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SF와 최후의 소설

SF 소설의 아이디어와 기법이 주류 문학의 세계에 도입되어 대중적으로 자리 잡은 것은 미국에서는 1960년대 이후, 일본에서는 1970년대 이후의 일이다. 무라카미 류의 『코인로커 베이비스』,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등 신세대 작가들이 쓴 80년대의 대표적인 장편소설을 그 실례로 들 수 있다. 80년대 중반 사이버펑크 SF의 유행을 기점으로 이러한 경향은 더욱 기세를 더해갔다. 이 책에서 다룬 이토 세이코의 『월즈 엔드 가든』, 츠지 히토나리의 『카이의 장난감 상자』 등도 아마 사이버펑크 SF의 영향 아래 쓰인 작품일 것이다.


SF적인 것은 이제 전통적인 소설 표현의 틀을 벗어나 곳곳에 넘쳐나고 있다. 그것은 영화, 코믹스, 애니메이션, 게임 소프트웨어 등 다양한 표현 형태로 현대 사회의 문화 영역을 석권하고 있다. SF 창세기의 거인으로 쥘 베른과 H. G. 웰스의 이름을 꼽는 것은 상식에 속하지만, 우리 시대를 문화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한 SF적인 것은 대히트 영화 <스타워즈>나 <백 투 더 퓨처>를 비롯하여 대부분 베른의 사이언스 판타지에 기원을 두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웰스적인 방향은 거의 무시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웰스적인 방향이란, 당장은 문명 비평으로서의 SF라고 특징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계열의 걸작으로 자먀친의 『우리들』, 차페크의 『도롱뇽 전쟁』,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그리고 오웰의 『1984년』 등이 있다. 웰스적인 문명 비평 SF는 1920년대 이래 베른적인 사이언스 판타지의 후손들이 성대한 번영을 구가하던 미국에서 전후에 이르러 한층 글로벌한 수준으로까지 전개되었다. 그러한 50년대 미국 SF의 대표 작가가 바로 『치료탑 행성』의 오에 겐자부로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아서 C. 클라크이다.


클라크의 최고 걸작 『유년기의 끝』은 웰스에서 비롯된 전통적인 문명 비평 SF가 테크놀로지 시대의 철학 소설 수준에까지 도달하여, SF적인 설정 속에서 인류의 의미, 진화의 의미, 존재의 의미를 종횡무진 남김없이 이야기하고 있다. 일본의 SF 작가 중 클라크의 우주 철학 소설에 압도적으로 영향을 받은 이는 아마 고마쓰 사쿄일 것이다. 고마쓰는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을 전제로, 혹은 그것을 철저하게 파고드는 작품으로서의 대작 『끝없는 시간의 흐름 끝에서』를 완성했다.


하지만 미국에서든 일본에서든, 클라크와 고마쓰가 보여준 1950, 60년대의 시도는 계승되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SF는 번영하고 있지만, 테크놀로지 시대의 신학이나 인간학에 대해 사유하는 유형의 SF 작품이 쓰이는 일은 거의 희귀한 실정이다.


오에 겐자부로의 『치료탑』과 『치료탑 행성』은 본편과 속편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장편소설이 두 권으로 나뉘어 출간되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한 성격의 작품이므로, 이하에서는 이 둘을 일체화된 하나의 작품으로 간주하고 논하고자 한다. 『치료탑』 연작에 대해 가장 먼저 강조해 두고 싶은 점은, 이 작품이 클라크와 고마쓰의 시도 이후 무려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마침내 출현한 클라크적인 우주 철학 소설이라는 점이다. 『치료탑』 연작은 SF의 시대에 쓰인 반시대적인 SF 소설인 것이다.


『치료탑』은 '재회 혹은 라스트 피스'라는 제목으로 잡지 《헤르메스》에 연재되었다. 구 제목에 있는 '라스트 피스'의 의미는 작중의 다음과 같은 말에 나타나 있다. "지구 인류라는 것은, 우주 탄생 이래 '신'이 창조해 낸 지적 생물 중 마지막 존재가 아니었을까? 최후의 작품으로서, 우리가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오에에게는 『치료탑』 직전 시기에 쓰인 평론 「마지막 소설」을 중심으로 한 『"마지막 소설"』이라는 평론집이 있다. 「마지막 소설」에서 오에는 미시마 유키오의 마지막 소설 『풍요의 바다』를 거론하며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감히 말하자면 미시마 유키오는, 자신의 '마지막 소설'이 뒤에 오는 자들에 의해 계승되거나 발전되는 일이 없도록 모의하며 그 생애를 마감했던 것은 아닐까? ………………미시마 유키오는 죽음에 즈음하여, 자신의 문학은 이것으로 끝났다고 명언했다. 게다가 그것은, 문학은 이것으로 끝났다는 언명과 동의어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의 의지와 의식 속에서는 말이다. 그의 정치 사상에 있어서도 같은 것이 표명되었던 것처럼, 이제 와서는 여겨진다. ……발코니 아래의 자위관들에게 호소하면서도, 내면의 의지와 의식 속에서, 죽음을 목전에 둔 미시마 유키오는 자신의 정치 구상은 이것으로 끝났다는 생각을, 정치 구상은 이것으로 끝났다는 생각에 겹쳐 놓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의 자1살 이후에는, 그렇게 그에게 경멸당한 황무지로서, 본국의 문화적 상황이 남아 있다.


그러면서 오에는 미시마의 『풍요의 바다』와는 대극적인 성격의 최후의 소설로서 무질의 작품을 꼽으며, "『특성 없는 남자』의 방대한 양에 달하는 미정(未定)고, 초고, 노트는, 작가가 '마지막 소설'로서 의지적이고 의식적으로 구상하고, 실현을 향해 작업하기도 했으며, 게다가 건강 상태에 대한 예감 때문에 그것이 미완성의 '최후의 소설'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도 예기하고 있는, 그러한 장면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환기력을 갖추고 있다", "미시마 유키오는 『풍요의 바다』 집필과 병행하여――'마지막 소설'의 의지적이고 의식적인 제작 도중에――해당 소설이 공개되었을 때의 비평 일반에 대한 혐오를 미리 편지에 썼다. 비평을 거부하는 것을 넘어, 만약 독자들이 '최후의 소설'의 제작에 참여하는 것을 상상이라도 했다면, 미시마 유키오가 품은 혐오는 최대 수준에 달했을 것이다. 그것은 무질이 『특성 없는 남자』를 열어둔 채 남긴 태도와 대극을 이루는 것이다"라고 평가한다.


미시마 유키오의 『풍요의 바다』에 대치하고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를 계승하는 듯한, 작가 오에 고유의 마지막 소설. 평론집의 서문에 해당하는 부분에서는, "나는 나 자신을 '마지막 소설'을 향해 정비하기 위해서라도, 최근 몇 년간 내가 이렇게 살아왔다, 이렇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현장 보고처럼 제시하는 한 권의 책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그러한 의도로 평론집 『"마지막 소설"』은 엮여 있지만, 같은 글의 말미에서 오에는 앞선 구상의 포기를 다음과 같이 불쑥 선언하기도 한다. "내가 작가의 삶의 방식으로서 가장 존경하는, 그러한 퍼포먼스를 오랫동안 지속해 오신 ○ 선생님"으로부터, "'최후의 소설'이라는 식으로 자신을 옭아매는 것은 좋지 않네. 그건 고통스러운 일이야"라는 주의를 받는다. 그리고 "나는 얼굴이 확 달아오를 듯한 부끄러움과 함께 '최후의 소설'이라는 말을 취소하기로 했다. 내 죽음에 대해 확실한 예견을 품게 되는 때가 오더라도, 새삼스레 다시 이 말을 글로 적는 일은 없을 것이다."


평론집 제목 '최후의 소설'의 따옴표는 강조의 따옴표라기보다는 오히려 반어적인 의미를 담은 따옴표이다. 하지만 오에는 왜 "'최후의 소설'이라는 말을 취소하기로 했"는지, 그 이유를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명확하게 설명하지는 않았다. 시기적으로 평론 「최후의 소설」에 이어 쓰인 『치료탑』의 연재 당시 제목에는, 앞서 말했듯 '라스트 피스'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다. 아무튼 '최후의 소설'과 '최후의 작품'이다. '최후의 소설'이라는 말과 기도(企図)에 불현듯 "얼굴이 확 달아오를 듯한 부끄러움"을 느낀 오에의 진의가 『치료탑』에서는 설득력 있게 이야기되고 있지 않을까 상정해 보더라도, 그것이 독자의 과대한 기대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평론 「최후의 소설」과 소설 『치료탑』 사이에 한 가닥 보조선을 그을 수 있다. 역시 작가에게 있어 최후의 소설이 될, 하니야 유타카의 『사령(死霊)』이다. 오에는 미시마 유키오의 『풍요의 바다』에 부정적이지만, 같은 맥락에서 비판받아야 할 것은 오히려 『사령』이며, 『사령』에 담긴 하니야의 '최후'를 둘러싼 사유가 아닐까.


하니야 유타카에게는 전 우주사를 응축한 듯한 특권적인 언어, 영원한 서물(書物)에 대한 말라르메풍의 형이상학적인 욕망이 있다. 그 이면에는 아마도 「영구 혁명자의 비애」에서 이야기되는 듯한 하니야 고유의 인식이 깔려 있을 것이다. "그는 혁명가가 된 자신의 원칙을 끝까지 관철하려 했기 때문에, 흐리멍덩한 혁명가로서 오직 미래만을 유일한 동맹자로 삼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자신을 미래의 무계급 사회에서 온 파견자라고 느끼고 있다."


그러나 하니야의 하나다 기요테루 비판이나 스탈린주의 비판에는 근본적인 함정이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미래의 무계급 사회에서 온 파견자'를 자임하며 역사의 진리를 소유한 자로서 상대적인 역사적 현실의 심판자 자리에 오르고, 결과적으로 무제한적인 테러리즘을 해금해 버리는 것은 레닌주의를 철학적으로 합리화한 루카치적인 헤겔-마르크스주의인 것이다. 루카치주의 또한 절대적인 미래에서 상대적인 현재를 바라본다. 오히려 절대적인 미래의 이름으로 상대적인 현재를 관념적인 지배 하에 둔다. 루카치에 따르면 혁명당의 진리성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역사의 종언에, 즉 '혁명의 묵시록적 순간'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칸트 체험의 영감성을 강조하는 하니야지만, 그는 오히려 옥중에서 철저한 헤겔주의자로 지원한 것이 아닐까. 아마도 하니야에게 칸트의 초월 논리학은, 헤겔에게는 기정사실이었던 역사의 종언이나 역사를 외부에서 관조할 수 있는 철학자의 입장을 향해, 강요받고 있는 역사적 현실의 장에서 순식간에 초월할 수 있게 해 줄,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마술적인 방법으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하니야의 말라르메적 몽상 또한 같은 논리의 연장선상에 있다. 최후의 소설을 쓰고 자1살한 미시마에게서, 오에는 문학을, 혹은 정치를, 나아가 세계 그 자체를 끝내버리는 듯한, 미시마의 사후에도 계속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궁극적인 권력성을 보았다. 하지만 그 점에서는 하니야의 실존적 헤겔주의 쪽이 한층 더 철저하다.


일본 마르크스주의의 맥락에서 루카치적인 헤겔-마르크스주의를 체현한 것은 후쿠모토 카즈오였으며, 하니야는 쇼와 초기 혁명 운동의 궤멸을 체험한 직후의 세대에 속한다. 도요타마 형무소의 미결수 감방으로 상징되는 상대적인 역사적 현실의 폐색감으로부터, 그 외부를 몽상하며 실존적 헤겔주의의 방향으로 걸음을 내디딘 것은 비단 하니야 유타카 혼자만이 아니다. 예컨대 자기 운동을 하는 물질의 개념을 극한까지 헤겔주의화하여 혁명과 공산주의의 실현을 '우주사적 필연성'에 기초 지으려 했던 가케하시 아키히데의 존재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니야 유타카와 나란히 SF 팬으로 알려져 있는, 『아름다운 별』의 미시마 유키오가 극찬한 작품 중에 앞서 언급한 아서 C.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이 있다. 오에가 『유년기의 끝』의 영향 아래 『치료탑』 연작을 구상했다는 사실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 미시마의 최후의 소설 시도를 비판하는 오에가 바로 그 미시마를 흥분시켰던 『유년기의 끝』을 염두에 두면서, '최후=종언'이라는 강박관념을 무화하는 모티프로 『치료탑』 연작을 구상한다. 이러한 관계에는 지극히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은 오버마인드라 불리는 우주 정신에 의한 생명 진화의 통제를 주제로 삼고 있었다. 그것을 계승하는 작품으로 쓰인 고마쓰 사쿄의 『끝없는 시간의 흐름 끝에서』에서는, 우주 정신이 명백히 헤겔적인 절대 정신으로 묘사되어 있다. 고마쓰가 니시다 기타로와 다나베 하지메, 그리고 가케하시 아키히데도 속했던 교토학파의 영향 아래 지적 청춘을 보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고마쓰의 우주 철학 이면에는 거의 확실하게, 가케하시적으로 극단화된 헤겔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을 전제로 고마쓰 사쿄는 『끝없는 시간의 흐름의 끝에서』를 통해 클라크에게서는 아직 감춰져 있던 주제를, 즉 우주 정신=절대 정신의 궁극적인 억압성을 철저하게 그려낸 것이다. 고마쓰의 이른바 '우주의 뇌', 즉 우주 정신=절대 정신은 클라크의 오버마인드나 오버로드와 마찬가지로 지구 생명체나 인류의 진화를 은밀하게 통제하고 있지만, 고마쓰의 작품에서 그것은 무엇보다도 음침한 비밀경찰이나 강제수용소, 나치의 우생학 실험 등등의 이미지로 집요하게 묘사된다.


고마쓰는 작품의 마지막에 이르러, 우주 정신=절대 정신의 앞잡이가 벌이는 음참한 테러리즘을 이른바 부정적인 계기로서 변증법적으로 승인하려고 애쓴다. 살육전이나 제노사이드 등 온갖 역사적 악 또한 이성의 간지로 파악되어 마침내 긍정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인간 이상의 것, 초월적인 것을 긍정하고자 한다면 강제수용소마저도 승인해야만 한다는 불길한 메시지가 『끝없는 시간의 흐름 끝에서』에는 새겨져 있다. 그것은 역사가 종언하는 저편을 미리 철학적으로 소유할 수 있도록 작위(作為)하고, 그 위에 혁명당에 체현되는 역사적 이성의 이름으로 크론시타트 탄압을 긍정한 젊은 루카치의 도착을 무의식중에 재현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유년기의 끝』에서 클라크가 제시한 지구와 인류 사멸의 이미지에는 SF적인 상상력만이 빚어낼 수 있는 전율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그것은 기이할 정도로 매혹적이며, 또 그로테스크하기도 하다. '최후=종언'이라는 관념에 주박되어 『풍요의 바다』를 썼던 미시마 유키오가 거기에 매료된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교토학파적인 실존적 헤겔주의에서 하니야 유타카와도 공통점을 지니는 고마쓰 사쿄가 클라크의 우주 정신을 헤겔적인 절대 정신으로까지 극한화한 것 또한 필연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여 SF에서의 클라크적인, 혹은 고마쓰적인 우주론적 사유는 하나의 달성에 이르렀다. 오히려 막다른 골목에 봉착한 것이다. '최후의 소설'이라는 말과 기도에 대해, 무자각적인 헤겔주의적 억압성을 지적받고 말문이 막혔던 오에가, 클라크와 고마쓰에 의해 준비된 우주 철학 소설의 필드에서 같은 주제를 추구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배경으로 이상의 맥락을 읽어낸다 해도 그리 부당한 일은 아닐 것이다.


『치료탑』 연작의 배경은 핵전쟁과 에이즈로 황폐해진 근미래의 지구다. 인구 폭발, 식량 위기, 자원 고갈, 생태계 위기 등등. 그러한 회복 불가능한 병에 걸린 지구에는 더 이상 인류의 미래가 없다. 인류는 쇠망의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인간도 거주할 수 있는 행성 '새로운 지구'가 발견된다. 인류는 종으로서의 신생(新生)을 걸고, 남은 자원과 산업력을 쏟아부어 대선단을 준비한 뒤 백만 명의 '선택받은 자'들을 '새로운 지구'로 보낸다. 그러나 '선택받은 자'들은 '새로운 지구'의 가혹한 자연환경에 패퇴하여 지구로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중요한 발견을 품고 돌아왔다. '새로운 지구'에는 인간의 생명력을 비약적으로 높여주는 수수께끼의 장치 '치료탑'이 외계인에 의해 남겨져 있었던 것이다.


'치료탑'의 효과로 불사성을 획득한 식민단원들에게도 역시 불모의 행성은 신생의 땅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초인화된 엘리트라면 병든 지구를 소생시키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식민단의 지도자는 그렇게 생각하여 귀환을 결정했던 것이다.


『유년기의 끝』이나 『끝없는 시간의 흐름 끝에서』에는 신을 둘러싼 핵심적인 주제를 보완하는 것으로서, '진화할 수 있는 자'와 '진화할 수 없는 자'의 화해하기 힘든 대립에 관한 두 번째 주제가 있다. 전자는 신인류에 대한 구인류의 스토아학파적인 체념을 그렸고, 후자는 그곳에서 생겨나는 차별이나 억압, 테러리즘마저도 변증법적으로 승인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치료탑』 연작에도 같은 주제가 극명하게 재현되어 있다.


그것은 히로인인 릿짱의 두 백부, 시게루와 다카시의 대립으로 상징된다. '선택받은 자'의 일원인 다카시는 일본 스타십 공사의 총재로서, 테크놀로지와 우생 사상, 그리고 근대주의적인 '진보' 이데올로기를 체현하고 있다. 반면 지구에 남는 것을 선택한 시게루는, "우주 선단에 선택받지 못한 자, 즉 잔류자 중에서도 연령 등의 이유가 아니라 각 분야의 인재로서 이류, 삼류였기에 '낙오자'라 불렸던 연구자들을 조직하여 생산 공정의 전면적인 재검토를" 실행하고, "복잡한 것은 덜 고도화된 쪽으로", "어려운 것은 쉬운 쪽으로" 등의 슬로건을 내걸며 'Y·S 시스템'을 추구한다.


작가가 의도한 구도는 명백할 것이다. 한쪽에는 '선택받은 자', 근대 테크놀로지, 진보 이데올로기가 있으며, 그것은 차별과 억압의 원리를 이룬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잔류자, 생태주의적인 소프트 에너지 패스(soft energy path), 진보 이데올로기로부터의 '낙오자', 시게루의 공장이나 가정으로 체현되는 평등과 우애의 원리가 있다.


『치료탑』은 잔류자인 릿짱과, 훨씬 연상인 사촌 오빠지만 치료탑 효과 덕분에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사쿠의 연애 이야기로 진행된다. 또 하나의 스토리는 귀환자들의 불로 효과에 대한 수수께끼 풀이이며, 치료탑의 존재는 작품의 클라이맥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밝혀진다.


아버지인 다카시에게 비판적인 사쿠는 오에의 작품에 단골로 등장하는 블레이크가 아닌 예이츠의 애독자이며, '선택받은 자'들 중에서는 이단적인 사상을 지닌 인물이다. 점차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게 되고, '선택받은 자'와 잔류자의 결혼을 금지하는 스타십 공사에 반역하여 생태주의적인 지하 조직의 원조를 받으며 도피행을 시작하게 된다. 다카시 백부는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우주로 진출했다. 그 행성이야말로 인류가 문명의 최종 단계에서 겨우 도달할 수 있었던 곳이었지. 다시 말해, 문화를 지키고 전수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진출해야만 했던 곳이기도 했어. 그곳을 '새로운 지구'라 이름 붙였지만, 다름 아닌 그 행성에 '치료탑'이 건설되어 있었던 거다. 만약 '신'이라는 개념을 채용한다면, 예전에 지구에 있던 종교의 '신'과는 다른, 또한 잔류자가 마지막으로 쟁취해 낸 '세계 종교'의 '신'과도 다른 무언가에 의해, 우주의 근본을 이루는 '신'의 의지가 작용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 같구나. ……하지만 아무리 오랜 시간을 들여 '신'이 준비한 것이라 해도, 인류 쪽에서 그것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지. '신'이 그 최후의 작품에 걸었던 염원을, 고통과 두려움을 견뎌내며 실현할 용기와 능력이 없다면 말이다."


다카시 백부가 말하는 이른바 "고통과 두려움을 견뎌내는" 것은 결과적으로 귀환자와 잔류자 사이에 권력적인 지배 관계를 구축하고 초인에 의한 계급 지배를 유지해야만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신의 '최후의 작품'으로서 '치료탑'을 선사받은 자란, 인류의 엘리트로서 식민단원의 지위를 획득하고 나아가 '치료탑'의 효과로 초인화된, 그렇게 이중으로 '선택받은 자'를 의미한다. '낙오자' 쪽은 대문자로 쓰인 최후의 작품이 완성되기 위한 낭비, 요컨대 쓰다 버린 파지 같은 것으로 간주된다.


스스로를 신의 '최후의 작품'이라 간주하고, 그 완성을 위해서는 지배와 억압과 폭력의 독마저도 들이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다카시에 맞서, 엘리트 내의 이견파인 아들 사쿠는 이렇게 반론한다. "저 역시 '치료탑'의 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원리가 어떤 것인지 채 확인되기도 전에, 즉 아버지 같은 과학 행정가조차 '신'의 수정 작업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단계에서 '치료탑'의 효과를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치료탑'으로 육체 개조를 받은 자들이 지구에 남아 계속 살아온 사람들을 지배하는 위치에 서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치료탑'으로 육체 개조를 받은 인간은, 지구의 환난 속에서 상처입어 온 사람들을 위해 봉사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상과 같이 『치료탑』은 도스토옙스키적인 사고실험을 SF의 틀 속에서 추구하려는 클라크적인, 혹은 고마쓰적인 방법을 답습한 작품이다. 그러나 굳이 SF적인 설정 안에서 전형화된 질문, 즉 우애의 이념하에 종적인 쇠망의 길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차별과 억압의 "고통과 두려움을 견뎌"내면서라도 '신으로 가는 긴 길'(고마쓰 사쿄 작품의 제목이다)을 택할 것인가 하는 양자택일에 대해 설득력 있는 해답이 제시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낙오자'인 릿짱의 태내에서 숨 쉬기 시작한 '선택받은 자' 사쿠의 아이의 존재를 통해 양자의 화해가 암시되어 있을 뿐이다.


또 하나, 『치료탑』에는 큰 문제점이 남아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 '진화할 수 있는 자=선택받은 자'와 '진화할 수 없는 자=낙오자'의 대립을 둘러싼 주제는 신을 둘러싼 핵심적인 주제에서 이차적으로 산출되는 것인데, 『치료탑』은 여전히 치료탑의 제작자에 얽힌 난제에는 직면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신작 『치료탑 행성』에서는 클라크적이거나 고마쓰적인 주제의 핵심부가 마침내 정면으로 다루어지기에 이른다. 진화란 무엇인가, '신으로 가는 긴 길'이란 무엇인가. 신이나 진화란 말하자면 SF적으로 전형화된 것이며, 평범한 말로 고치자면 그것은 초월성과 인간을 둘러싼 질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치료탑 행성』에서 밝혀지는 것은 인류가 수수께끼 같은 초절적인 의지에 의해 '새로운 지구' 너머의 우주로 나아갈 길을 차단당했다는 사태인 것이다. "그 우리를 초월한 것은 바로 그 말 그대로의 존재여서, 인류로서는 엿볼 수조차 없는 레벨의 존재 형태를 취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라고 등장인물 중 한 명이 술회하듯, '우주적 배리어'의 구축자는 신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존재이며, 나아가 인류에게 남겨진 치료탑은 '구약의 현현'에 유비되기도 한다.


치료탑을 재조사하기 위해 다시 '새로운 지구'로 파견된 사쿠는, '반란군'의 삼바르 사령관에게 시사를 받아 다음과 같은 통찰에 도달한다. '반란군'이란 치료탑 효과를 거부하고, 게다가 '새로운 지구'에 남아 식민 활동을 지속하기로 선택한 사람들이다.


"'치료탑'은 하나의 텍스트다. 인류 쪽의, 즉 이쪽 우주에는 이 기호를 만든 자가 없다. 저자는 부재한다. 인류가 이 행성에 도달할 때까지 엠피레오 고원에 인류에 해당하는 존재가 실재했다는 흔적은 없다. 즉 단적인 수신자의 부재. 이 기호가 어떠한 지시 대상을 지닌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또한 어떤 콘텍스트에 놓인 것인지 이 행성에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해독을 위한 코드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호학의 고전 이론에 입각하여 말할 수 있다. '치료탑'은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사쿠는 인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의지를, 비교(秘教)적인 고행을 연상시키는 인체 실험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내면화하고, 그것을 다시 소년으로 성장한 아들에게 전수한 뒤 목성 궤도상에서 소식을 끊는다. 테크놀로지와 렉튀르(lecture)가 비교적인 이니시에이션 속에서 통합된다. "그때 마침내 '치료탑'의 콘텍스트와 코드는 이쪽 인류의 것이 될 터이다. 이미 반세기 전부터 인류는 '새로운 지구'를 넘어, 나아가 그곳에 상정된 배리어 너머의 우리가 편의상 저쪽 우주라 부르는 공간역을 초월한, 5억 광년 저편 카시오페이아로부터의 소리=파동과, 인류 태아의, 30억 년 전부터 바다로 이어져 온 리듬=율동을 맺어주는 가칭 '우주적 공통 감각'이라 불리는 것을 갖추고 있다고 여겨지지 않았던가?"


억압을 수반하는 종적인 '진화'냐, 우애에 순교하는 '쇠망'이냐 하는 SF적으로 극단화된 난문을, 작가는 헤겔적인 안으로 닫히는 '신'에서 키르케고르적인, 혹은 오에에 입각해 말하자면 예이츠적인 밖에 있는 '신' 쪽으로 전도(顛倒)시킴으로써 간신히 빠져나가려 하는 듯하다. 안으로 닫히는 신이란 동시에 '최후=종언'이라는 관념 그 자체이기도 하다. 『치료탑 행성』에 이르러서야, '최후의 작품'을 둘러싼 작가의 자문은 마침내 하나의 해답을, 혹은 그 방향성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노아 아즈사는 신예 SF 작가로서는 희유하게도 웰스의 문명 비평 SF에서 유래하는 고마쓰 사쿄적인 방향을 지속적으로 추구해 온 작가이다. 『바벨의 향기』는 노아의 오랜 모색의 결과물이며, 어떤 선을 넘어선 달성으로서 평가할 수 있는 작품일 것이다.


『바벨의 향기』의 배경은 소련과 중국이 분열하여 힘을 잃고, 일본, 미국, 그리고 하노이 연방이 3대 강국으로서 지구 및 달 식민지에 군림하고 있는 미래 세계다. 달 표면에 파견된 일본군은 황도파의 영향력 아래 있으며, 중앙의 통제파와는 대립하고 있다. 여주인공인 아네가와 고히는 과거 달 표면과 우주 공간에서 활약했던 일본 정부의 비밀 요원이었고, 그 후에는 학술 연구 기지인 위성 식민지 <마호로바>에서 영적 컴퓨터 를 연구하던 초능력자인데, 어느 날 일본 열도 상공에서 기이한 사기(邪気)가 폭발하는 것을 목격하고 그것이 '국체(国体)'의 위기임을 직관한다. 이변을 알게 된 일본 정부와 신궁사청은 당황하고, 천황의 뜻에 따라 아네가와를 일본에 닥친 영적 위기의 대책부장이자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으로 임명하려 한다. 정이대장군 하사는 사양하지만, 그럼에도 아네가와는 일본 정부의 전권을 위임받아 영적 이변의 중심지 '이히카(井光)'에 연하의 친구인 하야시 조지와 단둘이 뛰어들게 된다. 작품의 분위기는 이상의 요약만으로도 어느 정도까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달 표면은 만주, 달 파견군은 관동군이며, 초현대적인 테크놀로지에 지배되는 미래 세계에 전쟁 전의 천황제 국가가 다양한 천황주의 사상을 동반한 채 부활해 있다는 설정이다. 소녀 만화적인 캐릭터, 열강들의 19세기적 모략과 포함 외교, 전쟁 전의 상하이를 연상시키는 달 식민 도시의 난숙함과 부패, SF적인 하이 테크놀로지와 천황주의적인 복고 사상, 그리고 천황제와 복종하지 않는 백성 간의, 한무라 료적이기도 하고 아미노 요시히코적이기도 한 상극(相剋)의 주제. 『나는 가구야 공주』나 『커뮤니케이션 부전 증후군』을 평할 때도 언급했지만, 최근 소녀 만화나 소녀 소설의 세계에서는 미소년 애호 테마가 성대하게 유행하고 있다. 『바벨의 향기』에는 미소년 애호에 끌리는 소녀 독자의 존재를 남성 작가가 아예 작품 내부로 끌어들여 재현해 내는 중층적인 도착(倒錯)이 방법론화되어 있기도 하다. 『바벨의 향기』에서는 그러한 다양한 요소의 혼탁함이 의고전적(擬古典的)인 미문조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이히카시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라라기>라는 비밀결사이며, 그 리더인 토 아케보노는 일본 최대의 초능력자인 아네가와를 압도하는 강대한 사이킥이다. 그리고 아네가와와 토 가문의 대결을 통해 판명되는 것은, 일본 문화 혹은 천황제의 핵심적인 비밀이다. <아라라기>는 이히카라는 낙인찍힌 대지에 유폐된 사악한 영력이다. 그 정체에 대해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단어의 올바른 의미에서 자기/비자기 같은 것은 생체 내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디오타입(idiotype)이란 항체의 일부분을 이루는 항원 그 자체입니다. 그것을 <내부 이미지>라고 부릅니다만, 외부와 고스란히 조응하는 이 내면의 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존재가 생체에는 있으며, 그 끊임없는 긴장 관계야말로 한때 정적으로 그려졌던 면역계라는 기구의 실상인 것입니다. 아라라기는 국가라는 면역계에 있어서 바로 그 <내부 이미지>에 다름 아닙니다. ……아라라기――내면의 외부. 내면의 적. 내면의 타계. 그것은 일본이라는 나라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성립으로서 눈에 보이는 국가 형태를 표현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적 차원에서의 요청에 부응하여 형성된 방위 기구의 한 형태인 것입니다."


인도유럽어적 의미에서의 주어가 결여된, 중심 없는 일본어 체계, 그리고 일본 문화. 작가는 그것을 적과 아군, 내부와 외부의 상호 전화(轉化) 이론인 현대적 면역 이론과 결부시킨다. 그리고 일본에 강제된 서구화와 근대화가 '너의 너'인 일본적 주체성이나 '외부와 고스란히 조응하는 이 내면의 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존재'를 억압하고 무의식화했다. 그것이 천황제에 사활을 건 대결을 신청하는 사령(邪霊) <아라라기>의 정체인 것이다.


작품의 설정에 따르면, 아네가와가 <아라라기>와 대결하며 그 정체를 밝혀내는 과정은 동시에 달 표면에서 진행되는 세계 위기의 과정과 평행을 이룬다. "오프 월드는 그의 왕국이 될 것이다. 그의 반 쑤언(만춘)이라는 이름은 고대 베트남의 독립 왕국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펜타코스 11H, 그 이름을 내건 수용소 국가가 탄생할 것까지는 예상하고 있다." 헤겔-마르크스주의적 관념 권력의 SF적 형태는 작중에서 하노이 연방으로 그려진다. 하노이 연방은 우주적 수용소 국가를 구축하고자 마침내 달 침략을 개시하는 것이다. 『치료탑』 연작의 다카시 삼촌이나 '선택받은 자'와, 『바벨의 향기』의 하노이 연방을 그 헤겔주의적인 '최후=종언'의 이념 면에서 대응시킬 수 있다.


그러나 SF적 구상의 자장에 놓인 오에와 노아의 결론은 크게 다르다. 블레이크나 예이츠로 상징되는 기독교 신비주의와, 라캉 이론이나 새로운 면역학의 지견 등 포스트모던한 방향으로 재해석된 일본적 신비주의. 둘 다 헤겔적인, 내면으로 닫히는 신을 부인하려 시도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방향성은 대극적이기까지 하다.


나는 오에 겐자부로가 지시하는 방향에도, 노아 아즈사의 그것에도 이해는 되지만 위화감을 느끼고 마는 부분이 있다. 오에의 SF적 상상력은 아직 클라크를 철저히 파고든 고마쓰 사쿄의 '잔혹함'을 무화(無化)할 수 있는 지점에는 도달하지 못한 듯한 느낌이 든다. 그뿐만이 아니다. 헤겔적인 내부의 신은 관념의 억압 체계로 귀결될 수밖에 없지만, 그 '최후=종언'의 이념을 분쇄할 외부의 신이 내부의 신보다 인간에게 친화적일 것이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노아의 경우에는 "이것은 고대의 정복 왕조에 있었던 지배/피지배 관계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생각합니다만, 어쨌든 신분의 상하 구조 속에서의 주체의 소실은, 즉 맡겨진 <나>는 자꾸만 상위의 <너>에게 착취적으로 흡수되는 것입니다"라고 타당하게 파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황제와 일본 문화에 관해서는 결론적으로 지나치게 긍정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헤겔주의적 구축은 이미 일본 문화에서 탈구축되어 있다는 부류의, 1980년대에 성대하게 유행했던 신형 일본주의와 그것은 어떻게 스스로를 구별해 낼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어찌 되었든 오에의 작품이나 노아의 작품은 외부를 둘러싼 귀중한 소설적 사유이며, 검토할 가치가 있는 보고서이기도 하다. 그러한 시도가 양자 모두 SF라는 형식 속에서 달성되었다는 사실에는 아마 무시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음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