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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 이광수의 장편소설에선 대부분 '정'이 중요하게 다뤄지는데, 그것의 대부분은 둘의 관계에서 일어난 감정으로 그치지 않고 거대한 차원의 정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무정>의 형식과 선형이 전근대적 가치관에서 벗어나 수해 구호 작업 장면에서 재결합하는 것과, <흙>의 허숭과 정선이 한번 갈라졌다 종국에는 농촌 계몽 운동에 함께 투신하게 되는 것이 그 예시라 할 수 있다. 전자의 예시는 개인의 계몽이 사회적 연대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후자의 예시는 농촌의 생활 개선과 문맹 퇴치를 위해 힘쓰자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러나 이 메시지가 소설 안에서 매끄럽게 전달되지 못하는 점이 이광수 소설의 평가를 주로 떨어트리는 요인이다.

한편 춘원은 자신의 최고작으로 <무정>이나 <흙>이 아닌 <유정>을 꼽는데, <흙> 집필 이후 쓰여진 이 작품은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지 않고 사랑 이야기만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춘원의 역사소설 외 이전 작품과 조금 다른 성격을 띄고 있다. 


이 소설은 화자 N이 친구 최석이 보내온 편지를 놓고 과거를 회상하는 액자식 구성으로 진행된다. 주인공 최석은 독립운동을 하다 죽은 친구의 딸 남정임을 맡아서 기른다. 예쁘고 똑똑한 정임을 아내와 친딸 순임이 질투했기 때문에 최석은 정임을 일본으로 유학 보낸다. 이후 정임이 폐병에 걸렸다는 전보를 받고 일본으로 가서 그녀를 보살펴준다. 


조선으로 돌아온 최석은 정임의 일기장을 읽은 아내에게 비난당한다. 그 일기장에는 최석에 대한 정임의 사랑과 그것으로 인한 고뇌가 적혀 있었다. 아내가 일기장의 내용을 소문냈기 때문에 최석과 정임의 스캔들은 학교까지 퍼져 최석은 교단을 스스로 내려와 유언장을 쓰고 조선을 떠난다. 최석은 떠나기 전 일본에 들러 정임을 만나는데, 이때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나 감정을 억누르고 떠난다. 


그 뒤 최석은 바이칼호 근처에서 친구 R과 그의 아내의 이야기를 듣는다. 사제관계였던 둘이 둘의 관계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시베리아 바이칼호로 사랑의 도피를 떠났고, 그곳에 같이 묻히려다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함께 살기를 결심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최석은 이것이 옳지 않은 행동이라 생각한다. 최석은 끊임없이 고뇌한다. 부녀로서, 사제로서 정임에 대한 정을 억눌러야 하지만 도무지 참을 수 없어 괴로워한다. 


편지는 이를 억누르기 위해 최석이 깊은 숲 속으로 은거하겠다는 내용으로 끝난다. 화자 N은 이것을 그의 아내와 딸 순임에게 보여주고 둘은 최석에 대한 오해를 푼다. 이후 순임은 결핵을 앓는 정임과 함께 아버지를 찾으러 떠난다. 정임은 병 때문에 잠시 최석이 머물렀던 여관에 누워있고 화자와 순임은 외딴 집의 병석에 누워있는 최석을 만난다. 그는 N에게 자신의 일기를 전부 태워 달라 부탁한다. 일기에는 정임의 일기장처럼 정임에 대한 최석의 사랑과 그것으로 인한 고뇌가 적혀 있었다. 최석의 병이 조금 나아지자 화자는 정임을 데리고 최석에게 가지만 최석은 이미 죽어 있었다. 화자는 이후 정임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둘을 나란히 묻어 주겠다 생각하며 소설이 끝난다.


이광수의 소설에는 금지된 사랑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무정>과 <흙>에 등장하는 남녀 간의 불륜 관계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유정>의 관계는 결코 연인 관계로 발전하지 않는다. 최석과 정임은 서로에게 정을 가지고 있다. 그 정은 연정·애정·인정 등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다. 둘은 서로 정이 든 사이지만 그들 자신도 둘 사이가 연인 관계으로 나아갈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정임은 딸로써, 최석은 아버지로써 정을 억눌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사랑은 피를 수혈해 주거나 병든 몸을 이끌고 만나려 가려는 행동 등 육체적이기보다는 정신적인 사랑으로 표현된다. <좁은 문>의 알11리사가 제롬에게 보여준 자기희생의 사랑과 비슷하다.


이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사랑인가. 사랑이란 것이 이런 것인가. 내가, 이렇게 어린 딸 같은 계집애가, 설마 아버지 같은 그 어른을 사랑함이야 될까. 이것이 사모한다는 것인가. 딸이 아버지를 사모하듯이 사모한다는 것인가. 사모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 47


그 숨긴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열정이요, 정의 불길이요, 정의 광풍이요, 정의 물결이오. 만일 내 의식의 세계를 평화로운 풀 있고, 꽃 있고, 나무 있는 벌판이라고 하면 거기 난데없는 미친 짐승들이 불을 뿜고 소리를 지르고 싸우고, 영각을 하고 날쳐서, 이  동산의 평화와 화초를 다 짓밟아 버리고 마는, 그러한 모양과 같소. -97




최석이 최후를 맞이하는 장소 시베리아, 그 중에서도 바이칼 호는 기억에 남는 장소다. 이광수는 <흙>에서 피상적으로 농촌의 모습을 그린 것과 다르게 이 작품에서는 시베리아의 광활함을 성공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광수 소설의 정은 <무정>에서 <유정>을 거쳐 정신적인 단계까지 변화하며 그것은 추후 <사랑>에서 불교적 사랑까지 변화하게 된다. <유정>은 적당히 뜨거운 수준의 온도로 두 남녀 간의 사랑을 잘 그려내는 소설이다. 이광수는 못 읽어줄 작가는 결코 아니다. 비교대상이 소세키 루쉰이라 그렇지 썩 괜찮은 작품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