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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댓글로 추천받은 적이 있던 작품이라 약간의 기대감을 가지고 읽어본 <향성>, 작가의 데뷔작인데다 누보로망 작품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어려울거라는 예상은 하고 읽었는데, 정말 한 번 읽어서는 알 수 있는 게 단 하나도 없었다. 생각보다 훨씬 난해한 작품이라, 책 뒷부분의 해설을 참고하여 감상을 적어보도록 하겠다.


이 작품에는 아무런 스토리가 없다. 쪽수로 따지면 70쪽, 번역본 기준 24개의 텍스트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소설이라고 부르기에도, 에세이라고 하기에도 맞지 않는 특이한 작품이다.


등장인물이 나오긴 하나, 작품에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이 중후반부에 나오는 ‘아다’ 라는 이름을 가진 하녀 말고는 이름도, 얼굴도, 그 어떠한 정보도 밝혀지지 않는다. 게다가 모든 인물들이 ‘그’, ‘그녀’, ‘그들’ 같은 대명사로만 불리는 탓에 이 사람들이 몇 명인지, 전에 나왔던 사람과 같은 사람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뭔가 갈피가 잡힐라 치면 글이 뚝 끊기고 전의 내용과는 아무 연관이 없는 별개의 텍스트로 넘어가는 탓에 좀 많이 힘들었다.

모호하게 서술되는 장면들과 읽기의 흐름을 끊어먹는 수많은 쉼표들도 특징이었다.


기존 소설 문법의 파괴를 통해 소설의 새로운 형식을 찾아나서자는 뜻을 담은 누보로망은 그간 소설들에서 드러나던 인물들의 행동과 감정보다는 사물의 객관성을 강조했는데, 해설에 따르면 사로트의 <향성> 은 다른 누보로망 소설들과 같지 않게끔 자신만의 글쓰기 방법을 개척한 작품이라고 한다.


이 배경에는 조이스, 프루스트, 버지니아 울프의 영향이 컸다.

조이스의 심리적 다층성과 프루스트의 시간을 통한 밀도 표현, 울프의 의식의 다층성을 접한 사로트는 ‘물리적이거나 화학적인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생물의 경향’ 이라는 뜻을 가진 ‘향성’ 이라는 용어를 빌려 자신만의 글쓰기를 시작한다.


사로트는 아주 얕고 모호하며, 어떤 단어로도 설명하기 힘든 찰나에 가까운 순간을 향성과 연관지었고, 인간의 행동에 큰 영향을 끼치는 의식의 변방에서부터 비롯된 미지의 것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작품을 읽으면서 유일하게 기억에 남았던 것이 한 가지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사물들이,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는 한 밤 중에 집안을 가로질러가는 것을 두려워하며 자신이 서있는 곳에 그대로 서 있고, 또 다른 ‘그녀’는 안락의자에 계속해서 웅크려만 있으며, ‘그’는 자신의 어질러진 방을 다른 사람들이 말끔히 치우고 물건들을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자 공포를 느끼고, 각종 사물들은 비로소 전원이 꺼진 후에야 그들의 눈에 들어온다.

’그녀들‘ 이 자신들이 원하는 디자인을 가진 양복을 찾기 위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장면이 있으나 이 역시 사건의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사로트는 향성이라는 미미한 기척을 가진 장면들을 길게 늘려 자세하게 표현한다. 역자가 말하길 앞서 말했던 장면들이나 별 다른 의미와 목적 없는 인물들의 짧은 대화나 사건들 또한 이 향성의 일부라고 한다. 나는 잘 모르겠지만 역자는 이 사건들 속에, 이성과 정신이 감지할 수 없는 말초적인 본능이 깃들어있다고 덧붙였다.


향성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미세하기 그지없는 것들을 한 데 모아 해체하고 보기 좋게 재배열한 결과가 바로 이 작품이다.

이 과정 속에서 소설의 언어는 사라지고 쉼표를 동반한 글 자체의 리듬과 일련의 이미지들만 남는다. 소설의 경계를 해체하고 글쓰기의 지평을 넓혔다는 점에서 베케트하고도 유사한데, 작품도 그만큼 어렵고 난해했던 것 같다. 읽고 나서 하나의 꿈을 꾼 듯이 느껴지는 이 요묘한 기분이, 누보로망만의 고유한 특징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