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메타픽션의 함정

아키야마 슌은 어떤 유형의 범죄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은 그저 사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생존 의미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내가 흥미를 품는 약간의 특징 있는 범죄란, 그런 인간의 형태가 선명하고 붉은 한 가닥의 실처럼 범행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ー우리는 단순히 죽는 것보다 이 의미를 빼앗길 때 한층 더 깊이 죽을 것이다. 그러니 무언가의 손이 이 의미를 빼앗으려 한다고 보일 때, 우리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힘을 다해 싸울 것이다."
(「권희로의 범죄」).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이루어진 수많은 범죄 사건을 둘러싼 아키야마의 사색은 나에게 언제나 촉발적인 것이었다. 아키야마 슌은 생존 그 자체가 아니라, 생존의 의미를 둘러싼 필사적인 '투쟁'으로서 범죄를 고찰했는데, 우선 그가 말하는 바를 조금 들어보기로 하자.


고마쓰가와 고등학교 사건의 "소년은 지능 테스트 결과에서 발군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하지만, 그가 자력을 의식하고 힘의 감정에 굶주려 있을 때, 도처에서 가정이라든가 자격지심이라든가,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벽이나 문 같은 것을 보았던 것이다. 세상이 불공평한 것인지 자신이 망가진 존재인 것인지, 이유가 어느 쪽에 있든 자신의 살인이라는 행위는 그에 상응하는, 복수라기보다는 오히려 걸맞은 행동이 아니겠는가, 하고". 그는 "자신이, 자신의 존재가 세상의 흐름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불만인 것이다. 우주의 합창에서 벗어나 자기 혼자만 따돌림당하고 있다, 그 점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감정은 종종 극단적인 정의의 가면 아래, 극단적으로 일그러진 끔찍한 행동을 취하기 쉽다"
(「고마쓰가와 여고생 살인과 이폴리트」).


그리고 텔아비브 공항 사건의 일본 청년은 "이렇게 묻는 것이다――나 자신에게 있어 세계 중심의 한 점, 역사 중심의 한 점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고. 자신의 고유함이라는 통각 위에서 떨고 있는 세계의 한 점,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하고. 번영의 사회가 우리에게서 빼앗고 있는 것은 이 삶의 통각일 것이라 생각한다. 찾아낼 수 있는 것은 오직 번영의 평균적인 모델로서의 삶의 형태뿐이고, 자신에게 고유한, 세계의 한 점, 역사의 한 점이라는 것은 찾아볼 수 없다. ………………나는 상상한다. 그들이 아랍 게릴라에 참가한 것은 이런 메마른 마음이 낳은, 자신을 던져 세계의 중심에 참가시키는, 역사의 중심에 참가시키는, 비상수단과도 같은 행위였을 것이라고. 그 세계동시혁명이라는 것은 세계의 한 점, 역사의 한 점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기 위한 주문인 것이다"
(「메마른 마음이 말하는 것」)


더욱이 연합적군 린치 사건의 당사자는 "가공의 행위를 위한 가공의 장소, 그들은 거기에 있었다. 그들은 거기서 이 가공의 행위를 현실화하기 위해, 스스로를 무서운 인간으로 개변시켜야만 한다. 자신과 타인의 죽음을 포함한 총격전의 환영을 견뎌내야만 한다. 그런 것을 요구받는 것은 반드시 이 가공의 장소에서도 유일한 현실인 것, 그리고 어떤 가공의 행위도 의심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최종적인 인간적 의미를 가진 것, 말하자면 인간의 죽음이다. 사람을 죽일 때는 그 사람 자신이 무서운 인간이 된다. 그렇기에 이 린치라는 드라마와 총격전 훈련이라는 가공의 행위는 단 하나의 연속으로서 그곳에 있다"
(「가공의 행위와 죽음」) 등등.


아키야마 범죄론의 출발점에는 언제나 '우주의 합창에서 벗어나 자기 혼자만 따돌림당하고 있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이른바 '망가진' 정신이 놓여 있다. '자신이, 자신의 존재가 세상의 흐름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불만'이며, 그것을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느끼는 정신. 그것은 또한 번영 속에서 희박해져 가는 생존의 의미, '자기 자신의 고유함이라는 통각'에 대한 갈망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한 갈망은 '자신에게 고유한, 세계의 한 점, 역사의 한 점이라는 것'을 끌어당기고자 '비상수단과도 같은 행위'의 저편을 향해 질주한다. 하지만 그것은 가공의 행위일 뿐이다.


같은 갈망이 직설적으로 죽음을 둘러싸고 주제화되는 일도 있다. 앞장에서도 언급했듯이, 단숨에 세계의 중심점을 움켜쥐려는 관념적 욕망은 살인, 즉 타인의 죽음의 '실현'과 그것을 권리지우는 자신의 죽음의 '소유'를 요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죽음은 그 어떤 가공의 장소라 할지라도 '단 하나의 최종적인 인간적 의미를 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고마쓰가와 고등학교 사건에 대해, 1959년에 쓰인 글에서 아키야마는 "반복해서 말하지만, 여고생 살인이라는 사건은 시대에 대해 징후적인 것이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전쟁이나 혁명이라는 일종의 동요하는 관념과 장난치면서, 자신은 안일함에 목까지 잠겨 있는 상태. 반대로 말하자면, 겉보기에는 안정이 있지만 그 밑바닥에서는 모든 것이 동요하며 뿌리째 뽑혀 있는 상태. 그런 상태가 내용을 이루는 시대"가 우리들의 시대로 계속되는 한, "제2, 제3의 여고생 살인이 머지않아 반드시 나타나게 될 것이다"라고.


1960년대의 일본 사회는 아키야마가 말하는 '그런 상태가 내용을 이루는 시대'를 더욱 심화시켰을 것이다. 나가야마 노리오 사건, 권희로 사건. 혹은 연합적군 사건, 텔아비브 공항 사건. 소년 라이플 마적 사건이나 오사카 미쓰비시 은행 점거 사건 등도 같은 유형의 범죄로 기억되고 있다. 아키야마의, 제2, 제3의 고마쓰가와 고등학교 사건은 불가피하다는 불길한 예언은 확실히 적중했던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고마쓰가와 고등학교 사건으로 상징되었던, 현실적인 세계 상실의 관념적인 자기 회복 행위로 정의되는 유형의 범죄 사건은 시대의 뒷전으로 물러나기 시작한다. 그것은 또한 사회를 뒤흔드는 부류의 범죄 사건 상당수가 가정을 무대로 아이들에 의해 실행되는 시대의 시작이기도 했다. 가령 1977년 가이세이 고등학생 사건, 1979년 조모 존속살해 고등학생의 자1살 사건, 그리고 1980년 금속 배트 살인 사건 등.


할머니를 살해하고 자1살한 고등학생은 유서로 대학 노트 40쪽 분량의 글을 남겼다. 노트에는 "아버지에게 살해당한 가이세이 고등학생에 대해 저능한 대중이 엘리트에 대한 증오 끝에 벌인 엘리트 비판에 대한 엘리트의 보복 공격"이라는 대목이 있으며, 그런 점에서는 이 사건이 간신히 아키야마 범죄론의 사정거리 내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엘리트'와 '저속한 대중'을 예각적으로 대립시키는 소년의 발상과 그에 따른 자기 정당화의 논리 배후에는 "우주의 합창에서 벗어나 자기 혼자만 따돌림당하고 있다, 그 점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감정은 종종 극단적인 정의의 가면 아래, 극단적으로 일그러진 끔찍한 행동을 취하기 쉽다"라는 아키야마풍의 분석에 부합하는 것이 그나마 남아 있는 듯하다.


하지만 고마쓰가와 고등학교 사건의 소년과 조모 살해 소년 사이에는 이미 무시할 수 없는 거리가 생겨났다. 전자는 어딘가 비극적인 양상마저 있는 듯한데, 후자는 당사자가 몰두하면 할수록 엄숙한 분위기에서 멀어져 무언가 그로테스크한 소극 같은 낌새마저 풍기고 마는 것이다.


고등학생의 조모 존속살해/자1살 사건에는 이미 아키야마 범죄론의 논리로는 완전히 해독할 수 없는 종류의 과잉성이 잉태되어 있었으며, 그것은 이듬해 금속 배트 살인 사건에서 표면화된다. 사건 당시 이진우는 18세였고, 조모 살해 소년은 16세였다. 나이에 두 살의 차이는 있다고 해도, 또 그 또래의 두 살 차이가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해도, 그렇다 치더라도 양자의 정신적 연령의 차이는 너무 과대하다. 이진우에게는 자신의 범죄나 자기현시욕을 대상화하는 냉철한 시선이 있지만, 조모 살해 소년의 '엘리트' 지향은 오로지 히스테리적인 자기 반복에 빠져 있는 듯하다. 그것은 두 사람의 나이 차이라기보다, 아마도 시대적 환경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조모 살해 소년의 행위 배후에는 아키야마 슌의 것을 포함하여, 기성의 범죄론의 틀에는 수용하기 힘든 기이한 과잉성이 있었다. 소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행위의 의미를 필사적으로 말로 표현하려고 애썼을 것이다. 그렇게 끊임없이 자아내는 말은 그러나 어딘가에서 읽은 기억이 있는 겉핥기식의 타인의 말에 불과하다. '엘리트'를 둘러싼 강박적 반복과 같은 말의 나열은 유치하다기보다, 자신의 말에 리얼리티를 느낄 수 없는 뿌리 깊은 공허감에 의해 필연화된 것은 아닐까. 이듬해 금속 배트 살인 사건의 재수생은 이제 기성의 언어로 자신의 행위의 의미를 말하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관객은 범인 자신의 주석 없이 뭔가 광기 서린 것으로 느껴지는 판타스틱한 사건 앞에 내동댕이쳐진 것이다.


금속 배트 살인 사건의 충격으로 막을 연 1980년대에는 거의 생존의 욕망으로는 환원할 수 없는, 하지만 아키야마 슌이 사유했던 것 같은 생존의 의미에 얽힌 갈망으로도 해석할 수 없는 종류의, 윤곽이 불선명한 범죄 사건이 무수히 일어났다. 가령 어른 측에는 모리나가·글리코 사건이나 로스 의혹 사건 등이, 아이 측에는 요코하마 부랑자 습격 사건이나 나카노 후지미 중학교 사건 등 이지메를 둘러싼 다수의 살인·상해·자1살 사건이 있었으며, 그리고 1980년대의 폐막과 90년대의 개막을 동시에 상징적으로 알1리는 사건으로서 미야자키 사건이 있었다.


1980년대 일본에서는 주로 프랑스 포스트모던 사상의 영향 아래, 아사다 아키라의 도주론을 필두로 이야기 비판과 제도 비판, 관념 비판이 성대하게 유행했다. 그것들에는 유행하는 담론에 따르기 마련인 피상적인 부분도 많았고, 또한 무구조적인 구조인 일본의 이데올로기 제도에 대해 데리다식의 해체 전략이 과연 유효한가 하는 본질적인 의의가 제기되기도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들에 시대적인 의미가 완벽하게 결여되어 있었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1970년대의 일본은 상징적으로는 연합적군 사건이라는 '문제'에 주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풍요로운 사회에 유래하는 "메마른 마음이 낳은, 자신을 던져 세계의 중심에 참가시키는, 역사의 중심에 참가시키는, 비상수단과도 같은 행위"와, 그 필연적인 귀결일 수밖에 없는 부패한 테러리즘의 자타억압적이고 무시무시한 황폐함. 그것은 전후 마르크스주의의 정열을 구동한 세계의, 역사의 '중심'에 대한 욕망, '의미'에 대한 갈망, 혹은 '본래성'이나 '전체성'에 대한 강박관념이 가져온 도착이었다.


서구라는 세계의 '중심'이나 근대라는 역사의 '중심'을 가치 척도로 삼은 전후 민주주의의 사회사상도, 그리고 사소설을 비판하고 전체 소설을 표방한 전후 문학도 기본적으로는 전후 마르크스주의와 동형의 논리를 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전후적 사유는 스스로 낳은 '괴물'에게서 눈을 돌리고, 자기 보신에 쫓겨 오로지 무난하게 넘기기에만 전념했던 것이다. 일본의 포스트모던 사상은 그러한 전후 사상의 황폐함과 공동화를 메우는 것으로서 시대적으로 요청받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라타니 고진의 『은유로서의 건축』이나 하스미 시게히코의 『이야기 비판 서설』 등으로 대표되는 80년대 일본의 탈중심적인 사유나 '유희', '도주', '스키조' 등등 공허한 슬로건의 난무는, 과연 "메마른 마음이 낳은, 자신을 던져 세계의 중심에 참가시키는, 역사의 중심에 참가시키는, 비상수단과도 같은 행위" 쪽으로 끌어당겨질 수밖에 없는 끔찍한 관념적 욕망을 그 근거에 걸쳐 해체할 수 있었을까.


나에게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았다. 거기에 공허가 있는 한, 마치 진공이 대기를 빨아들이듯 의미나 관념이나 이야기는 허공 저편에서 도래하여 불가피하게 그것을 충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허는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 존재의 정의 그 자체이다.


그러한 확신을 뒤흔든 것은 수많은 탈중심적인 사유나 거기에 수반된 여러가지 사상적 풍속이 아니라, 오히려 한 건의 범죄 사건이었다. 아사다 아키라가 "최근 아이들의 표현력에는 놀라운 데가 있다. 자기 자신을 포함한 온갖 것들을 거침없이 패러디화해 버리는 경쾌함. 파라노이아적인 물음을 멋지게 얼버무리고, 종합으로부터 계속 도주하는 풋워크의 가벼움"(『도주론』)이라 하는 식으로 태평하게 '스키조 컬처의 도래'를 예찬하고 있었을 때, 나는 그것을 의구심을 품고 듣고 있었다. 하지만 스키조 컬처 세대의 틀림없는 대표 인물로서, 그 종잡을 수 없는 표정으로 미야자키 사건의 주인공이 텔레비전 화면에 등장했을 때, 마침내 도망칠 곳 없는 기괴한 충격에 휩싸이고 만 것이다.


일본 적군의 텔아비브 공항 사건을 언급하며, 아키야마 슌은 "우리 중 어떤 유형의 청년이 자신을 과격한 행동에 내맡기게 되는 그 원동력에는, 반드시 이 세 가지――삶의 직접성과, 끝까지 가고자 하는 의지와, 절대적인 것을 묻는 것, 이 세 가지에 대한 지독한 갈증이 있다"고 지적했었다. '그 세 가지'에 대한 갈망이 반드시 일본 적군 멤버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님은 자명할 것이다.


이진우를 비롯한 아키야마 범죄론의 영웅 전원이 예외 없이 '삶의 직접성과, 끝까지 가고자 하는 의지와, 절대적인 것을 묻는 것'에 홀려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미야자키 사건의 주인공의 표정에서는 어째서인지 '그 세 가지'에 대한 불온한 정열을 감지할 수가 없었다. 사건과 범인상의 디테일이 밝혀짐에 따라, 그러한 확신은 더욱 깊어졌던 것이다. 나는 그 사건에 대해 진지하게 사유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일찍이 아키야마 슌이 이진우나 권희로나 나가야마 노리오의 범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자신의 비평적 과제로 선택했던 것처럼.


그러나 미야자키 사건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몹시 곤란한 과제라고 느껴진다. 아키야마 슌의 배후에는 까뮈나 도스토옙스키가 있다. 혹은 사르트르나 하이데거마저도. 『외치는 소리』에서 고마쓰가와 고등학교 사건을 다룬 오에 겐자부로의 경우에는, 주인공 구리 타카오에게 "나는 나 자신이 이 현실 세계에 거부당하고 있는 사생아라고 느끼면서, 게다가 이 세계에 어떻게든 기어들어가 적출자의 안도감을 맛보려고 악전고투해 왔다"고, 『악마와 선한 신』에 등장하는 괴츠의 복사판 같은 말을 하게 한 점에서도 알 수 있듯 사르트르의 영향은 역력하다.


아키야마 범죄론의 시대적 실효가 만약 사실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20세기의 인간학적 고찰의 상당 부분을 포기하고서 그 사건에 대해 사유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 사건은 반대로, 현실적 상실의 관념적 회복 행위로서 문학이나 정치, 그리고 특권적인 범죄 행위를 해독할 수 있었던 20세기라는 시대에서 일탈한 결과, 도스토옙스키에서 하이데거에 이르는 20세기적인 사색의 사정권 밖으로 아득히 빠져나가 있는 것은 아닐까. 다가올 세기를 암시하는 듯한 범죄로서, 그 사건은 우리들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식으로 예감한 우리 앞에는 적지 않은 수의, 미야자키 사건을 위해 쓰인 서적이 있다. 나카지마 아즈사의 『커뮤니케이션 부전 증후군』은 미야자키 사건 그 자체를 중심적으로 다룬 책은 아니지만, 그것을 포함하여 스키조 컬처 세대의 정신 병리에 대해 자세히 검토하고 있다. 심리학자나 사회학자가 쓴 비슷한 책들은 산더미처럼 많고 진절머리가 나는 종류의 것들이 대부분인데, 이 책의 묘미는 말하자면 환자의 자기 분석, 자기 진단의 책으로서 쓰여 있다는 점에 있다.


"내가 이 책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무엇보다도, 사실 나 자신이…… 잠정적으로 '커뮤니케이션 부전 증후군'이라고 이름 붙여 본 여러 징후의, 말하자면 대표자 같은 존재이며, 사실 이 안에 내가 앞으로 여러모로 적고 분석하거나 고찰해 보려고 생각하는 다양한 증상들은 거의 모두 내 자신을 응시하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저자가 처음에 미리 양해를 구한 그대로다. "그가 오타쿠 소년이기 때문에 유녀를 죽인 것이라고 세상이 비난한다면, 그와 나의 감수성 사이에 차이가 있는지 스스로는 전혀 알 수 없는 나는, 그를 옹호하겠다"라는 입장으로 『M의 시대』나 『아이들 유랑담』 등에서 미야자키 사건을 검토하고 있는 오쓰카 에이지의 방법과, 자기 분석이나 자기 진단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닮은 구석도 있다.


이 책의 주제적인 검토 대상은 오타쿠, 사춘기 거식증, 그리고 소녀 소설에서의 미소년 애호 테마이다. 미야자키 사건으로 유행어가 된 감이 있는 '오타쿠'인데, 자신이 오타쿠의 선구자였다고 자인하는 나카지마 아즈사는 그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오타쿠족은 요컨대 '자신의 장소'를 현실의 물질세계에서 찾아내지 못해 소외당할 뻔한 개체가, 형이상학적 세계 속에 자신의 영토를 만들어냄으로써 현실 세계의 적응 속에 머물게 된 것이다." 문장의 전반부는 아키야마 슌 범죄론의 출발점과 기본적으로는 다르지 않다. 이진우나 나가야마 노리오 또한 "'자신의 장소'를 현실의 물질세계에서 찾아내지 못해 소외당할 뻔한 개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인간이 "형이상학적 세계 속에 자신의 영토를 만들어냄으로써 현실 세계의 적응 속에 머문"다면, 그는 오타쿠가 되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가령 아Q 또한 "형이상학적 세계 속에 자신의 영토를 만들어냄으로써 현실 세계"에 '적응'하려고 애쓴 것이 아닐까. 인간 존재의 공허나 결손이 다양한 관념과 이야기를 허공 저편에서 부르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공허는 유사적으로 충전되고, 그 다수자는 현실 세계에 적응하는 데 성공한다. 한정된 소수자가 관념과 이야기의 독에 과잉 반응하여 자신을 범죄자로 둔갑시켜 버린다고 할지라도. 그것과 오타쿠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



당장 지적되는 것은 오타쿠의 자기방어막이 되는 '형이상학적 세계'가 '만화, 애니메이션, TV 게임, PC, 어드벤처 게임' 등, 종종 고도 테크놀로지의 성과에 의존한 허구 세계이며, 게다가 그들은 그것을 자기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일 것이다. "컴퓨터든 만화든, 본래는 누군가 다른 인간이 만들어낸 픽션적 기구지만, 그것은 그 사용자, 아니 소유자의 감성에 따라 다양한 각도에서 말하자면 '사물화(私物化)'할 수 있다." 설령 이진우나 조모 살해 소년이 『죄와 벌』의 비범인 이론에 영향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들이 자아내고 그들을 범행으로까지 이끈바 존재의 공허를 충전하기 위한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자가제작(自家製)이다. 하지만 오타쿠는 "자신의 감성에 맞는 바람직한 허구 공간을 찾아내면, 그것을 먼저 동료들과 공동화하고, 그런 다음 패러디를 통해 사물화를 개시한다".


이상과 같은 파악은 또 하나의 흥미로운 결론을 이끌어낼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낳을 수 없는 사적 환상, 사물화가 가능한 허구 공간을 찾아서는 거기에 '들러붙는' 형태로밖에 공동 환상을 만들어낼 수 없다"고 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스키조가 되기에는, 슬프게도 본인의 창조성이 치명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카지마 아즈사는 한층 더 말한다. "오타쿠에게는 스스로 사회가 받아들이지 않는 사적 환상 즉 광기든, 혹은 기본적으로는 그것과 다름없지만 어떤 수준에 달해 있어서 사회에 받아들여지는 사적 환상, 즉 픽션 작품이 된 창작이든, 그 어느 쪽도 낳을 힘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관념력(전자라면 망상력, 후자라면 창작력)이 희박한 타입의 인종 중에서도, 유달리 취약한 인물의 대표적인 예로 미야자키 사건의 주인공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고 저자는 분석하고 있다. "그는 애니메이터가 되고 싶다는 희망을 가졌던 것 같지만, 그것을 위해 동료를 찾거나 방책을 구하거나, 실제로 코미케에서 '간판'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현실에 대한 적응력조차 결여되어 있었다."


스스로 자기 결손을 충전할 관념이나 이야기를 산출해 내지 못하는 유형의 청소년이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다. 그처럼 관념력이 약소한 타입 중에서도, 더욱 희박하고도 취약한 인물의 극한치로서 미야자키 사건의 주인공이 시대적으로 석출되었다. 이상과 같은 나카지마 아즈사의 분석에 다소나마 타당성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종래의 관념론이나 범죄론을 전도해야만 할 것이다. 현실적인 '나약함'이 역설적으로 관념적인 '강인함'을 요청하고, 그것을 필연화한다. 『백치』의 이폴리트에서 이진우까지, 혹은 적군파의 '병사'까지 그러한 현실과 관념의 도착적인 드라마는 언제나 일관되게 상연되어 왔다.


하지만 우리 시대는 현실적인 '나약함'을 관념적인 '나약함'이 보완하고 있는 것 같은 기괴한 캐릭터를 대량 생산하고 있다고 저자는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아키야마 범죄론의 세계에는 절대 존재할 수 없는 종류의 캐릭터이다.


왜 1980년대에 그러한 역전 현상이 생길 수 있었는지에 대한 저자의 분석은 그리 설득력이 있지는 않다. 요컨대 생물학 환원론의 범위 안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 치더라도 이 책은 지속적인 사유를 요하는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결여를 과잉된 관념으로 메우는 것이 아니라, 결여를 또 다른 결여, 또 다른 공허로 메우는 것 같은 존재. 그조차 불가능할 때 필연화되는, 기이할 정도로 희박하고 기이할 정도로 현실감이 결여된, 다가올 시대를 상징하는 듯한 성범죄. 공허를 공허로 메우고, 공허의 공허를 더욱 공허로 메우려 했던 미야자키 사건의 주인공.


"바로 그 장소에서, 문학의 등장이 요구되는 것이다"라고 한 아키야마 슌의 말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는 기분이 든다. 오에 겐자부로의 『외치는 소리』에 대응할 법한, 미야자키 사건에 촉발되어 쓰인 소설 작품은 가능한 것일까. 다행히도, 그와 관련해 읽어볼 가치가 있는 작품을 찾아낼 수 있었다. 다케모토 겐지의 『우로보로스의 위서』이다.


이 책은 1988년 4월부터 90년 6월까지 잡지에 연재된 작품이다. 즉 최초의 유아 유괴 사건부터 용의자 체포에 이르는 기간과 『우로보로스의 위서』 집필 기간은 거의 조응하고 있다. 또한 작품의 중심에 사이타마현에서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여성 폭행 살인 사건이 설정되어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도, 작가가 어떤 의미로든 미야자키 사건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집필했을 것이라고 상정해도 그다지 무리는 없을 것이다.


다케모토 겐지는 구리모토 가오루(나카지마 아즈사)와 마찬가지로 미스터리 잡지 『환영성』 출신의 작가이며, 처녀작 『상자 속의 실락』은 유메노 규사쿠의 『도구라 마구라』나 나카이 히데오의 『허무에의 제물』 계보에 위치하는 안티 미스터리의 걸작으로 평가받았다.


신작 『우로보로스의 위서』는, 그러나 미스터리 작품이 아니다. 그렇다고 평범한 리얼리즘 소설도 아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유사 추리 소설'이며, 작중에는 다음과 같은 '독자에게 보내는 충고장'이 삽입되어 있다. "자, 여기서 작가는 삼가 독자에게 충고하는 바이다. 이 작품은 유사 추리 소설이다. 따라서 독자는 뜻밖의 진상,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해결, 경탄할 만한 대형 트릭 등, 일체의 미스터리적 카타르시스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이 충고를 어기는 독자에게는 반드시 기대가 배신당하는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다케모토가 쓴 '독자에게 보내는 충고장'은 엘러리 퀸이 『이집트 십자가 미스터리』 등 국명 시리즈 작품에 끼워 넣었던 '독자에게 보내는 도전장'의 패러디다.


작가가 스스로 '유사 추리 소설'이라 칭하긴 했지만, 문학 연구나 비평계에서 통용되는 장르 분류표를 참조해 본다면 이 책은 미스터리 소설이나 미스터리 작가, 가상의 범죄 사건을 모티프로 삼아 곳곳에 배치한 메타픽션 작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메타픽션, 즉 '소설에 대한 소설'이란 존 바스나 토머스 핀천, 도널드 바셀미 등 1960~70년대 미국 문학의 대표 작가들이 선보인 이른바 '자기 지시적 소설', '포스트모던 소설'을 전형적인 예로 삼는 소설 장르라고 일단 정의해 두자. 『허인들』 등 츠츠이 야스타카의 작품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물론 일본에서도 메타픽션을 향한 시도는 꾸준히 이어져 왔다. 구마 주기의 『세기말 경예기(鯨鯢記)』는 그 장르에 속하는 작품으로서 우리 기억에 생생하다.


『세기말 경예기』와 『우로보로스의 위서』의 공통점은 또 있다. 전자에는 "세계가 이러하게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그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구1원의 기도"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명백히 비트겐슈타인의 문장을 따옴표 없이 인용한 것이며, 후자에는 '크레타인의 역설'에 대한 검토가 등장한다. 독자로서는 가라타니 고진의 『은유로서의 건축』이 미친 영향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그런데 『우로보로스의 위서』에 등장하는 성범죄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라는 인간이 둥둥 떠다니는, 실체 없는 존재라는 건 나 스스로 느끼는 거짓 없는 실감이었다. 그리고 그 실감이야말로, 아주 오래전부터 나를 짓뭉개려 하던 것의 정체다. ………………그 공허함, 텅 빈 감각. ――그것을 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물음에만은 확실히 대답할 수 있다. 내게는 살인이야말로 유일한 방법이다. 내 삶을 터져나갈 듯이 가득 채워주는 건, 엄선한 제물을 내 손으로 때려죽이는 바로 그 순간밖에 없다.


이상의 내용은 『카이의 장난감 상자』에 나오는 '변질자'와 같은 수준으로 아키야마 범죄론의 사정권 안에 오차 없이 들어맞을 법한, 미야자키 사건보다는 고마쓰가와 고교 사건의 주인공에게나 어울릴 법한 부류의 발언이다. 또한 범인의 소년 시절 회상에는 나가야마 노리오의 그것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 있다. 평범한 리얼리즘 소설을 읽듯이 『우로보로스의 위서』를 읽어버리면, 도저히 미야자키 사건으로 상징되는 현대적 범죄의 수수께끼에 대해 고찰하고 그에 촉발되어 쓰인 작품이라고는 평가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책이 메타픽션이라는 사실을.


이 책이 메타픽션으로서 선보인 새로운 기축(基軸)은, 1장, 2장 대신 '연재 제1회', '연재 제2회' 하는 식으로 본문이 나뉘어 있다는 점에 있다. 실제로 『우로보로스의 위서』가 잡지에 연재되던 당시에는 장(章)의 구분이 그대로 연재 횟수가 되었다. 왜 그것이 새로운 아이디어인가 하면, 앞서 말한 방법을 고안해 낸 결과 이른바 '액자 없는 액자소설'이라는 트리키한 작품 형식을 가능케 했기 때문이다.


'연재 제1회'의 1절은 "이 몸은 살인귀로소이다. 이름은 말할 수 없도다."라는, 능청스럽기 짝이 없는 한 줄로 시작한다. 이는 성범죄자가 현재 써 내려가고 있는 글(일단은 '소설'이 아니라 '체험담'인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이다. 2절에는 앞 절과의 아무런 맥락도 없이 '다케모토 겐지'라는 작가(이하 '다케모토'라 칭함)의 1인칭 시점 글이 놓여 있다. 『우로보로스의 위서』의 실제 작가와 동명인 '나'의 세계에는 아야츠지 유키토나 시마다 소지 등 미스터리 독자들에게 친숙한 실존 작가들은 물론, 독자 입장에서는 실존 인물을 있는 그대로 모델로 삼았다고밖에 볼 수 없는 '다케모토'의 아내와 친구들이 다수 등장한다. 요컨대 사소설(私小説)의 패러디인 셈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유명하든 무명이든 실존 인물의 이름과 외모, 경력을 걸친 채 작중에 등장하는 인물들, 그리고 그로 인해 직조되는 세계가 다름 아닌 다분히 '오타쿠적'인 인물이며 세계라는 것이다. '다케모토' 주변에 출몰하는 인물들은 프로레슬링 오타쿠이고, 미스터리 오타쿠이며, 심지어 패러독스 오타쿠이기도 하다.


3절에서는 또다시 앞선 절과는 아무 맥락도 없이 '시라고야'라는 오키야(置き屋)를 무대로 한 게이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우로보로스의 위서』는 이처럼 도합 세 개의 독립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책장을 넘길수록 독자 역시 점차 깨닫게 되는 바는, 그 세 부분의 전체가 작중에서 '다케모토'가 집필 중이며 잡지에 연재 중인 소설(이하 '우로보로스의 위서'라 칭함)이라는 설정이다.


즉 '연재 제1회'라는 제목이 붙은 장은 '다케모토'가 잡지에 연재한 소설 '우로보로스의 위서'의 '제1회'와 조금의 어긋남 없이 포개지는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 『우로보로스의 위서』 연재 당시에는 작중의 '우로보로스의 위서'의 '제1회'가 현실의 잡지에 게재되고 있는 『우로보로스의 위서』 제1회와 완전히 겹쳐지게 되어 있었다. 결과적으로 작품 전체가 액자 속 이야기가 되면서 '액자 없는 액자소설'이라는 기괴한 소설 공간이 형성되는 것이다.


작품과 액자 속 이야기가, 혹은 액자와 본체 부분이 3차원적으로 뒤틀리면서도 2차원적으로는 연속되어 뫼비우스의 띠 같은 관계를 이루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기묘하리만치 현혹적인 허구의 경험을 독자에게 강요하지만, 작가가 쳐놓은 덫은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처음에는 독립된 것처럼 보였던 세 개의 이야기가 점차 상호 관입(貫入)하고 상호 침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액자 속 이야기의 설정은 사실 삼중 구조로 되어 있다. 제3부에서 주인공인 게이샤 요츠쿠는 남몰래 소설을 쓰고 있는데, 그 제목 또한 '우로보로스의 위서'다. 다케모토 겐지의 『우로보로스의 위서』 안에는 '다케모토'의 연재소설 '우로보로스의 위서'가 있고, 그 안에는 다시 '우로보로스의 위서'의 작중 인물이 쓰고 있는 '우로보로스의 위서'가 존재한다. 또한 제1부는 어떤 성범죄자가 옆방에 사는 '다케모토'의 서재에 숨어들어 '다케모토'의 워드프로세서로 집필하고 있다는 사실이 제1부 내부에서 밝혀진다. 정작 '다케모토' 본인에게는 그 대목을 자신이 직접 쓴 것인지에 대한 뚜렷한 기억이 없다. '독자에게 보내는 충고장'을 전후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꼬이며 혼란에 빠져든다. 요츠쿠를 비롯한 제3부의 등장인물들이 점차 제2부로 침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액자 부분이 없는 액자 속 이야기(뫼비우스의 띠처럼 연속되어 있는 『우로보로스의 위서』 = '우로보로스의 위서')에서, 본체 부분에 용해된 액자로서 애매하게 존재하고 있던 것은 물론 제2부다. 그것은 다케모토 겐지와 판박이인 '다케모토'의 1인칭으로 서술되고 있다는 점에서, 작품 공간 전체를 독자 역시 공유하고 있는 '현실'에 가까스로 붙잡아 두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3부의 등장인물이 제2부에 침입하기에 이르자, 마침내 '우로보로스의 위서'는 허실을 분간할 수 없는 이차원의 저편으로 표류하기 시작한다.


제1부와 제2부의 상호 침투는 한층 더 기괴한 결과를 초래한다. 우선 '다케모토'의 옆방에는 제1부의 글쓴이인 성범죄자 따위는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제2부 내부에서 밝혀진다. 더구나 제1부의 글쓴이 또한 이야기 도중 피해자의 역습을 받고 죽어버린다.


그 대목은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죽은 것이다. 사냥감에게 반격을 당해 죽다니, 아이러니하고 멍청하고도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누구란 말인가? 그래, 이 문장은 도대체 누가 쓰고 있는 걸까?" 죽은 인간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길 길이 없는 이상, 만약 제1부의 글쓴이가 '다케모토' 말고 따로 존재한다면, 그는 여태껏 연쇄 살인범을 자칭해 온 인물이 아닌 또 다른 누군가로서 '다케모토' 주변에 잠복해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제1부의 글쓴이는 마침내 '다케모토'를 흉내 내며 의태(擬態)하기 시작한다. '다케모토'의 1인칭 부분인 20절을 다 읽고 난 후, 독자는 이어지는 21절 첫머리에서 앞선 절과 똑같은 문체로 쓰인 다음과 같은 문장과 마주치게 된다. "결국 놈은 수법을 바꾼 것뿐이다. 독립된 자신의 장을 덧붙이는 방식에서, 내 장에 가짜를 섞어 넣는 방식으로. ……노파심에서 말해두지만, 앞 장은 내가 쓴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21절의 '다케모토'는 20절의 '다케모토'가 가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독자는 더 이상 그 말을 순순히 믿을 수 없다. 동등한 권리에 의해 그 역(逆)도 얼마든지 성립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제1부는 제2부에 녹아들고, 반대로 '다케모토'는 두 개의 인격으로 분열해 버린다. 이후 갈수록 극에 달하는 혼돈과 혼란, 얽힘은 이미 요약 가능한 범위를 넘어섰다. 결국 작가는, 범죄론적으로 볼 때 구세대에 속할 법한 캐릭터를 작가의 존재와 뫼비우스의 띠 형태로 이어버리는 것이다. 작품은 다음과 같이 막을 내린다.


내가 나로서 존재할 의미는 어디에도 없다. 한때 나라고 불렸던 것은 온갖 소쿠리의 구멍 사이로 속절없이 빠져나가 버리고 만다. …………………분명 나는 언젠가 사건의 지평선을 넘어갔을 것이다. 그래, 나는 이제 없다. 하지만 이 소설은 끝나지 않겠지. 자기 자신을 집어삼키는 우로보로스는 다시 자기 자신을 토해낼 테니까. 이것이 위서인 한, 나 혼자 쓴 글이 아닌 한, 이 소설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막이 내린 것일까. 메타픽션은 포스트모던 사상의 일환이다.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제와 전략을 공유한다. 특권적인 주제성을 재현하는 듯한 작품을 파괴하고, 의미 결정권을 부여받은 만능의 작가를 살해해 버리는 것.


아마 다케모토 겐지는 오에 겐자부로가 『비명』에서 고마쓰가와 고교 사건을 그려낸 것과 같은 방식으로는 더 이상 미야자키 사건을 묘사할 수 없다고 여겼으리라. 사건의 범인을 모델로 주인공을 조형하고,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범인의 의식과 사고와 논리를 소설적으로 재현하는 것. 그런 리얼리즘 소설의 방법론으로는 절대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아마 우리 시대의 범죄가 존재할 것이다. 다케모토가 메타픽션이라는 방법론을 택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 필연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작중 인물의 성격이나 사상을 통해 사건을 그리는 대신, 작품 공간 전체를 사건의 메타포로 치환해 버리는 것.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다케모토 겐지의 방식에도 함정은 존재한다고 감히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메타픽션의 방법론은 어딘가 마술과 닮아 있다. 교묘한 손놀림으로 관객의 눈을 속이는 '기예(芸)' 내지는 '업(業)'으로서의 마술=메타픽션은 결과적으로 마술사=작가를 허무의 저편으로 소실시키기는커녕 역설적으로 절정에 달할 만큼 뚜렷한 존재감을 그에게 안겨주고 만다. 토끼는 모자 속에서 감쪽같이 사라질지언정, 토끼를 사라지게 한 마술사는 관객의 성대한 박수갈채를 받는다. 마술이란 본디 그런 것이다.


철저하게 독자를 농락하고 현실감을 혼란시키는 메타픽션 작가는 단순한 리얼리즘 소설 작가 이상으로, 작중의 인물과 시간과 공간을 의도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신과 같은 대문자 '작가=주체'로서 궁극의 권력을 과시하기에 이른다. 이 책에서도 작가는 마지막 대목에서 '다케모토'의 존재를 소멸시키려 애쓰지만, '우로보로스의 위서'의 저자 '다케모토'가 사라지는 대가로 『우로보로스의 위서』의 작가인 다케모토 겐지는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수명을 연장해 버린다. 토끼는 사라져도 마술사는 남고 마는 것이다. 마술이라면 그것으로 족하다. 하지만 메타픽션에 부여된 과제가 과연 그것으로 달성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이는 포스트모던 소설로서의 메타픽션이 쉬이 벗어날 수 없는 까다로운 조건으로 작용한다. 허무를 허무로 채우려다 되레 실체를 날조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허무를 채우는 허무를 다시 허무의 저편으로 완전히 소멸시켜 버리는 듯한 불가능에 가까운 작품이 실현될 때, 미야자키 사건으로 상징되는 현대적 범죄 또한 그것을 재현하는 '표현'과는 절대적으로 이질적인, 진정으로 허구적인 등가물을 가까스로 획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