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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라는 경제학자이자 정치철학자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물론 정치적인 견해를 떠나서 그의 근본적인 출발점 중 "어떤 규칙 아래에서 조정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그러나 옳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것은 단지 어떻게 메타적인 수준에서 절차주의로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리처드 헤어와 같은 분석윤리학자들의 저작에 힘입어, 이것이 논리적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달성해야 하는 목표의 성격도 중요하지만, 그것의 기반이 무엇인지가 경험적으로 선행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하이에크는 목표에 대한 언급을 꺼리지만—그리고 바로 그 점이 문제적이었다고 생각하지만;왜냐하면 그는 기준의 명시적 채택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이론은 정치철학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규범적 귀결이 없다—왜 가치 기준을 명시적으로 다루지 않으면 제대로 된 규범적 귀결을 도출할 수 없는지는, 이 감상문을 통틀어 계속해서 거론될 것이다. 이러한 기준으로 그를 비판하는 데에 관해 미리 예상되는 한 가지 반론에 답하고자 한다. 그것은 하이에크가 도덕철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메타윤리학적 비판이 부당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 그 반론은 무력하다. 그의 전문 분야가 무엇인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요점은 그가 사실판단에 머무르지 않고 규범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규범을 제시하는 순간 누구라도 '정당화'의 영역 안에 들어오게 되는 셈이므로, 그는 이에 관한 부담을 진다.—남는 건 "우리는 거대한 체계를 파악할 수 없다.", "진화적으로 살아남은 규칙들이 잠정적으로 옳다."와 같은 자연선택적 오류에 가까운 주장들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개인적으로 하이에크는 정교하게 출발했지만, 결과적으로 에드먼드 버크와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고 본다. "왜 어떤 규칙은 존중되어야 하고, 어떤 규칙은 폐기되어야 하는가?", "진화적으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왜 규범적 정당성을 부여하는가?" 등의 질문들에 대한 유효한 답을 내놓을 수 없다는 점에서 말이다—이것은 감상문의 후반부에서 『개인주의:허와 실』을 인용한 논평과 연결된다.—후기 하이에크는 자유의 규범성을 다루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은 단순 선언에 가깝다는 점이 여전히 문제적이다. 그가 자유를 정당화 하는 데에 사용하는 근거는, "자유는 지식 활용을 극대화한다.", "자유는 진보와 번영을 낳아왔다.", "자유 없는 사회는 오류 수정이 어렵다." 정도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런데 위 근거들이 규범이나 당위의 '정당'화에 있어 적절한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이는 모두 사실판단만 포함하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흄의 '사실-당위 구분'에 따르면 사실판단만으로 당위는 도출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사실의 종합과 가치판단을 전제한 규범적 명령은 서로 다른 진리 조건을 가지기 때문이다. 즉, 사실과 가치는 통약이 불가능 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간극을 무시하는 논증은 '자연주의적 오류'라는 비형식적 오류를 범하는 셈이 된다. 결국 하이에크는 정교한 사실판단을 늘어놓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그것을 수용할 이유를 제시할 수 없었다. 그는 구성주의의 위험성 때문에 [적어도 명시적으로는] 규범성의 제시를 거부하는 태도를 보이는데, [만약 그것이 성공적이라면] 이는 결국 그의 견해를 받아들여야 할 필요도 역설할 수 없음을 가리킨다. 그가 일관적이라면, 그는 당위적인 명령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가치의 문제는 그를 수용하지 않아도 될 여지를 제공한다.
이에 대해 우리가 고려해봐야 하는 반론 중 하나는 "그의 가치 전제가 '효율적인 것은 바람직하다'인데, 단순히 그것이 숨겨졌을 뿐이다. 그것을 도입하면 논증은 정당해진다."와 같은 식의 것이다. 실제로 그 말마따나 가치판단을 분명히 드러낸다면 논증의 성격은 변하긴 한다. 자연주의의 오류는 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당하게' 변하는지는 분명히 논란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효율적인 것은 바람직하다."는 경험적으로 도출되는 명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제를 투입할 시 구성적 합리주의를 피하겠다는 그의 발언과 수행적 모순을 이루게 된다. "우리는 가치를 설계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내가 옹호하는 가치는 효율이다." 모순적이지 않은가? 따라서 부적절한 반론이다.
두번째로 고려해볼 반론은 "하이에크는 애초에 규범을 제시하려고 한 적이 없다. 그에게 자유는 상이한 가치관들이 충돌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게 하는 제도적 조건일 뿐이다. 그저 다른 가치관들이 바로 서기 위해서는 선결적으로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메타 논변을 펼쳤을 뿐이다."라는 식의 것이다. 이 답변은 굉장히 정합적이고, 하이에크의 본래 의도에도 잘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결국에는 결정적인 질문을 해소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반론의 위력은 약화된다. 해당 옹호자는 "왜 '상이한 가치관들의 공존 가능성'이 규범적으로 중요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면 이에 어떻게 답할 것인가? 이 지점에서 정당화가 이루어지려면 다시 "다원주의는 바람직한 상태이다." 등의 가치판단이 도입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를 도입할 시 하이에크의 본래 주장과 수행적 모순을 이루게 된다. "우리는 가치를 설계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나는 다원주의 사회라는 가치를 설계한다." 모순적이지 않은가? 따라서 부적절한 반론이다.
이외에도 개인적으로 제러미 벤담이나 토마스 홉스 등의 영국 경험론적 전통을 가진 철학자들을, 본인의 견해에 반하는 결론을 낼 수 있다는 이유로 구성주의 사조에 포함시킨 부분도 결함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간략히만 논하겠다. 알다시피 벤담은 그의 기준을 제시할 때 데이비드 흄의 '일반적 관점' 등의 경험주의적인 개념들을 적극적으로 참조한다. 무엇보다 그의 쾌락 계산법 자체가 철저히 경험적 방법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쾌락의 추구와 고통의 감쇄는 진정으로 바람직한 것이다."라는 가치판단이 경험적으로 도출되지 않는다는 조지 에드워드 무어식의 지적은 물론 적절하다. 하지만 이런 식의 가정에 의거해서 도출되는 판단들은 규범 이론이라면 불가피하게 포함될 수 밖에 없다. 상기한 하이에크의 이론을 규범적으로 읽는 시도에서도 이는 분명히 드러난다. 또한 홉스는 경험주의 철학의 시대를 연 프랜시스 베이컨의 영향을 크게 받은 철학자였다. 실제로 그는 철학사에서 초기 경험주의 사조의 계승자 중 하나로 취급 받기도 한다.;—, 절차와 규칙의 중요성은 충분히 다루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명실상부하게 그의 가장 중요한 저작이며, 동시에 정보경제학의 효시가 된 이 논문은 분명히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느낀다. 『사회에서의 지식의 사용』은 1945년 <The American Economic Review>지에 개재 되었는데, 발표된 당시에는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 케네스 애로우, 조지프 스티글리츠 등에 의해 정보경제학 분야가 탄생하며 이 논문의 선구적인 성취는 매우 높이 평가 받게 되었다. 하이에크에 대한 개인적 평가와는 별개로, 이러한 성취는 상경 계열 전공자로서 인정할 수 밖에 없다.
후술하는 글은 『사회에서의 지식의 사용』에 대한 감상문이다. 기본적으로 논문의 내용을 정리하되, 일부 논평을 덧붙인 부분이 있다. 이전에 게시했던 여러 감상문들에서와 동일하게, 주로 괄호 안의 내용들이 논평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이에크가 거론하는 바에 따르면 '합리적 경제 질서'를 구축한다고 할 때, 우리가 희망하는 것은 이용 가능한 모든 지식을 집약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이에크는 이것은 당면한 경제 상황과는 동떨어져 있다고 말한다. 확실히 모든 지식이 '주어진' 것이라면 경제 질서의 설계는 논리학적인 문제가 되지만, 경험적으로 고찰할 때 지식의 분포가 그러한 가정에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경제 계산의 출발점이 되는 '여건'이 사회 전체적으로 그 함축적 의미를 이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한 사람에게 결코 '주어지지' 않으며, 그리고 결코 주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그는 활용할 수 있는 지식들의 유형이 집중되거나 통합 되어있지 않고, 별개의 개인들이 분산된 단편적 지식을 보유한다는 유명한 주장을 펼친다.
또한 이것이 경제 계획이 중앙집권적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많은 개인들 간에서 분할되어야 하는가에 관한 논의라고 덧붙인다(그러나 논리적으로 잘못된 판단이다. 그리고 서문에서 언급한 사실에서 당위를 끌어내려고 하는 행위와 연관된다. 이전과 이후에 하이에크가 진술한 바를 모두 참이라고 가정해도 이것은 "어떤 계획이 더 탁월한 정보효율성을 확보하는가?"에 관한 이야기이지, "어떤 계획을 시행해야 하거나 혹은 어떤 계획을 시행하는 편이 바람직하거나 옳거나 좋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실증적인 논의를 하면서 자연주의적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면 이 점은 항상 유념해둘 만한 것이다.)
여기서 그는 현대 경제 담론에서 '계획'이 흔히 '중앙계획'을 의미하도록 사용되지만, 본래 그 단어는 이용 가능한 자원의 배분에 관한 상호 연관된 의사결정의 복합체를 의미하므로 모든 경제활동은 계획이라고 정의한다. 즉, 그가 무언가 계획을 실행하는 것에 관해 말한다면 그것은 중앙계획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는 계획을 세 종류로 구분한다. 첫째는 중앙계획, 둘째는 경쟁을 통한 분권적 계획, 셋째는 독점적 위임이다. 중앙계획은 하나의 통합된 계획을 통해 전체 경제를 통제하는 것이다. 경쟁은 분산된 정보를 가격의 여론 형성 기능을 통해 집약하는 방식의 계획이다(이는 『경쟁의 의미』라는 하이에크의 다른 논문에서 제시된 정의이다. 이 논문에서는 경쟁을 계획의 한 종류로 언급할 뿐, 경쟁이 무엇인지를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물론 경쟁과 후술할 가격 체계는 연관성을 지니기에 무관한 내용은 아니다.) 독점은 조직화된 산업을 통한 계획이다. 20세기 초 미국에서 성행하였던 '트러스트'와 같은 형태가 이에 해당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들 계획 중 어떤 것이 가장 효율적인가 하는 문제는 어떤 제도 하에서 기존 지식이 보다 더 많이 이용될 수 있는가에 관한 기대에 의존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하이에크는 이 경우 주요 쟁점은 상이한 종류의 지식들이 가지는 상대적 중요성이라고 역설한다. 그는 사회적 유용성을 통해 지식을 평가하는데(그가 이 지점에서 사회적 유용성이라는 하나의 '가치 기준'을 채택한 채로 말하고 있다는 점은 자명하다. 이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인용함으로써 알 수 있다. "완전히 이용되지 않은 기계나 잘 활용될 수 있는 어떤 사람의 숙련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 또한 그런 것들을 잘 활용한다거나, 공급이 중단된 동안 이용 가능한 잉여재고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는 것 등은 보다 개선된 대안적 기술에 관한 지식만큼이나 '사회적으로 매우 유용'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부동산 관리인의 투기에 관한 지식이나 지역 간 가격 차이로부터 시세 차익을 도모할 수 있는 상품 중개인의 지식 등을 선별된 전문가들의 '과학적(그는 이 단어를 굉장히 넓게 사용한다. 우리는 과학적인 것을 경험주의적 방법론에 입각해 탐구된 것으로 보지만, 그는 모든 이론적인 지식을 과학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지식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물론 이 지점에서 하이에크가 하려는 말은 명확하다. 다만 실증적으로 위 두 예시가 사회적으로 유용한 지식에 해당하는지는 다소 의문이 있다. 부동산 투기는 국민부채 증가, 주거비 상승,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산 버블을 유발하고, 그것이 붕괴함으로 하여 연쇄적인 경기침체를 불러올 수 있다—이러한 현상이 실물경제와 금융경제를 모두 빠르게 침식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은 대공황과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보여준 바 있다—그러나 투기가 성행할 때 한 경제의 총효용에 어떠한 도움이 되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이는 리처드 포스너와 같은 학자들 역시 지적한 부분이다—그는 『자본주의의 위기』라는 저서에서 이러한 대비를 통해 무분별한 투기가 성행하지 못하도록 금융 규제를 강화할 필요성을 역설했다—두번째 예시 역시 이상적인—다시 말해 거래비용이 없는—상황 하에서는 가격이 자동으로 조정되게 함으로써 일물일가의 법칙을 성립하게 만들 수 있는 지식이지만, 현실에서는 운송비, 탐색 비용, 계약 비용, 세금, 규제 등 거래비용의 존재로 인해 가격 차이가 해소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엇이 유용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비정형적이고 특정한 장소와 시간에 국한되는 지식이 경시되고 있으며, 이것은 "그런 지식의 변화를 현재 더 낮게 평가한다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된다."라고 말한다. 지식의 변화에 대한 평가가 왜 쟁점이 되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하이에크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경제 문제는 언제나 변화의 결과로만 발생한다. 흔히 현대적 생산설비의 확충에서 일단 공장이 설립되면 나머지 사항들은 대개가 기계적으로 결정된다고 믿지만 그렇지 않다. 이러한 통념은 실제 사업가들의 경험을 통해 부정된다. 동일한 설비로도 다양한 한계비용을 낼 수 있다는 것은 경제학자들의 연구에서와 다르게 기업가들의 경험에 비출 때 진부한 이야기이다. 경제학자들이 이러한 작은 변화를 망각하게 되는 이유는 통계적인 집계 변수에 의존하는 습관 때문이다. 그러나 집계 변수들의 상대적 안정성이 큰 수의 법칙이나 변수 간 상쇄에 의해 설명될 수는 없다. 여기까지가 해당 부분에 관한 하이에크의 설명이다(그러나 현대 경제학을 공부하는 경제학도인 입장에서, 지금 이 시점에서도 하이에크식의 탐구 방법이 방법론적으로 정확하다는 평가를 내릴 수는 없다. 하이에크가 초보적인 방식이라고 거론했던 케인스식의 거시경제 분석은 매우 정교하다고 평가 받는 동태적 확률 일반균형 모델로 발전했으며, 어느 정도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 미시경제 분석은 이미 가격, 소득, 비용, 생산성과 같은 전통적 변수들 뿐만 아니라 공간과 시간 및 거래 환경에 따른 다양한 정보 변수—상기했듯 이는 특히 하이에크가 당대의 경제학 모델들이 반영하지 못하는 맹점으로 거론한 요소들이다—들과 규제, 최저임금, 세법, 노동법 구조와 같은 제도적 변수까지도 모두 반영하고 있다. 이 논문을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한 바, 요컨대 "경제학 통계와 이를 이용한 모델들은 분산된 정보와 제도의 효과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러한 방법론에 의존하는 것은 정책적 움직임을 왜곡할 수 있다."라는 지적의 상당 부분은 보완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이를 통해 주장하고자 한 바, 요컨대 "상기한 변수들은 계산에 반영될 수 없으므로,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시장에의 정책적 움직임 자체를 포기하는 편이 효율적이다." 역시 그대로 받아들일 수만은 없다. 우리는 이제 시장 참여자도 완전정보를 가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다. 시장 역시 외부효과•독점•도덕적 해이 등에 의해 실패할 수 있음을 안다. 따라서 가격이 항상 최적의 정보를 반영하지는 않으며, 정부가 시장 성과를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는 이 논문이 선구성을 인정 받게 된 계기인 정보경제학과 매커니즘 디자인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사실 이것은 하이에크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당시에는 경제학 모델이 지금보다 덜 동태적이고 덜 포괄적이었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그가 지적했던 바 중 일부는 적절했을 것이다. 이 주제에 관해 논할 때, 우리는 이것이 1945년의 경제학계에 대한 논평이지, 2026년의 경제학계에 대한 것이 아님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그의 현재 지지자들에 대한 비판이 될 것이다. 당대에는 그의 지적 중 일부가 타당했을지 몰라도, 지금에 이르러 여전히 하이에크의 방법론을 '유효한 학문 연구 방법으로서' 지지하기 위해서는 현대 주류 경제학이 쌓아올린 성과들의 상당수를 무시하거나 반박해야 할 것이다.
물론 여기서 논한 바가 경제적 개입주의를 실행해야 한다는 견해에 실질적인 힘을 실어주는 것은 아니다. 자유방임이든 개입이든 모두 구성원 일반의 효용이나 복리와 관계 없는 방식으로도 옹호될 수 있기 때문이다. 로버트 노직은 권리론을 통해 자유지상주의를 옹호함과 동시에 오히려 공리주의를 비판했다. 한편 존 롤스는 경제적 개입을 지지했지만 이 역시 정의라는 규범적 원칙에 기반한 것이었으며, 그 또한 공리주의를 비판했다. 이러한 유명한 사례들을 논함으로써 다시 한 번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사실에서 당위를 이끌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방향이 더 효율적인지를 가리는 논의와 아무 상관 없는 방식으로도 특정한 방향은 정당화 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되는 방식, 그러니까 가치전제를 논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정당화 될 수 없다.)
이어서 그는 자신의 주목하는 지식의 유형은 그 본질 상 통계로 나타낼 수 없으며, 따라서 중앙 당국에 전달되기에 부적절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중앙계획 입안자가 이러한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국한되는 비체계적 지식을 반영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비효율적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이다. 그는 소위 '현장에 있는 사람'에게 의사결정의 일부가 위임될 필요를 거론한다. 즉, 분권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하이에크는 이러한 분권적 의사결정의 핵심 기제로 '가격'을 거론한다. 그는 주석의 공급원이 줄거나 원자재의 새로운 활용 방법이 발견되었을 때를 예로 들어 이를 설명하고 있다. 이때 대다수는 주석을 '희소하게(즉 주석의 수요를 증대시키게)' 만든 원인이나 어떤 다른 욕구를 위해 어떻게 공급을 관리할 것인지 등을 알 필요가 없다. 그들 중 일부만이 그것을 직접적으로 인지하고 자원을 이전하지만, 그 결과 시장 전반에 연쇄적인 영향을 준다. 이러한 과정이 가격을 정보소통을 위한 기구로 볼 수 있게 만들어준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가격이 정보 집계를 위한 유용한 기제라는 그의 판단은 물론 부분적으로 옳지만, 현대 미시경제학에서는 다소 수정된 내용이기에 정확한 판단을 위해서는 그것을 다룰 필요가 있다. 잘 알려진 교과서적인 내용으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확실히 가격이라는 기제는 많은 정보들을 압축한다. 가격은 분명히 자원의 상대적 희소성, 수요 변화, 공급 충격, 대체제, 기대 등을 반영한다. 그러나 가격이 항상 완전정보에 가까운 충분함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외부효과는 가격이 전달하는 희소성에 대한 정보를 왜곡한다. 정보 비대칭은 도덕적 해이와 역선택 문제를 발생시킴으로 하여 가격이 효율적인 자원의 분배를 수행하지 못하도록 한다. 시장 지배력 또한 가격을 왜곡하는데, 이때의 가격은 '자유로운 거래'에 따라 형성된 것이 아닐 수 있다. 거래비용은 현실에서 일물일가의 법칙이 성립하지 못하게 한다. [위에서도 언급한 것이지만] 기대는 투기나 집단행위를 통해 버블과 그것의 붕괴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가격은 유용한 정보 집계 기제이나, 정보 구조와 시장을 뒷받침 하는 제도의 영향을 받는다. 이 점에서 그 자체로 하이에크가 말한 '계획'의 실현에 있어 이상적인 것은 아니다.)
또한 그는 이것이 인간 설계의 산물이 아님을 지적함으로써 소위 '자생적 질서'에 관한 자신의 이론과 연결시키고 있다(그는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는 습관을 우리가 계발해야 한다는 것은, 모든 비망록에 의해서 그리고 연설 때 저명한 사람들에 의해서 반복되는 대단히 잘못된 진부한 문구이다. 정확히 그 반대가 진실이다. 문명에 대한 생각 없이 우리가 수행할 수 있는 작업의 숫자를 증대시킴으로써 문명은 진보한다."라는 문장을 인용하고 있다. 화이트헤드의 저서를 읽지 않은 입장에서, 이것이 본래 어떠한 문맥에서 등장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하이에크가 위 문장을 인용한 것은 논증을 완결하지 못하는 수사적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결론에 대한 논증적 다리가 되어주지 못한다는 판단이다. 첫번째로 그는 자신이, 그리고 화이트헤드가 '문명의 진보'라는 것을 어떠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 정의하지 않았다. 이러한 행태는 화이트헤드의 원문과 하이에크의 주장의 의도를 서로 일치시키기 어렵게 만든다. 두번째로 이것을 화이트헤드의 입을 빌려 하이에크가 주장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면, 상기한 자연주의적 오류 비판이 다시 등장하게 된다. 어떠한 습관을 계발 '해야한다'는 당위와 문명의 진보의 조건 중 하나가 생각하지 못하는 가운데 진행되는 일들이 많아지는 것이라는 진술의 진위는 직접적 연결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연결은 "이러한 주장에서의 쟁점이 되는 목적함수는 '문명을 진보시키는 것'이다." 등의 기반 없이는 불가능 하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화이트헤드의 전문에는 그런 내용이 있는지 모르겠지만—추가로 인용된 것도 없고 하이에크가 덧붙인 사항도 없다. 또한 논문의 전반부 개관을 보아도, 경제 질서 확립에 대한 '일반적 희망사항'이 무엇인지 정도의 논의만 있지 어떠한 명시적 가치전제는 없다.
이러한 사실상의 숨겨진 전제는 인식론적 보수성이라는 결론으로 '미끄러질' 위험이 있는데—이는 인식론적 보수주의 자체에 대한 평가와는 관계가 없다. 단지 충분한 전제 없이 미끄러진다는 점에서 논리적인 오류를 발생시키는 문제일 따름이다.—, 실제로 그는 『개인주의:허와 실』이라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함으로써 증명한다. "[...]사회과정에 참여하는 개인은 변화에 스스로를 적응시킬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또한 스스로를 기꺼이 적응시켜야 하며 그 개인은, 지성적인 설계의 결과가 아니면서 특별한 경우에 그 정당성이 인식되지 못하며, 개인에게는 종종 인식 불가능하고 비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관습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그것에 기꺼이 순종해야 한다." 물론 이 자체는 그가 반대하는 소위 '구성주의적 합리주의' 하에서의 그가 지지하는 이른바 '진정한 개인주의'적 원리에 대한 추론이라는 명목으로 제시된 것이다. 그러나 후속 문장들을 통해 그는 이 원리를 명시적으로 지지한다. "[...]어느 누구도 설계하지 않은 사회과정의 산물에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또한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체적으로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만약 강제가 배제되어야 한다면 역시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다." 이것이 화용론적으로 더 이상 '진술'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기꺼이 ~에 순종해야 한다.", "~에 복종해야 한다." 등의 문장들을 보라—이것은 단순한 경제학적 진술이 아니라, 분명히 '권고'나 '규율'과 같은 당위적 효과를 가지는 수행문이다. 따라서 그가 여기서 제시하는 바에 대한 구조적 비판은 다시 상기한 여러 논리적 난점들로 돌아갈 것이다. 요컨대 "우리가 가진 정보는 충분하지 않다."를 통해 "그러므로 기존 질서를 따라야 한다."는 도출되지 않는다는, 그리고 그 중간에 삽입되어야 할 가치전제가 생략 되었다는 지적이다. 우리는 어떤 가치전제 하에서 자생적 질서에 적응해야 하고, 복종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며, 결과적으로 순종해야 한다는 것인가? 그는 이것을 명시하지 않았으며, 그럼으로 하여 그러한 전제가 논의될 여지를 부여하지 않았다—하이에크의 논변은 사실상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가진다. ["사회 질서는 너무 복잡해서 개인 이성이 전체를 파악할 수 없다."—>"따라서 자생적 규칙과 관습이 중요하다."—>"그러므로 개인은 이해하지 못해도 그것에 순응해야 한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에서 논리적인 비약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행은 예컨대 다음과 같은 전제들 없이는 필연적으로 도출되지 않는다. ["사회 질서의 안정은 '우선적인 가치'다.";좀 더 정확하게는 "불완전한 정보 하에서도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편이 좋다." "자생적 규칙은 대체로 개인 판단보다 '바람직'하다." "무질서보다 전통적 질서가 '낫다'."] 이 점에서 그는 목적론적 정치철학을 거부한다고 말하지만, 그 빈자리를 전통 존중•인지적 겸손•규칙 순응이라는 암묵적 윤리로 채운다. 여기서 제시한 '규칙 순응' 또한 개념적으로 그가 거부하려고 한 '집단적 목표나 언명'에 포함되므로, 이것은 기존의 주장과 논리적 충돌이 발생하는 지점이다.
좀 더 실천적으로 말하자면, 어떠한 가치를 채택하느냐에 따라 규범적 결론은 다르게 나타난다. 인간 이성을 통해 완전한 정보를 집약할 수 없다면, 기존 제도나 전통, 관습 등의 효과도 완전히 적절하게 평가할 수는 없게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왜 여기서 규범적 결론이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방향으로 귀결되어야 하는가? 그러한 인식론적 불확실함에 따르자면, 기존 제도 역시 [그 목표에 비추어] 부적절할 수도 있고, 전통과 관습 역시 오류를 내포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기존 제도나 전통, 관습 등에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복종'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실상 그가 탐구한 '사실'들에 의거하여 내릴 수 있는 규범적 결정이 여럿일 수 있음을 말해준다[대표적으로는;현재 그가 지지하는 시장주의, 분권적 행정 구성을 통한 완화된 중앙계획, 점진적 실험주의 등이 제시될 수 있겠다. 이는 여러 가지 가치 기준 속에서 간단히 떠올릴 수 있는 방안들만 기재한 것으로, 모든 가능성들을 반영한 목록은 아니다.] 그리고 어떠한 가치판단 없이는 상기한 가능성의 목록 중 무엇이 '해야하는' 혹은 '하는 편이 좋은' 것인지 결정할 수 없다. 다시 말해 평가하지 않고는 우선순위를 정할 수 없다. 그리고 평가는 사실을 진술하는 것이 아니다.—이러한 행태를 통해 메타윤리학적으로 다시 한 번 왜 그의 규범적 결론을 받아들일 만한 '이유'가 충분하지 않은지를 고찰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사회 분야에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공식, 부호 및 규칙을 꾸준히 사용함으로 하여, 우리는 개별적으로 소유하지 못한 지식의 도움을 받아 '관행'과 '습관'을 발전시킨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는 이러한 사례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가격이라고 말한다. 하이에크에 따르면 가격의 발전은 분업을 가능하게 했으며, 분할된 지식에 기초한 자원의 이용을 가능하게 했다.
개인적인 용도가 아니라 사회에서 지식을 사용하고 싶다면 줄간격을 좀 자유방임이 아니라 계획적으로 해야하지 않을까?
문단 나누기는 일종의 규칙을 가지고 진행한 것인데. 중간에 들어가는 논평들을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중심 내용이 바뀔 때마다 문단을 나눴음.
@azae 내가 맛폰으로 봐서 그런지 몰라도 글 들어오자마자 팔만대장경 눈앞에 들이민 느낌임. 줄간격이 빡빡해 ㅠ 집에가서 봐야할듯
이거 써주셈..
https://removelinebreak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