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복 소녀들의 선택 완전판 After 30 Years』 머리말
새로운 『교복 소녀들의 선택』을 위하여
"네가 할 말은 아니지" "그렇기 때문에 말한다" ――
아이러니와 파레시아 사이에서
다시 읽어보니, 그녀들을 부추기지 않으려고 무척 조심하며 썼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계기로 언론에 불이 붙었고, 결과적으로 부추기는 꼴이 되었다. "무슨 소리냐. 상처받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본문에 있듯 확실히 그 점은 내가 틀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상처받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원조교제나 매춘을 부추기는 것은 같지 않다. 당시의 내가 누구를 향해 (누구를 향하지 않고) 무엇을 말했는지 (무엇을 말하지 않았는지) 직접 확인해 주시길 바란다.
어찌 되었든 중요한 것은, 내가 틀렸을지언정 그녀들이 틀렸다는(매춘이 가져오는 불행을 분간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내가 되돌아보고 어떻게 느끼든, 그녀들의 인생은 그녀들 자신의 것이다. 당사자도 아닌 자들이 안심하기 위해 소비하는 '어리석은 여자들의 말로' 따위의 이야기는 악취미다. 뒤에 적겠지만, 지금의 '파파카츠(스폰서 알바)'의 확산은 연령대나 규모 면에서 원조교제 전성기를 능가하며, 이제는 그것을 하지 않는 자들이 대다수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원조교제가 매춘을 주변적으로 포함하는 것('좋은 사람이라면 진도를 나가도...')에서 중심적으로 포함하는 것으로 바뀐 것은, 내가 '전능계'라 부르는 원조교제 1세대에서 '자해계'라 부르는 2세대로의 이행(96년)과 병행한다. '원교(援交)'라고 줄여 부른 것은 2세대부터이며, 매춘을 중심적으로 포함하는 것을 가리켰다. 3세대는 종량제 휴대전화 요금이 부족해 임시로 원조교제를 하는 '지갑계'가 되고, 순수한 금전 목적의 연결이자 가난하기 때문에 상습적으로 원조교제를 하는 '빈곤계'인 4세대가 된다. 한편 파파카츠는 다른 경위로 확산된다.
2010년부터 SNS의 보급을 배경으로 업자 파파카츠(회원제 교제 클럽)가 증식했다. 남자는 소득 증명서를 낼 수 있는 부자. 여자도 신원 증명서를 냈다. 남자 입장에서는 질이 좋아 보이는, 소속사에 속해 있으나 뜨지 못한 연예인 지망생이나 뮤지션 지망생, 극단원, 대학원생……. 하지만 2016년에 전환기가 찾아온다. 결혼식에서 매칭 앱을 통한 만남을 숨기지 않게 된 것이다. 이유는 이용자 증가. 그것이 업자를 거치지 않는 직거래를 확산시켰다. 업자에 의한 참가 자격 제한이나 회원의 행동 감시를 꺼리게 된 것이다.
그 무렵부터 직거래 파파카츠의 무대였던 매칭 앱이 모두 연령 확인을 동반하게 되었지만, 상호 팔로우가 없으면 DM을 할 수 없었던 구 트위터 'X'가, 2010년대 말의 사양 변경으로 일방적 팔로우조차 필요 없이 DM이 가능해지자, 앱의 연령 확인을 통과하지 못하는 중고생들이 지명 해시태그를 넣어 홋카이도에서 오키나와까지 파파카츠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식사만 하고 5천 엔'이 입구이지만, 매일이 시시하고 성적 호기심이 강한 아이들은 이내 '좋은 사람이라면…' 하고 진도를 나가는 경향을 보였다.
이 같은 전개는 이 책을 썼을 시점에 구조적 이유로 이미 예측한 바이므로 놀랍지 않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내가 쓴 글이 계기가 되어 많은 사람이 원조교제를 하게 된 사실이다. 내가 쓴 책을 읽고 30년 전에 원조교제를 했던 1세대는 지금 40대 후반이다. 영상이나 음악 등 표현 관련 일을 하는 사람이 많다고 느끼지만, 공무원이나 회사원, 전업주부도 있다. 신세를 망친 사람이 비록 적다 하더라도, 세계선이 바뀌어 원만하게 살아가지 못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녀들은 상처받고 있다"고 썼다 한들, 원조교제의 '발견'이 가져온 사람들의 놀라움과, 그로 인한 언론의 축제, 그리고 TV에서 전능감을 뽐내는 그녀들의 모습이 사태를 폭발적으로 진전시키는 것을 바꾸지는 못했을 것이며, 어차피 누군가가 '발견'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글을 씀으로써 그 글이 없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행위로 간접적으로나마 타인을 이끄는 것은 무거운 일이다. 그래서 우에노 치즈코, 스즈키 스즈미 두 사람과의 정담에서 "책임을 지겠다"고 한 발언은 진심이다.
그것은 이렇게 책을 많이 쓰고, 전국 각지에서 강연을 하고, 신문과 라디오, 인터넷 방송에 등장하며, 대학 정년퇴임 후에 미야다이 3숙(사상숙, 황야숙, 계외숙)까지 만들어 "가치를 전하고자" 하는 이유, 즉 동기 부여와 관련이 있다. "이제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잠자코 있어라"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러면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다. 94년 단행본 출간 이후의 원조교제나 파파카츠의 역사를 실제로 나보다 자세히 말할 수 있는 자는 없다. 그렇다면 계속 말할 수밖에 없다.
파파카츠 여성들과 이야기해 보면, 친구들끼리 예전만큼 친하지 않아서 30년 전보다 정보 회로가 격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생면부지의 타인에 대한 대우가 열화된 지금이야말로 전해야 할 것들이 많은데도 말이다. 94년 단행본의 주제는 "동기 부여를 손보지 않으면 무엇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기 부여와 그 전제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전할 필요가 있다. 전달받은 사람은 불행한 체험을 해도 "그런 동기였으니까 전해 들은 대로의 일이 일어났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인간은 인지적 정합화의 동물이다. 동기가 강하면 인지가 왜곡되어 위험을 그냥 넘겨버린다. 불행을 겪어도 "운이 나빴다. 더 잘하면 다음엔 성공할 거야"라고 생각하며, '운을 만회하기 위해' 더욱 큰 불행으로 매진한다. 앱이든 구 트위터 'X'든 매칭을 통한 만남은 파파카츠로 어긋나기 쉽고, '식사 파파카츠'는 '좋은 사람이라면 진도를 나가도...'를 매개로 '성교 파파카츠'로 어긋나기 쉽다. 파파카츠의 확산은 이미 상상을 초월하며, 수많은 여성이 성애의 로망을 산산조각 내어 왔다.
그런 의미에서는 94년 당시부터 이미 주체이기는 어려웠다. 그렇다면 '주체가 선택한다'는 도식도 어렵다. '정상'이라면 그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정상'이 아니게 되었는데 "사실은 그것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게 아니냐"고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정상'이 아니면 선택을 그르치는 사회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선택 능력을 갖춘 '정상'적인 주체이기를 요구하는 사회는 살기 힘들다. 그래서는 많은 사람이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다.
『「전 원교 소녀」 좌담회(참조)』를 읽어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머리가 좋은 그녀들은 자신의 체험을 언어화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소수다. 언어화하지 않기 때문에 주변에 알려지지 않을 뿐, 그녀들 같은 체험을 한 사람은 많았다. 있는데도 없는 것으로 치부되었다. 그래서 여러 현상이 새롭게 생겨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비슷해도 다른 현상이 생겼는데 같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미야다이 시스템 이론의 십팔번이지만, 눈에 보이는 '행위'보다 보이지 않는 '체험'에 주목해야 하는 까닭이다.
매일이 시시해서 호기심을 핑계로 파파카츠나 원조교제에 '나선다'고 할 때, 대부분의 '행위'는 예기한 '체험'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미야다이 예기(予期) 이론의 기본 명제다. 그러한 기대 어긋남은 당시보다 지금이 더 빈번하다. 이유는 젊은이들이 예전만큼 친하지 않아서 지혜의 공유가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재귀적 의식을 갖기 어려운 만큼, 기대 어긋남에 직면하기 쉬워졌다. 이것을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다.
지금은 도처에 이 책의 단행본을 출간했던 94년 당시에는 없었던 새로운 문제도 있다. '새롭다'는 것은 새롭게 일어난 문제일 뿐만 아니라,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문제를 포함한다. 여전히 이 책을 칭찬해 주시는 분들이 계시는 것은 기쁘지만, 이 책을 계기로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하는 사람이나 새롭게 조사 연구에 나서는 사람이 나타나 준다면 더욱 기쁠 것이다. 처음에 말했듯, 누구에게 무엇을 말하느냐가 중요하다. 반복되지만, 마지막으로 젊은이들에게 내가 우려하고 있는 바를 강조하고 싶다.
트위터의 사양 변경으로, 연령 확인 없는 DM을 사용해 중고생들이 파파카츠를 시작하면서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저변이 넓어진 현재, 그러나 30년 전의 원조교제와 달리 친구들 사이의 지혜 공유는 없으며, 그곳에서 어떤 기대 어긋남이 발생하고 성애의 욕망의 수준 저하가 일어나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무섭게 느껴진다. 그런데도 원조교제와 공통되는 동기 ―― 매일의 시시함이나, 그로 인해 억누르기 힘든 성적 호기심이나, 거기서 체험한 불행을 다음에는 해소하고 싶다는 마음 ―― 는 변함없고, 앞으로도 진입자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파파카츠의 확산에 비하면, 오오쿠보 공원 주변의 '빈곤 여성의 호객 행위(타친보)' 따위를 보고 "파파카츠의 원인은 빈곤이니까 빈곤 퇴치!"라며 주먹을 쥐는 것은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짓이다. 그 '빈곤'은 비싼 월세라도 셋집의 질을 낮추고 싶지 않은 부류가 적지 않아,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과는 다르다. 한편, 과거의 매매춘에 비해 격렬한 물상화(物格化)를 체험하며 존엄성이 상처받고, 성애의 꿈과 소망을 잃기 십상이 되었다. 그러한 로망의 산산조각을 전제로, '빈곤'을 이유로 한 매춘이 확산된 것이다. 이러한 '체험을 축으로 한 생태계'의 전체와 천이를 이해해 준다면, 이 책의 완전판을 출간한 보람이 있을 것이다.
『교복 소녀들의 선택』은 94년의 단행본에서 2004년의 문고 증보판(『교복 소녀들의 선택 After 10 Years』)을 거쳐, 이번 2025년의 대폭 증보판 『교복 소녀들의 선택 완전판 After 30 Years』에 이른다. 대담, 정담, 해설의 재수록을 허락해 주신 우에노 치즈코 씨, 스즈키 스즈미 씨, 나카모리 아키오 씨, 엔다 코지 씨에게 감사드린다. 이 책의 단행본을 읽고 원조교제에 나섰던 스즈키 스즈미 씨가 새롭게 해설을 써 주셨다. 뜻밖의 행운이다.
과거 나와 같은 헌팅꾼(난파사)이었고, 원조교제와 파파카츠의 변천을 상세히 알고 계시며, 후타무라 히토시 씨와의 공저 『어떻게 하면 서로 사랑할 수 있을까』의 편집을 담당해 주신 스즈키 야스나리 씨(KK베스트셀러스 사장)가, 파파카츠가 만연한 지금이야말로 내용을 더 증보한 『교복 소녀들의 선택 완전판 After 30 Years』를 내는 것에 공공성이 있다며 나를 설득했고, 20년 지기인 편집자 카와무라 신 씨를 데려오셨다. 두 분이 없었다면 이 책 완전판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감사드린다.
2025년 1월 21일 미야다이 신지
『교복 소녀들의 선택』 1994년 단행본판 머리말
우리는 무엇이 '문제'인지를 발견하는 것부터 시작해야만 하는 것 같다
" '문제'가 어디 있는지 알게 되면 처방전을 쓰는 것은 비교적 쉽다"고 미야다이는 말해왔다. "A라면 B"라는 조건문으로 착오를 회피하기 위한 처방전을 쓰는 것은, 그러나 문제의 해결은 아니다. 문제의 '회피'와 '해결'을 혼동하면 오히려 문제는 남고 만다.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모르는 게 약'인 시대
1994년 8월 18일, 각 신문 사회면을 『"텔레클럽" "투샷"에 전화, 중2·3 여학생의 27%』(닛케이신문), 『요즘 여중생… 텔레클럽 4명 중 1명 "경험 있음"』(요미우리신문), 『중학생까지 텔레클럽 체험, 실제로는 더 많을 수도?』(아사히신문) 같은 헤드라인이 장식했다. 일본 PTA 전국협의회(아베 오사무 회장, 회원 1300만 명)가 17일에 정리한 '어린이의 생활 의식·실태 조사'에서 여중생의 텔레클럽 경험의 일면이 밝혀진 것이다.
이 조사는 47개 도도부현과 각 정령지정도시에서 공립 중학교를 각 1개교씩 추출, 2~3학년에서 다시 1개 반을 선정하여 담임 교사의 협조를 얻어 학생과 그 학부모를 대상으로 94년 6월에 무기명으로 실시되었다. 대상자 수는 학생·학부모 모두 3600명. 회수율은 학생 33.7%(1124명), 학부모 32.0%(1152명)이다.
그에 따르면, 중학교 2~3학년 여학생의 27.4%가 텔레클럽이나 투샷 다이얼에 전화를 건 경험이 있으며, 중학교 3학년만 따지면 100명 중 1명이 부르세라 숍에 출입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조사 항목에는 음주 경험, 흡연 경험, 유해 물질 경험, 절도 경험 등도 들어 있지만, 각 신문 모두 텔레클럽 경험과 부르세라 경험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반향의 소재를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도쿄도 등 유흥가를 낀 도시부의 학교에서 협조해주지 않은 곳이 많아, 텔레클럽이나 유해 물질 등을 체험한 학생의 실제 비율은 조사 결과보다 훨씬 높을 것으로 보인다"(아사히신문)고 되어 있다는 점이다. 내 자신의 수많은 취재 경험으로 비추어 보아도, 실태가 이를 훨씬 웃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93년 단계에서 내가 추적했던 '도내'의 어느 여고에서는, 반에서 10명의 여자아이가 부르세라 숍에 팬티를 팔았고, 텔레클럽이나 투샷은 대부분의 학생이 이용한 경험이 있었다. 또한 94년 청취 조사에서는 다마 지역에 있는 여고 2학년의 약 20%가 "텔레클럽이나 투샷에서 아르바이트를 한·하고 있는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도쿄 도내를 대상으로 하는 전언 다이얼 중에는 메시지의 9할이 여중고생으로 채워져 있고, 그 절반 이상이 매춘을 지망하는 곳도 있다. 도시부나 그 주변에서는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지만, 이러한 데이터를 애써 강연 등에서 발표해도 믿어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에 이번 데이터 공표는 솔직히 말해 반갑다.
그런데 그러한 내 조사 경험에서 말하자면, 왜 '비협조 학교'가 나오는지 잘 알 수 있다. 물론 '긁어 부스럼 만들고 싶지 않다'는 옛날식 이유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실태를 알고 싶지 않다'는 것이 학교 측의 '속내'일 것이다. 나는 현재 중학교나 고등학교의 보건 교사를 취재하고 있는데, 교사에 따라서는 교내에서 부르세라 알바나 텔레클럽 알바를 하는 아이들의 실제 수를 파악하고 있거나, 교사와 학생의 성관계를 파악하고 있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학생들 사이에서 일어난 강간 사건을 파악하고 있기도 하지만, 대개 그 실태는 다른 교사들에게 이야기되지 않는다. 그런 짓을 해봤자 결국 아무런 손을 쓸 수도 없을뿐더러, 실태가 밝혀짐으로써 교실에서의 교사와 학생의 관계를 지탱하는 마지막 명분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오히려 두려워하는 것이다.
선생님에 따라서는 분명하게 속내를 털어놓기도 한다. 예를 들어, 과거의 교내 폭력처럼 학생들의 '불량함'이 노골적으로 눈에 띄던 시대는 80년대 전반으로 끝났고, 그 이후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음습한 이지메의 시대가 되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교사와 학생의 대립 시대는 끝났고, 학생의 폭력을 두려워하며 위염에 걸리거나 백발이 되는 상태에서 교사는 해방되었다. 이지메는 확실히 있을지도 모르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한은 대처를 강요받을 일도 없다. "솔직히 말해, 문제가 보이지 않게 되어 다행이다" ―― 그러한 속내를 나는 몇 번이나 이끌어낸 바 있다.
예를 들어, 예전처럼 불량학생들이 노골적으로 '불순 이성 교제'를 하는 시대는 끝나고, 반의 몇 할, 학년의 몇 할이나 되는 여자아이들이 부르세라 알바나 텔레클럽 알바를 '숨어서' 하는 시대가 되었다. 성적 우수자를 포함한 여러 명의 학생이 '놀이 삼아' 한 명의 교사와 사귀고, 학년에서 성적이 1등인 남학생이 교내 집단 강간에 '솔선해서' 참여하는 시대가 되었다(모두 내가 직접 들은 실화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러한 사실을 모른 채 지낼 수 있다면, 학교 측·교원 측에서 어떠한 부담도 지지 않고 넘어갈 수 있다.
"설령 이지메가 있어도 모른 채 지낼 수 있다면 그 편이 낫다"는 속내는, "설령 부르세라 여고생이 있어도" "설령 교사와 학생의 섹스가 있어도" "설령 교내 강간이 있어도"와 같은 식으로, 이미 수많은 변형으로 전개된 상태다. 그리고 이제 이런 종류의 작법이 교실 안뿐만 아니라 가정에도 도입되고 있는 것이다.
눈에는 눈을, 명분(다테마에)에는 명분을
그러한 상황을 알고 있기에 실제로 내가 놀란 것은, 텔레클럽 경험자가 몇 퍼센트라는 수치가 아니라, 이러한 항목을 포함한 조사가 실시되고 데이터가 정직하게 공표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몇 년 전이라면 이러한 질문 항목은 기획 단계에서 소멸해 버렸거나, 설령 데이터가 수집되었다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언론을 향해 공공연하게 발표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거기에는 분명히 1년 전의 '부르세라 소동'을 계기로 한, 일종의 '면역화'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작년(93년) 8월 11일의 닛케이신문이 보도한 '부르세라 숍 적발·부르세라 여고생 보도'를 계기로 나 자신도 같은 해 9월 아사히신문 문화면에서 이른바 '부르세라 논쟁'에 관여하게 되었고, '대학교수'라는 '직함의 무게' 효과도 더해져 오늘에 이르기까지 약 1년간 각지의 PTA·청소년 지구대책위원·여성센터·지자체 청소년부 등에서 수많은 강연 의뢰를 맡아 왔다. 부르세라 여고생의 문제를 세상에 처음 알린 것은 내 지인이기도 한 프리랜서 작가 후지이 요시키이지만, '직함의 무게'가 없는 그에게는 이런 류의 공적 기관에서 강연 의뢰가 오지 않는다는 점이 오히려 문제의 본질을 더 잘 보여준다.
강연을 다니면서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은 사실 표면적인 것이고, "개인적으로는 그런 일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겉으로 드러내 화제로 삼을 수는 없었다"고 귀띔해 주는 부모나 교사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즉, 현실이 보이는데도 보이지 않는 척하는 '벌거벗은 임금님'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고, 누군가가 "임금님은 벌거벗었다"고 말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정직한 아이'가 "임금님은 벌거벗었다"고 외치는 것만으로는 안 되는 모양인지, '직함의 무게'가 있어야만 한다. 물론 "대학교수가 훌륭하다" 따위의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는다. 단지, 명분이 뒤집히기 위해서는 다른 명분이 필요했을 뿐이다.
이 사실은 부르세라 문제에 관여하기 전부터 나에게는 '예측된' 것이었다. 후지이 요시키가 이것저것 해주고 있는데, 왜 내가 나설 필요가 있는가. 그것은 "눈에는 눈을, 명분에는 명분을" 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사히신문』의 '부르세라 논쟁'의 계기가 될 논설의 게재를 둘러싸고, "이런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내용은 실을 수 없다"는 아사히신문 측과 몇 시간이나 싸우듯 실랑이를 벌인 끝에, "아사히가 아니어도 괜찮지 않냐"는 데스크에게 "아사히가 아니면 싣는 의미가 없다"고 물고 늘어졌다. 물론 아무도 "아사히가 훌륭하다" 따위의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단지 '아사히라는 명분'이 필요했을 뿐이다. 나는 정치적으로 행동한 것이다.
어쨌든, 앞서 소개한 데이터의 공표는 문제가 새로운 단계에 돌입했음을 의미한다. "불량학생이 아닌 부르세라 여고생" "어디에나 있는 텔레클럽 여중생"이라는 관념은 단순히 인구에 회자되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적어도 일반론의 수준에서는" 누구나 공공연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론의 수준에서' 말할 수 있을 뿐이며, 구체적으로 내 딸이나 학교의 학생이 부르세라 여고생, 텔레클럽 여중생이라는 전제로 말할 수 있게는 안타깝게도 되지 않았다. 그것은 구체적인 정보가 결여되어 있는 것도 있지만, 그러한 전제로 말하기 위해 불가결한 '작법'이 아직 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작법'인가.
부모나 교사는 나쁘지 않다
실제로 강연을 다니면 아무래도 신경 쓰이는 반응이 있다. 그것은 '부르세라 숍'이나 '텔레클럽', '데이트 클럽'을 악당으로 만들어, "이런 게 있으니까 안 되는 거다"라고 하는 것이다. 혹은 "팬티나 블루머를 사는 남자가 있으니까 안 되는 거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심정은 십분 이해하며, 일반론으로는 확실히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러한 '합법적인 장소'나 '합법적인 행동'이 좋고 나쁜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그야말로 '방귀 뀐 놈이 성내는 격'도 안 된다.
확실히 부르세라 숍이 없다면 당신의 딸은 팬티를 팔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자리가 주어지면 언제든지 팬티를 팔 만한 딸과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르세라 숍이 있든 없든 변하지 않는다. 확실히 데이트 클럽이 없다면 당신의 딸은 매춘(혹은 돈을 받고 펠라치오)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자리가 주어지면 언제든지 매춘(유사 성행위)을 할 만한 딸과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은, 데이트 클럽이 있든 없든 변하지 않는다.
연장자 독자에게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자면, 확실히 텔레클럽만 없었다면 당신의 아내는 생면부지의 남자를 상대로 불륜을 저지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기회가 주어지면 언제든지 불륜을 저지를 만한 아내와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은, 텔레클럽이 있든 없든 변하지 않는다.
조금 전, 일반론으로는 말할 수 없는 구체성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런 사실, 즉 부르세라 숍이나 텔레클럽의 존재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서두에 소개한 데이터에 입각해서 말하자면, 텔레클럽이나 투샷과 같은 장소가 있었기에, 자신이 교실에서 가르치고 있는 중학생 3~4명 중 1명은 낯선 중년 남자와 전화로 희희낙락하며 수다를 떨 만한 학생들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 아닌가. 부모나 교사의 교육력, 나아가 애초에 사실을 인식하는 능력이 얼마나 쇠약해져 버렸는가 하는 사실을 겨우 들이밀 수 있었던 것 아닌가.
"그렇구나, 부모나 교사가 나빴던 것이구나" ―― 라고 섣불리 단정 짓지 말라. 본문을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가정이나 학교의 교육력이나 인식력이 저하되는 것은 사회 시스템 이론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일종의 필연이며, 요컨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강연에서 종종 "부모가 제대로 야단치지 않아서 그런 거군요?"라는 류의 질문을 받을 때가 있는데, 확실히 야단침으로써 유지할 수 있는 양호한 '부모다움'이라는 것은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야단맞음으로써 딸은 "부모님이 진심으로 걱정해 주시는구나"라고 느낄지도 모르고, 부모는 부모대로 "나는 제대로 하고 있다"는 자의식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야단맞은 여자아이는 '그럼에도' 혹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교묘하게' 팬티를 계속 판다. 그것을 사회 시스템 이론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결론짓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매춘 여고생을 수십 명 취재하면서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가정교육이 엄격한 부모를 둔 아이"라는 패턴과 적어도 비슷할 정도로 눈에 띈다는 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엄격한 부모'는 매춘 여고생을 낳는 것을 촉진하는 중요한 조건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그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텔레클럽, 고백 정보지, 레이디스 코믹, TV 보도, 입소문 등등, 이토록 많은 정보 채널이 열리고, 가정이나 학교나 지역 사회에서는 파악할 수 없는 커뮤니케이션 공간이 끝없이 넓어지면, 과거 아이들의 커뮤니케이션 공간이 학교·가정·지역이라는 공간에 한정되어 있던 시대에는 확실히 유효했을 터인 '부모나 교사의 엄격함'은, 오히려 부모나 교사를 단지 지나쳐야 할 물웅덩이 같은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실제로 효녀들은 "야단쳐 주시는 훌륭한 부모님"과의 "원만한 관계"를 무너뜨리고 싶지 않기 때문에, "부모님한테는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아. 불쌍하잖아"라고 말하면서 팬티나 육체(의 일부)를 계속 판다.
그래도 사회는 돌아간다
"부모가 나쁘다" "아니, 학교가 나쁘다" "뭐니 뭐니 해도 텔레클럽이나 부르세라 숍 같은 악덕 업자가 나쁘다" "아니, 애초에 돈벌이 지상주의를 만연시키는 소비 사회나 자본주의가 나쁘다" "여자를 사려고 하는 남자가 나쁘다"와 같은 커뮤니케이션을 사회 시스템 이론에서는 '외부 귀속화(外部帰属化)'라고 한다. 즉, 가장 낮은 비용으로 알기 쉬운 인과 귀속을 행하여, 본질적인 의미에서 자기 자신을 무해하고 안전한 장소에 온존시키는 '얄팍한 작법'이다.
이러한 작법은 어떠한 사회 시스템상의 실효성도 없지만, 시스템 이론은 반드시 이것을 무의미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인격 시스템(심리 시스템)에 준거하면 감정 정화(카타르시스)의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누구를 공격하면 될지 확실해져서 안심한다"는 것이다. 심리적인 감정 정화를 가능한 한 낮은 비용으로 공급하는 것은 사회적 요청(말하자면 '모두의 요청')이다. 그래서 이러한 '외부 귀속화'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사회에서 없어지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모두의 요청'에 부응하는 것이 사회 시스템이 문제없이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사회 시스템 이론의 가르침이다. "야단치면 된다"는 결론도 물론 이러한 '외부 귀속화'의 연장선상에서 나온다.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것이다. 예를 들어 "딸을 야단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 "가게에 화를 내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부모로서는 어쩔 수 없고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한 모습이다. 그래서 실제로 누가(예를 들어 내가) 뭐라고 하든, 야단치는 부모·화내는 부모는 반드시 일정 비율로 나오게 마련이고, 언론은 항상 성실하게 "야단쳐라" "화내라"고 선동해 주고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어쩔 수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러한 '부모로서 당연한 행동'은 자기들의 속을 후련하게 해줄 뿐, 문제 자체의 해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회적인 실효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문제를 '의도치 않게' 증폭시키게 된다 ―― 그렇게 경고를 발하고 다른 방식의 선택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탐색·제시하는 것이 사회 시스템 이론의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사회 시스템은 인격 시스템의 집합이 아니다. 심리적인 문제 해결은 사회적인 문제 해결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개인적인 올바름의 신념은 사회의 미래를 조금도 방향 짓지 못한다. "사회는 개인의 집합이 아니다" "사회의 움직임은 개인 움직임의 집합이 아니다"라는 이 명제는, 전후 50년 이상에 걸쳐 사회 시스템 이론이 다듬어 온, 혹은 과거 100년 이상에 걸쳐 사회학이 다듬어 온 가장 중요한 명제 중 하나이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이 있지만, 사회 시스템 이론은 말한다 ―― 부모의 체면이 서든 말든, 속이 후련하든 말든, "그래도 사회는 돌 것이고", 소녀들은 팬티나 육체(의 일부)를 계속 팔 것이라고.
가치 판단은 전달되지 않는다
"그래도 사회는 돌아간다". 하지만 어떻게? 그것을 밝히는 것이 사회 시스템 이론이며, 그것은 '문제'에 대해 어떠한 처방전이 '실효적'인지를 가르쳐 준다. 하지만 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우리는 애초에 팬티를 파는 것이 나쁜가, 육체(의 일부)를 파는 것이 나쁜가 하고 물을 수도 있다. 물론 여러 이치를 갖다 붙이며 "나쁘다"고 단정 짓는, 즉 '가치 판단'을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것이 어찌 되든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가치 판단은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팬티 팔기나 육체 팔기가 '나쁘다'는 것을 설령 '논증'해 보았자 '소용없는 짓'이다. 가정이나 학교에서 옛날 방식의 예절 교육을 해도, 엄격하게 키워도, 그래도 여자아이들은 팬티를 팔 것이다. 예전에 부모나 교사나 이웃 아주머니가 "이러이러한 것은 나쁘다"고 말했을 때 아이도 "이러이러한 것은 나쁘다"고 생각할 수 있었던 지금은 부모나 교사의 '가치 판단'은 전달되지 않고, 그저 그러한 가치 판단을 하고 있는 특수한 바닥이 있다는 '사실'만이 전해질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기묘하게도 우리는 무엇이 '문제'인지를 발견하는 것부터 시작해야만 하는 것 같다. 그것은 내게는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라 여겨지지만, 그럼에도 여태껏 무엇이 '문제'인지 논의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은 참으로 기상천외한 일이다.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조차 안 됐는데 처방전이고 뭐고 있을 리 없다. 교육 평론가나 소위 '식자'들은 말한다. 소녀들은 자기 자신을 상처입히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고. 언젠가는 후회할 것이라고. 하지만 그 '상처'라는 관념이야말로 이미 특수한 '가치 판단'의 산물에 불과하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시 한번 말하겠다. 상대방에게 마음대로 '상처'를 읽어내는 듯한 열혈한적인 열정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며, 오직 '문제'의 소재를 정중하게 탐색하는 심사숙고한 '분석'만이 우리에게, 그리고 '그녀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실은 그러한 '분석'을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문제'가 어디 있는지 알게 되면, 그 '문제'로 인해 데미지를 입지 않기 위한 처방전을 얻는 것은 비교적 쉬우며, 그것은 실제로 본문 전체를 통해 제시될 것이다.
즈그 나라 거품 터지고 부동산 장기 침체와서 ㅈ박은건데 뭔 구구절절 씨발 개소리가 많네
병신새끼가 소득 양극화에 30년 디플레 침체인데 당연히 보지 팔러 다니지
현지에서도 이 양반 욕 뒤지게 처먹는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