, '시뮬라크르의 세 가지 영역'이라는 실질적으로는 벨이나 갤브레이스와 다르지 않은 역사관(상업 자본주의/산업 자본주의/포스트산업 자본주의의 삼분법)을 채택한 뒤, 1968년을 그 세 번째 시대의 막이 오르는 시점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그에 따르면, 그 새로운 시대를 대표하는 사상가는 맥루한이며, 거기에서는 '정치도 경제도 미디어라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현실 리얼리티(혹은 하이퍼-리얼리티) 속에서 소멸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140).

미래학적 발상과 포스트모던론의 이러한 결부는, 필연적으로, 후자의 문제의식(이야기의 기능부전) 그 자체를 새로운 이야기로 유통시키는 역설적인 사태를 불러일으켰고, 결국에는 '포스트모던'이라는 개념의 수명을 대폭 단축시키게 되었다. 예컨대 그 말은 일본에서는 1970년대 말의 소개와 거의 동시에 비판되었고, 1980년대 중반에는 이미 회피되기 시작하고 있다(141) . 그리고 당시에는 그것이 개념 그 자체가 안고 있는 왜곡에 의한 것이라고 여겨졌다. 그 결과 되풀이된 것이, 포스트(탈, 후)라는 발상 자체가 근대적인 이상, '포스트모던'이라는 표현은 애초에 자기모순이라는 식의 상투적인 비난이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개념 그 자체의 왜곡이라기보다, 오히려 그 개념을 떠받치고 있던 상상력 쪽의 왜곡, 그것도 상당히 정치적 배경에 규정된 왜곡이었던 것처럼 생각된다. 흔히 지적되듯이, 포스트모던 사상(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포스트구조주의라고 불리는 것)은 기본적으로 1960년대까지 파리에서 계승되어 온 좌익적이고 전통적인 지가 1970년대의 미국으로 이식되어, 거기서 커다란 질적 변화를 겪음으로써 형성된 것이다. 데리다나 푸코에게서 그 변화는 사상 위에서 간접적으로 제시되어 있지만, 앞서 언급한 리오타르나 보드리야르에게서는 그것이 더 직접적으로, 파리의 이론을 사용해 미국의 현실을 설명하려는 시도로 나타난다. 일군의 포스트모던론은 바로 그 접촉에서 생겨난 것이며, 실제로 리오타르의 전게서가 원래 퀘벡 주정부의 위탁을 받아 쓰인 보고서였다는 점이나, 보드리야르의 에세이가 미국의 화제를 즐겨 다루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후자는 1986년에 <아메리카>라는 제목의 평론집을 출판했다).

그리고 파리의 이론과 미국의 현실의 이러한 접합은,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5월 혁명을 준비한 사상으로 미국의 소비사회를 설명하는 것, 즉 (위에서 인용한 젠크스의 표현을 빌리면) '혁명적 자유'의 언어로 '보수적 자유'를 추인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 접합은 처음부터, 한편으로는 정치적 래디컬을 자칭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포스트산업 자본주의'의 전개를 긍정하는(그리고 또 긍정할 수밖에 없는) 왜곡을 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거대한 서사'의 기능부전을 호소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서사를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자기모순은 그 왜곡의 당연한 귀결이었던 것이다.

이상의 정리는 사상사적으로는 다소 미묘한 문제, 곧 5월 혁명의 패배와 그 뒤에 나타난 '전향' 사상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문제를 제기하지만, 그 검토는 본론의 과제가 아니다. 여기서는 정보화를 둘러싼 담론으로 이야기를 좁히기로 하자.

다시 말하지만, 그 담론은 본래 미래학적 발상, 즉 이야기의 재구축이라는 욕망에 의해 떠받쳐져 나타난 것이었다. 따라서 미래학과 접합한 포스트모던론 또한 그와 같은 욕망을 계승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정보화는 필연적으로, 무엇보다도 먼저 ‘포스트 공업화 사회’라는 새로운 역사적 단계를 가리키는 지표로서, 예컨대 오토메이션이 가능하게 하는 생산·유통의 변화(벨), 그 새로운 생산관계를 반영하는 교육 시스템의 변화(리오타르), 더 나아가 매스미디어가 연출하는 정치의 허구화(맥루한, 보드리야르) 등의 거시적 문제로 이야기되게 되었다.

그러나 정보화를 둘러싼 사태는 한 번 더 비틀려 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몇 차례나 강조해 왔듯이, 1970년대 미국에서는 다른 한편으로 (서해안에서) 우리가 지금 ‘정보화’라고 부르는 바의 기술적이면서도 인식론적인 변화, 곧 커뮤니케이션의 양태를 더욱 미시적으로, 또한 내부로부터 변화시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컴퓨터의 네트워크화, 멀티미디어화(인터페이스화), 개인화로의 움직임이었으며, 1990년대 중반 이후, 즉 획기적인 브라우저 ‘모자이크’가 등장하고 HTML이 보급됨으로써 네트워크상의 정보가 전체적으로 멀티미디어화되기 시작한 이후에는, 누구나 알다시피, 더 이상 일부 사용자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 전체의 커뮤니케이션을 크게 바꾸기 시작하고 있다.

이 변화는 단순한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인터페이스적인 정보 환경을 눈앞에 둔 새로운 주체의 등장을 수반하는, 더 깊은 인식론적 변화이다. 제5회와 제6회에서 서술했듯이, 그 주체는 보이는 것을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at interface value)와, '보이는 것'의 세계를 이중화하는 특수한 인식(이미지와 상징을 중첩시키고, 세계를 음산한 것들로 가득 채우는 냉소주의)으로 특징지어진다는 것이 필자의 가설이다. 본고는 이 새로운 주체의 구조를 '인터페이스적 주체성'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 인터페이스적 주체성을 낳아낸 문화, 이른바 ‘해커 문화’가 1960년대의 학생운동과 반체제 문화(카운터컬처)에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이며, 앞서 말한 것과 같은 싱크탱크 주도의(즉 동해안의 기득권층 주도의) 정보화사회 구상과는 양립할 수 없는 정치적 경향, 곧 무정부주의적이고 반체제적이며 좌익적인 지향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정치성은 컴퓨터의 짧은 역사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실제로 그것은 필자가 이 책에서 1970년대를 특별히 중시하고 그 이전과 구별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네트워크와 인터페이스의 기술적 기원 자체는 1960년대까지, 아이디어만으로 말하자면 194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예컨대 정보기기를 데이터베이스에 응용할 가능성이 버니버 부시(Vannevar Bush)에 의해 제안된 것은 1945년이었고, 그 제안에 영향을 받은 엥겔바르트가 온라인 집단작업 시스템 'NLS'를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한 것(그 과정에서 윈도 시스템과 마우스가 발명되었다)은 1962년이었으며, 폴 바란이 인터넷의 원리가 되는 분산형 네트워크를 제안한 것도 1962년의 일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들이 모두 군사적 이용과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부시는 애초에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쟁기술 개발의 최고 책임자였고(그렇기 때문에 그는 원자폭탄 개발의 책임자이기도 했다), 엥겔바르트의 연구는 국방부 고등연구계획국(ARPA)의 지원을 받았다. 그리고 바란의 제안은 바로 핵전쟁 이후의 군사 통신을 확보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이처럼 당시의 컴퓨터 연구는 냉전기의 군사 경쟁과 분리될 수 없었는데, 여기서 또 하나 확인해 두고 싶은 것은 그것이 또한 미래학의 이데올로기와도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부시가 제안한 데이터베이스 장치 'MEMEX'는 방대하게 축적되고 전문화되며 복잡해져 가기만 하는 학술 정보를 보다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것은 당시의 미국, 곧 베트남 전쟁이 수렁에 빠지기 이전의, 종전 이후부터 1960년대 전반까지 이어졌던 소비사회에서는, 더 높은 생산성과 더 빠른 유통 사이클을 요구하는 소비자들의 욕망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으며, 또한 필연적으로 미래학적 낙관주의와도 표리일체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은 MEMEX가 전문가들의 주목을 받기보다 오히려 곧바로 로버트 하인라인과 같은 대중 작가에게 수용되었다는 점, 더구나 거기에서 MEMEX가 인류의 지적 진화를 돕고 신인류들에 의한 효율적인 선량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장치로 그려지고 있었다는 점에 여실히 드러나 있다(142) (흔히 지적되듯이(143) , 하인라인은 전후 미국의 대중적 이데올로기를 가장 강하게 반영하고 있던 SF 작가이다) . 또한 엥겔바트의 연구는 더 분명하게, 드러커의 영향을 받으면서 컴퓨터를 조직 관리와 경영학에 응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NLS의 실험에는 산업계의 인물들이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었고, 반대로 그 방침은 1970년대에는 연구자들의 이반까지 불러일으켰다(144) . 더욱이 덧붙이자면, 바란이 재직하고 있던 랜드 코퍼레이션은 당시 미래 예측을 적극적으로 발표하고 있던 대표적인 싱크탱크였으며, 그 이름은 젠크스의 앞서 든 책에도 거론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1970년을 전후한 몇 해 동안 결정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베트남전쟁의 장기화에 따라 국방부의 지원 방침이 재검토되어 직접적인 군사적 응용과는 거리가 먼 컴퓨터 관련 연구비가 축소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최성기를 맞고 있던 학생운동의 영향으로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군사연구를 피하려는 분위기가 급속히 강해졌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많은 연구자들이 대학 기관과 정부계 싱크탱크를 떠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연구자들이 다시 모이게 된 곳이 제록스사의 팰로앨토 연구소였으며, 앨런 케이의 주도 아래 1970년대에 일어난 컴퓨터 개념의 전환(앞서도 강조했듯이, 이것은 “계산”에 대한 사고방식의 근본적 변화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그리고 그 구체화인 GUI의 개발과 퍼스널컴퓨터 연구는 주로 이곳에서 추진되었다.

그리고 국가 주도에서 민간 주도로, 혹은 (상징으로서의) 동해안에서 서해안으로의 이러한 이동은, 필연적으로 연구자들을 둘러싼 문화적 환경 또한 크게 바꾸게 되었다. 스티븐 레비의 <해커들>에 따르면(145), 해커 문화의 기원은 1950년대 동해안의 MIT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에는 우수한 대학원생들의 서클 같은 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이 1960년대의 반체제 문화와 뉴에이지 사상, 학생운동 등을 흡수하면서 하나의 문화운동이라는 형태를 띠기 시작한 것은, 역시 1970년대에 들어서고 나서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이번에는 제4회에서도 언급했던 펠젠스타인이나 테드 넬슨과 같은, 전문 연구자가 아니라 오히려 컴퓨터를 독자적으로 활용하는 활동가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전자가 1973년에 개설한 세계 최초의 전자 게시판 시스템과 후자가 1974년에 출판한 <컴퓨터 리브>, 곧 “해커 윤리의 사실상의 핸드북(146)”은 연구자들뿐 아니라, 오히려 일반 학생들과 시민운동가들, 예술가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1970년대 이후에 발생한 컴퓨터의 이념과 서브컬처의 혼효는 아마추어들의 이러한 대두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그 혼효가 낳은 독특한 기호와 윤리관이 1983년에 공개된 존 배덤 감독의 <워 게임>과 더글러스 트럼블 감독의 <브레인스톰> 같은 영화, 나아가 1984년에 출판된 레비의 앞서 언급한 저서 등에 의해 “해커 문화”로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 아마추어들의 이러한 대두는 기술적으로는, 1970년대 중반부터 저사양이기는 하지만 자작이 가능한 컴퓨터 키트가 발매되기 시작한 상황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그것은 케이의 이념과는 크게 동떨어진 형태였지만 (그의 다이나북은 최고의 스펙을 갖추어야 한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컴퓨터”라는 개념을 연구기관의 메인프레임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개인화를 추진해 갔다. 그 결과 1970년대 후반의 서해안에서는, 한편으로는 팔로알토 연구소의 연구자들이 섬세한 기술 혁신과 세련된 프로그래밍 언어를 통해, 다른 한편으로는 아마추어들이 조잡한 자작 키트와 동호인들 사이의 정보 교환을 통해, 함께 컴퓨터의 개인화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진전시키는 흥미로운 상황이 나타났으며, 그것이 이번에는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와 같은 1980년대의 성공자들을 낳게 된다. 특히 아마추어용 컴퓨터를 자작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거기에 팔로알토 연구소의 인터페이스 시스템을 모방해 탑재한 잡스(애플사)의 이력은, 바로 그러한 1970년대의 이중화된 상황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컴퓨터의 역사에 이 이상 깊이 들어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상의 전개에서 분명해지듯이, 컴퓨터의 인터페이스화와 개인화, 그리고 그것을 반영하는 문화적 논리의 변화는 기본적으로 1970년대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리고 그 배경에 있는 상상력(이데올로기)은 1960년대 이전의 컴퓨터 연구를 떠받쳤던 것과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드러커를 참조하면서 컴퓨터를 “인간 지성의 증폭을 위한 개념적 틀”로 파악하고 있던 엥겔바르트(147)와, 이반 일리치를 애독하며 컴퓨터를 “함께 살아가기 위한 도구들tools for conviviality” 가운데 하나로 생각하고 있던 펠젠스타인(148)은, 애초에 “컴퓨터”의 개념 자체가 다르고, 필연적으로 정보화 사회에 거는 기대 또한 다르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양자는 극단적인 사례이며, 그 중간적 입장도 성립했다. 이를테면 앨런 케이는 매클루언을 애독했고, 메인프레임의 대형 컴퓨터를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에, 퍼스널 컴퓨터를 알두스 마누티우스에 의해 소형화된 서적(그 이전에는 인쇄물도 필사본의 크기로 만들어져 있었다)에 비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149). 그 역시 엥겔바트와 마찬가지로 컴퓨터(인쇄술)를 지적 능력을 증폭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퍼스널화(서적의 소형화)가 필요하다고 본 점에서는 펠젠스타인에 가까웠다. 그러나 어쨌든 1970년 전후를 경계로 컴퓨터와 정보화를 둘러싼 사회적 상상력이 크게 바뀌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고, 실제로 그 변화는 당시 해커 문화의 담당자들에게 강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예컨대 앞서 든 두 편의 영화는 모두 정보기술을 둘러싼 두 문화적 논리의 다툼, 곧 고등학생(<워 게임>)이나 멀티미디어 기술의 민간 연구1원(<브레인스토름>)으로 대표되는 해커 문화와 국가 주도의 컴퓨터 연구 사이의 갈등을 이야기의 바탕에 두고 있다. 특히 <브레인스토름>에 등장하는 연구소는 팔로알토 연구소를 모델로 삼았고, 실제로 몇몇 장면은 그곳에서 촬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1970년대부터 1980년대에 걸친 서해안에서는 앞서 말한 미래학적 상상력과는 또 다른, “컴퓨터”와 “정보화”를 둘러싼 또 하나의 상상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전자의 상상력이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도입에 의해 더욱 효율적이고 생산성이 높아진 소비사회, 정보화에 의해 재생되는 공업화 국가(상징계를 재구축하는 정보화)라는 비전에 의해 구동되고 있었던 데 반해, 후자의 상상력은 오히려 무정부주의적 유토피아, 국가나 관료제와 같은 중앙집중화된 시스템 없이 엮여 나가는 개인화된 커뮤니케이션 기계의 네트워크(상징계를 기능부전에 빠뜨리는 정보화)라는 대조적인 비전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대립은 당시에는 냉전 구조화의 이데올로기 대립과도 결부되어 있었지만, 실제로 그것은 자본주의/공산주의라는 사회체제의 대립과는 무연하다. 소련 역시 미국과 마찬가지로 컴퓨터와 정보기술을 열심히 연구하고 있었고(적어도 1950년대까지는 사이버네틱스의 수준은 소련 쪽이 더 높았다고 한다), 반대로 그러한 국가 주도와는 다른 별도의 정보화(미디어화)가 소련 국가의 붕괴로 이어졌다는 점은 흔히 지적되듯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1970년대의 그 새로운 상상력은 정보화의 힘을 오히려 냉전 구조라는 두 상징계가 마주 비친 시스템(제3회에서 언급했듯이, 딕이라면 이를 “그리망그”와 “검은 그리망그”의 싸움이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즉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거대 국가가 대립하는 조건 자체를 무효화하고 기능부전에 빠뜨릴 가능성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해커 문화는 펠젠슈타인과 같은 신좌익 운동가들에게 지지를 받았던 것이다.

자, 우리가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상과 같은 상상력의 분열에 의해 생겨난, 포스트모던화를 둘러싼 담론과 정보화를 둘러싼 담론 사이의 기묘한 교차 관계이다. 포스트모던의 사상은 한편으로 포스트모던의 도래(상징계의 기능부전)를 논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학적 발상, 상징계의 재구축에 대한 욕망 역시 강하게 품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정보화의 문제(매스미디어와 오토메이션의 전면화)는 주로 후자로부터 계승되어 논의되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 논의와 거의 동시에, 포스트모던의 도래를 기술적으로이자 상상적으로 뒷받침하는(상징계의 기능부전을 가속화한다는 의미에서)또 하나의 ‘정보화’의 움직임, 새로운 컴퓨터의 개념과 그것을 반영한(혹은 떠받친) 해커 문화가 대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미래학적 발상과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다.

그 결과 생겨난 것은,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이 선호하는 정보화의 사례들(텔레비전 광고, 재택근무, 대형 컴퓨터에 의한 인공지능 연구 등)은 실제로는 포스트모던화와 그다지 관계가 없고, 오히려 ‘포스트모던’이라는 말과는 떨어진 곳에서, 그러나 현상으로서는 포스트모던적이라고 불려야 할 정보화의 과정이 따로 진행되고 있었다는, 다소 까다로운 상황이다(그림 9). 즉, ‘포스트모던적’이라고 불려 온 정보화는 실제로는 포스트모던적이지 않았고, 반대로 포스트모던적인 정보화는 그렇게 불리지 않은 채 진행되어 왔던 것이다.

포스트모던론이 안고 있는 이와 같은 왜곡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 1980년대의 해커 문화를 통과해 온 논자들에 의해 점차 비판되기 시작한다. 예컨대 포스터는 1990년의 <정보양식론>에서, 벨의 탈산업사회 이론이 “정보를 언어적 사실이 아니라 경제적 사실로 다룸으로써, [……] 전자적 테크놀로지에 의해 열리게 된, 정보의 산종이라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가능성에 대한 물음을 흐려 버린다”는 점, 또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론이 컴퓨터의 사회적 역할에 관해 “극히 양다리적이어서, 어떤 때에는 컴퓨터를 근대적 메타서사나 사회적 실천의 극치로 그리는가 하면, 또 다른 때에는 컴퓨터화가 포스트모더니즘을 촉진하는 것이라고 한다”는 모호함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함께 지적하고 있다(150). 포스터는 이 두 점을 서로 연결하고 있지는 않지만, 벨의 한계와 리오타르의 모호함은 실제로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계보적으로 연속되어 있다.

또한 조지 랜도는 1992년의 <하이퍼텍스트>에서 디지털 기술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이해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보드리야르는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디지털의 역할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옳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그가 디지털화의 사례로 자주 끌어들이는 매체는, 특히 그가 글을 쓰던 당시에는, 많은 부분을 디지털 기술이 아니라 아날로그 기술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는 사진과 라디오와 텔레비전에 대해서는 언급했지만, 전자 텍스트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 보드리야르는 정보화 사회의 특징으로서 “완전히 사고된 세계나 에피스테메를 추정”하고, “디지털화가 선형성과 이항대립을 멀리하고, 교란하며, 회피할 잠재력 또한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게” 되었다고 그는 논하고 있다(151). 이 두 비판에 공통되는 것은, 리오타르와 보드리야르가 품었던 정보화에 대한 생각이 실제로는 모호하고 또한 왜곡되어 있었다는 지적이다. 그리고 본론이 여기까지 강조해 온 것은, 그 왜곡이 단순한 무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1970년대 중반의 포스트모던론이 강요받았던 정치적 양의성, 곧 1968년 혁명을 계승하면서도 동시에 미국의 소비사회를 긍정한다는 분열에 구조적으로 기인하고 있다.

따라서 필자가 여기서 포스트모던화와 정보화가 표리일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지금까지 널리 이야기되어 온 것과는 다소 다른 관계를 의미한다. 필자는 양자를, 그것들이 함께 근대사회의 한계를 넘어서는 계기를 보여준다는 거시적 이유로 결부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필자는 1970년대 이후의 정보 환경이 불러일으킨 커뮤니케이션의 질적 변화, 곧 “인터페이스적 주체성”의 출현이라는 미시적 현상(주체 수준의 현상)과 상징계의 기능부전이라는 거시적 현상(사회 수준의 현상) 사이에, 어떤 인과적인 관계가 존재한다고까지는 말하지 않더라도, 일종의 상호 호응적인 관계, 푸코라면 아마도 같은 에피스테메에 속한다고 표현했을 법한, 어떤 병행적인 관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의 이론가들, 특히 일본에서 그 소개자들은 이 20년 동안, 포스트모던이라는 것을 실체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 오히려 그것은 근대의 문화적 논리의 한 변종에 지나지 않으며 근대에 의한 근대의 극복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만을 되풀이해 왔다. 그러나 실은 그러한 마비적인 담론이야말로 미래학의, 더 일반화해서 말하면 호황기의 소비사회의 욕망에 기초하고 있다.

필자의 문제의식은 그것에 비하면 훨씬 더 단순하다. 1970년을 하나의 중심으로 하여 에피스테메의 큰 변동이 일어나고, 인터페이스가 출현했으며, 상징계가 기능부전에 빠졌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에피스테메의 성질은 무엇인가. 그것이 생각해야 할 문제다.

필자는 앞선 회차들까지 그 성질에 관해, 딕의 SF 소설과 지젝의 정신분석, 데리다의 에크리튀르론과 케이의 구상 등을 참조하면서, 몇 가지 각도에서 단속적으로 검토해 왔다. 결론을 내리기에는 본론에서의 작업이 너무나 부분적일 뿐 아니라, 애초에 그러한 문화현상들 사이에는 상호 영향 관계가 거의 없으므로, 결론은 아무래도 직관적인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이러한 유보를 전제로 하면서도 굳이 작업 가설을 세운다면, 필자는 거기에서 공통적으로 시각적 은유의 기능부전과, 그에 상응하여 생겨난 기호의 변용, '섬뜩한 것'의 증식이라는 사태를 보고자 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상징)의 세계가 약화되고, 그것을 보충하며 등장한, 이미지도 상징도 아닌 새로운 기호, '에크리튀르'가 전면화되는 사태이다. 또한 그것은 <존재론적, 우편적>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징계의 우편화(오배달의 증가)에 수반되는 암호적 세계의 대두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만일 근대가 카메라와 스크린의, 혹은 상징계와 언어의 시대였다면, 포스트모던은 우편과 암호의 시대인지도 모른다.

(137) 본문에서는 다루지 못했지만, 피터 러셀의 신비사상 역시 미래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거기에서는 통계학과 생물학이 빈번하게 원용되고 있다. 이를테면 그에 따르면, 공업의 시대에서 정보의 시대로, 더 나아가 '의식의 시대'로 이어지는 역사적 추이는 통계적으로 확증되는 듯하다. “1978년 갤럽 여론조사는 미국에서 [의식 개발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의 수가 약 200만 명에 이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경우 4년이라는 배가 시간이 계속되는 한, 앞으로 20년 이내에 미국 총인구의 절반이 의식 개발에 열중하게 될 것이다. [……] 다음 세기 초 무렵에는 '의식 처리'의 고용 곡선이 정보처리의 그것을 능가하는 지점에 도달할 것이다. 그때 인간 의식의 진화는 인류 활동의 가장 지배적인 분야가 될 것이며, 우리는 '정보의 시대'에서 '의식의 시대'로의 전환을 이루게 될 것이다”(<글로벌 브레인>, 공작사, 1985년, 268쪽─269쪽).

(138) 찰스 젠크스, <건축2000>, 가시마연구소출판회, 1974년, 25쪽.

(139) <포스트모던의 조건>, 13쪽.

(140) <상징교환과 죽음>, 155쪽.

(141) 예컨대, 할 포스터가 편집한 <반미학>의 일본어판(게이소쇼보, 1987년)에 실린 역자들의 후기를 참조하라.

(142) 1948년에 발표된 중편 '심연'. 일본어 번역본은 <잃어버린 유산>(하야카와 쇼보[하야카와 문고 SF], 1982년)에 수록되어 있다. 부시의 논문에서 힌트를 얻은 '사서 기계 라이브러리언 머신'이 등장하는 것은 115쪽이다. 일본어 번역본에서는 생략되어 있지만, 이 소설에는 원래 부시를 참조하는 주가 붙어 있었다. 앨런 케이는 이 소설을 통해 MEMEX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하마노 야스키, '평전 앨런 케이', <앨런 케이>, 아스키 출판, 1992년, 173쪽-174쪽, 참조.

(143) 예를 들어, 에릭 라브킨, 로버트 스코울즈, <SF──그 역사와 비전>, TBS 브리태니커, 1980년, 109쪽 이하.

(144) <사고를 위한 도구>, 280쪽 참조. 엔겔바트는 현재 정보기술을 사용해 "조직, 팀, 개인의 능력을 극적으로 자기변혁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Bootstrap Institute라는 비영리단체를 운영하고 있다(URL=http://www.bootstrap.org/).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그 일본 지부가 개설되었을 때의 인터뷰에서 그가 GUI와 WYSIWYG가 컴퓨터의 역사를 지연시켰다고 발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본론에서 서술한 바와 같은 컴퓨터 문화의 단절이, 거기에는 단적으로 드러나 있다.

(145) 스티븐 레비, <해커스>, 공학사, 1987년.

(146) <해커즈>, 227쪽.

(147) 이것은 엔겔바르트가 1963년에 발표한 논문의 제목이다.

(148) <해커스>, 236~237쪽 참조.

(149) <앨런 케이>, 170쪽─172쪽 참조.

(150) 마크 포스터, <정보양식론>, 이와나미서점, 1991년, 51쪽, 282쪽.

(151) 조지 랜도, <하이퍼텍스트>, 저스트시스템, 1996년, 40쪽-42쪽. 번역문 일부 개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