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추얼리티'의 시대

――순문학 논쟁에 나타난 히라노 겐(平野謙)――

기무라 마사키(木村政樹)

1. 문제의 소재

히라노 겐은 1961년, 『군조(群像)』 창간 15주년 기념호에 기고한 글에서 '순문학'이라는 개념은 역사적인 산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히라노의 문제 제기를 계기로 촉발된 것이 이른바 '순문학 논쟁'이다. 히라노는 논쟁 과정에서 기존의 '순문학' 개념을 대신하여, 문학사나 문예시평, 좌담회, 대담 등을 통해 '소설 액추얼리티(actuality)설'을 제시했다. 그 주장은 다양한 형태를 띠었으나, 그 기저에는 소설이 반드시 '액추얼(actual)'해야 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지금까지 이러한 히라노의 비평은 주로 그 사상적 맥락이나 문학사관을 중심으로 논의되어 왔다. 다만, 기존의 고찰에서 주목받지 못한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문예지라는 매체의 문제다. 히라노는 논쟁의 도화선이 된 글 중 하나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그 순문학 옹호라는 목표 자체가 현재 흔들리고 있다. 『군조』의 편집 방침이 최근 비유행 작가의 역작주의라는 일종의 보수적인 위치로 내몰린 듯 보이는 것도 그 징후 중 하나가 아닐까. 나는 이를 한 명의 방관자로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 그렇기에 『군조』 창간 15주년을 맞이하여, 그간의 공적은 공적대로 인정하되, 순문학이라는 개념이 역사적인 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자타가 모두 분명히 명심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여기에는 『군조』의 '목표'나 '편집 방침'이 위기 상황에 놓여 있다는 히라노의 인식이 드러나 있다. 또한, 히라노는 자신을 '방관자'가 아니라고 밝히며, '순문학' 개념의 역사성은 '자타가 모두' 공유하는 공통의 문제로 파악하고 있다. 당시 히라노는 각종 신문의 문예시평을 담당했을 뿐만 아니라, 『문학계(文學界)』에 「문학·쇼와 10년」을 연재하고 문고본과 전집의 해설을 집필하며, 『군조』와 『문학계』의 신인상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다방면에 걸쳐 언론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비평가로서의 이러한 입장에서 발신된 이 제언은 『군조』의 편집자, 특히 편집장인 오쿠보 후사오(大久保房男)를 향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순문학'이라는 단어는 『군조』의 '편집 후기'에서 '근본 방침'으로 천명된 바 있었다. 그렇다면 히라노의 의도는 '순문학'을 문제 삼음으로써 『군조』라는 문예지의 성격을 혁신해야 한다고 주창하는 데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같은 시기에 발표된 다음의 글을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현대 문학의 속물화에 대치하는 순문학의 옹호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새로운 문제들이 대두되고 있음 또한 분명하다. 『군조』가 지난 15년간 순문학 옹호를 위해 남긴 발자취가 큰 만큼, 나는 정통 문예지의 역할로서 향후 한 단계 더 탈피하고 도약하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히라노는 잡지 편집진이 표어로 삼았던 단어에 의문을 제기하며, '정통 문예지의 역할'로서 '탈피와 도약'을 기대했다. 그리고 히라노는 논쟁 과정에서 '액추얼리티'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이를 자신의 입장으로 삼았다. 후술하겠지만, 이 단어는 하나다 기요테루(花田清輝), 아베 코보(安部公房), 사사키 기이치(佐々木基一) 등 신일본문학회(新日本文学会)나 기록예술의 모임(記録芸術の会)에 소속된 작가들이 사용하던 핵심어였다. 이러한 히라노의 단어 선택 이면에는 문단 내에서 유통되는 어휘를 둘러싼 전략적인 판단이 작용하고 있었다.


본고에서는 순문학 논쟁에 나타난 히라노 겐의 비평을, '액추얼리티'라는 단어가 문예지에서 유통되던 역사적 맥락 속에 다시 위치시켜 논하고자 한다. 이는 동시에, 순문학 논쟁을 저명한 필자들의 논의 내용에만 국한하지 않고 매체적 현상으로 파악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하, 다음의 순서에 따라 고찰을 진행하고자 한다. 첫째, 순문학 논쟁으로 인해 발생한 언론 상황의 변화를 파악한다. 둘째, 히라노의 소설 액추얼리티설 제시에 나타난 입장 표명을 분석한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상황 속에서 히라노의 '액추얼리티' 개념이 지녔던 가능성을 논한다. 논점을 미리 밝히자면, 문예지 혁신과 관련된 히라노의 이러한 일련의 행위는 문학 및 예술 운동의 동향에 대응한 담론 전략으로 파악할 수 있다.


2. 확산되는 '액추얼리티'

――순문학 논쟁과 문예지――

'액추얼리티'를 둘러싼 논의는 순문학 논쟁을 계기로 문예지 지면을 통해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본 절에서는 먼저 히라노의 비평이 야기한, 논쟁에 수반된 언론 상황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고찰하고자 한다.


히라노가 소설 액추얼리티설을 주창하기 이전부터 '액추얼리티'라는 단어는 문예지에서 유통되고 있었다. 이 단어는 폴 로사(Paul Rotha)의 다큐멘터리론에서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950년대의 '기록'을 둘러싼 예술 운동에서 빈번하게 쓰였다. 하나다 기요테루는 「웃는 고양이(笑い猫)」에서 로사를 원용하며 "현실이 제기하는 생생한 문제"를 다룬 뒤, "액추얼리티의 창조적 극화"를 수행해야 한다고 서술한 바 있다. 신일본문학회가 간행하는 잡지 『신일본문학』에서는 1957년에 게재된 총 세 차례의 평론위원회 토론, 그리고 같은 해 10월에 개최된 제8회 대회부터의 신일본문학회 대회 보고에서 '액추얼리티', '액추얼' 등의 단어가 사용되며 집단 내에서 통용되는 개념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또한, 회원인 하나다, 아베 코보, 사사키 기이치 등이 참여하여 같은 해에 결성된 기록예술의 모임 사람들은 이론적으로 '액추얼리티'의 의의를 주창했다. 이처럼 '액추얼리티'라는 개념은 신일본문학회와 기록예술의 모임의 활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군조』는 예전부터 이러한 문학·예술 운동의 동향을 수용해 왔다. 오쿠보 후사오는 1955년 10월호부터 편집장을 맡았는데, 같은 해 11월호의 '편집 후기'에는 생활 기록이나 르포르타주 관련 논고를 게재한 사실과 함께 논쟁을 적극적으로 다루고 싶다는 의지가 표명되어 있다. 1956년에는 하나다와 오이 히로스케(大井廣介), 아라 마사히토(荒正人) 등의 논쟁이 스탈린 비판을 계기로 지면에서 벌어졌다. 그리고 1957년과 58년에는 하나다의 「대중의 에너지」(57년), 아베의 「영화예술론」, 사사키의 「현대 예술은 어떻게 될 것인가」(58년)의 1년간 연재에서 볼 수 있듯, '액추얼리티'를 논하는 평론이 적극적으로 게재되었다.


따라서 순문학 논쟁 이전에도 『군조』에서 '액추얼리티'를 둘러싼 논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존재했다. 그것은 이른바 '백야' 문제로 알려져 있다. 1958년 아베와 사사키의 연재에서 두 사람은 루키노 비스콘티의 영화 「백야」에 대해 정반대의 결론을 내리지만, 그것이 결국 논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던 사건이다. 이 사건에 대해 도바 고지(鳥羽耕史)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 이러한 의견 충돌이 이마무라 다이헤이(今村太平)와의 사이에서 일어났다면, 논쟁의 형식을 띠었을 것임이 거의 틀림없다. 즉, '공통의 언어'를 공유하는 내부인에 대해서는 비판을 피하고 무엇이든 서로 인정해 주는 '예술 협동조합'으로서 기능하던 일면이 분명 <기록예술의 모임>에는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비평의 부재가 그들의 운동체로서의 생산성을 떨어뜨린 한 요인이었음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이 연재에서 아베는 "기록주의는 액추얼리티의 요청과 표리일체의 관계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의'에 관련된 어휘가 '공통의 언어'로 공유됨으로써 '비평의 부재'가 발생했던 것이다. 반면, 이러한 예술 운동의 성격에 얽매이지 않는 히라노의 입장에서는 이를 논쟁적인 주제로 제기하는 것이 가능했다.


순문학 논쟁이 일어난 시기는 운동의 역사에 있어서도 격동의 시기였다. 1961년 7월 25일에 개최된 일본공산당 제8회 대회를 전후하여, 신일본문학회의 유지들은 당과의 항쟁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일본공산당은 하나다, 아베, 이즈미 다이하치(泉大八) 등 당원 문학자들을 제명 처분했다. 또한, 61년에는 기록예술의 모임이 해산되었고, 기관지 『현대예술』 역시 11·12월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이러한 문학·예술 운동의 위기 속에서 히라노는 '액추얼리티'를 논했던 것이다. 그 구체적인 대응 양상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부터 검토하고자 한다.


순문학 논쟁을 계기로 『군조』에서는 1959년 이후 침체되어 있던 '액추얼리티' 담론이 다시 융성하기 시작한다. 우선 12월호 좌담회에서 히라노는 이토 세이(伊藤整)와 야마모토 겐키치(山本健吉), 그리고 '편집자'를 상대로 소설 액추얼리티설을 피력했다. 다음 호의 '편집 후기'는 잡지의 과제로서 현대에 있어서의 '순문학' 개념을 명확히 할 것을 내세웠다. '액추얼리티'는 이러한 잡지 지면의 특성과 의제 설정 속에서 유포되어 갔다. 그 확산은 하니야 유타카(埴谷雄高)나 에토 준(江藤淳) 등 저명한 논자들의 평론이 발표된 것에 그치지 않는다. 필자의 이름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 형태를 포함하여, 다양한 담론들의 항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지면에는 '편집자'라는 이름의 존재가 등장했다. '편집자'는 대담이나 좌담회에서 다른 화자들과 동석하며 논의에 개입하기도 했다. 혹은 익명 칼럼 「간간악악(侃侃諤諤)」에서는 '순문학'이나 '액추얼리티'에 대한 의견이 특정 개인의 의견으로 환원될 수 없는 형태로 하나의 주제로서 유통되어 갔다. 1962년부터는 기존의 '독자 월평'란을 대신하여 '독자 논평'란이 신설되어, 『군조』 게재작뿐만 아니라 문학 및 문단 전반에 걸친 독자들의 논평이 다수 실렸다. 어느 한 독자가 히라노의 '액추얼리티' 용법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자 히라노는 이에 응답했고, 독자들 사이에서도 논쟁이 벌어졌다. 63년 신년호부터는 '문예 지식'란이 신설되어 문학 전반에 대한 지식을 잡지를 통해 배울 수 있게 되었는데, 그 첫 회에는 '리얼리티와 액추얼리티' 항목이 마련되었다. 이처럼 지면 구성이나 기획 내용과 연동하여 '액추얼리티'를 논하는 장이 확장되어 갔음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순문학'의 자기 점검 무대가 마련되어 가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논의는 『군조』에 머물지 않고 『문학계』, 『신조(新潮)』, 그리고 1962년에 복간된 『문예(文藝)』와 같은 잡지로도 퍼져나갔다. 순문학 논쟁은 당시 문단을 형성하고 있던 주요 문예지들을 '액추얼리티'를 둘러싼 경연장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신일본문학』 또한 이 논쟁에 대응하게 되었다. 그것은 개별 논자들의 문학론 제시에 그치지 않고, 집단의 방향성이나 작품의 평가와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신일본문학회 제10회 대회의 창조 활동 보고에서 히라노의 '순문학'설은 "문학 이념의 붕괴를 상징하는 것"으로 규정된 반면, 사사키 기이치 등의 "액추얼리티에 접근함으로써 리얼리즘을 전진시키는 기록의 이론"은 호의적으로 언급되었다. 또한, 이 당시에는 '액추얼리티'와 관련된 소설로서 이즈미 다이하치의 「액추얼한 여자」가 주목을 받고 있었다. 62년 1월호 '편집 후기'에서는 "『문예시평』은 우리의 운동을 단적으로 액추얼하게 보여주는 것"이라는 잡지의 방침이 내걸렸는데, 이를 이어받아 문예시평을 담당한 하리우 이치로(針生一郎)는 히라노의 '액추얼리티'를 비판하고 「액추얼한 여자」가 수록된 이즈미의 동명 단행본을 찬양했다.


이와 같은 시기에 복간된 『문예』의 익명 시평 「회전목마」에서는 '액추얼한 남자'라는 필명으로 등장한 이가 히라노를 향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지만 진정한 문학과 거짓된 문학을 가르는 그 중대한 액추얼리티란 대체 무엇인가? 히라노 씨는 명확하게 답하지 않고 있다." '액추얼한 남자'가 지적하듯, '문학'의 가치 자체와 관련된 중요한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히라노의 정의는 여전히 모호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액추얼리티'라는 단어의 의미와 용법을 둘러싸고 논쟁이 들끓었다. 순문학 논쟁으로 인해 '액추얼리티'를 논하는 장은 기록예술의 모임이 만들어낸 것과 같은 당파적인 공간에서 여러 문예지 사이에서 유행어처럼 확산되는 언론 환경으로 변모해 갔던 것이다.



3. 가장과 도착
――소설 액추얼리티설의 표명――

본 절에서는 논쟁 과정에서 히라노가 소설 액추얼리티설을 표명한 것의 전략적 의의를 규명하고자 한다. 이 히라노의 언명은 동시대의 논객들에게 새로운 학설의 주창 내지는 새로운 입장의 표명으로 받아들여졌다. 히라노 역시 「나의 액추얼리티설」에서 자신이 논쟁 이전에 '액추얼리티'라는 단어를 사용했던 사례들을 열거한 뒤, 다음과 같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것들이 내 자신의 빈약한 용어 사용례이긴 하나, 모두 부정적으로 다루었던 기억이 난다.

즉, 나는 액추얼리티나 다큐멘터리 같은 것들은 하나다 기요테루나 기록예술의 모임 패거리들에게 맡겨두면 그만이라는 의견이었다.


여기서는 히라노가 '액추얼리티' 부정파에서 긍정파로 돌아섰음이 그 자신의 입을 통해 명언되고 있다. 또한, 이 글을 통해 이제 더 이상 '액추얼리티'를 '하나다 기요테루나 기록예술의 모임 패거리들'에게만 맡겨둘 수는 없게 되었다는 히라노의 정세 판단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히라노는 1960년에 젊은 비평가들 사이에서 '액추얼', '액추얼리티'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것을 지적하며 다소 비판적인 의견을 피력한 바 있어, 그들의 동향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히라노가 순문학 논쟁 이전에 '액추얼리티'를 긍정적으로 파악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가 하면, 그것은 의문이다. 히라노의 시평류만 한정해서 보더라도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 마쓰모토 세이초(松本清張), 구라하시 유미코(倉橋由美子) 등의 소설을 논할 때 '액추얼', '액추얼리티'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찾아낸 글들을 다수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히라노는 "원래 소설 예술은 액추얼한 제재를 도입함으로써만 갱신되고 발전해 나간다"라고까지 주장했었다. 그렇다면, 앞서 히라노가 자신에 대해 설명한 바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논쟁에서는 히라노의 주장이 전환되었다기보다는, 주장이 전환되었다는 태도 자체가 히라노 자신에 의해 강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스스로의 입장을 가장하는 히라노의 모습이 엿보인다. 그렇게 함으로써 히라노는 소설 액추얼리티설을 굳이 하나다나 기록예술의 모임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전환을 가장할 수 있게끔 하는 히라노의 '액추얼리티'론의 모호함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1960년에 히라노는 시평에서 안보 투쟁이나 미이케(三池) 투쟁과 같은 사건들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떠한 제재든 작가와의 관계를 배제하고서는 넌센스"이지만, "이른바 액추얼한 현실로부터 유리되어서는 작가의 야망이나 방법 등도 형성될 수 없다." 따라서 "단지 방점을 제재가 아닌 작가 주체에 찍음으로써, 겨우 작가 태도의 적극성을 지적할 수 있을 뿐"이라고 히라노는 서술한다.


이 글에서는 '제재'와 '주체' 또는 '방법'이 분리 불가능한 이상, 그것들을 둘러싼 어휘는 어디까지나 전략상 '방점'을 찍기 위해 채택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히라노는 순문학 논쟁에서도 역시 「방점을 찍는 법」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며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당신에 대한 답장을 한 달 미룬 덕분에, 당신뿐만 아니라 사사키 기이치(군조), 요시모토 다카아키(문예), 오쿠노 다케오(문학계) 등 여러 제현이 뜻하지 않게 나의 문학 액추얼리티설을 다루고 있는 것을 한꺼번에 읽을 수 있었습니다.


[……] 하지만 당신을 포함하여 뭇사람들이 보는 바는 대체로 비슷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단어의 엄정한 의미에 있어, 나는 정당하게 이해받고 있으며 그 이해의 바탕 위에서 비판받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 나 자신을 포함하여, 지금 현대 문학에 대해 비평가들이 생각하는 바는 거의 대동소이하며, 설령 그것이 흑과 백만큼이나 달라 보일지라도 그것은 단지 방점을 찍는 방식의 차이에 불과하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여기서 열거된 것은 사사키 기이치의 전후 문학 환영설, 요시모토 다카아키(吉本隆明)의 언어 표출·문체론, 오쿠노 다케오(奥野健男)의 근대 소설 비판 논고다. '당신', 즉 구보타 마사후미(久保田正文)에 더해 '액추얼리티' 선도자 중 한 명인 사사키, '기록파'를 비판하는 요시모토, '액추얼리티'를 비판하는 오쿠노를 나란히 세워놓고, 자신을 포함하여 그 견해는 "대체로 비슷하다"고 히라노는 규정한다.


히라노에게 있어 속출하는 논적들의 비판 역시, 얼핏 정반대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문예지의 의제 설정 속에서 맴도는 '대동소이'한 비평 담론의 반복에 불과했다. 또한, 이러한 비평 용어를 둘러싼 담론의 투쟁에 있어 입론의 정당성을 독점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래서 히라노는 자신의 언어조차 그중 하나일 뿐임을 인식한 위에서 굳이 '액추얼리티'에 '방점'을 찍는다. 그것은 자신의 주장을 돌출된 것으로 탁월화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액추얼리티'라는 유행어에 자각적으로 몸을 맡기고 도착적으로 긍정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덧붙여 주의해야 할 점은, 이 논고가 '액추얼리티'론의 아성이라 할 수 있는 『신일본문학』에서 구보타 마사후미와의 왕복 서간이라는 형태로 설정된 기획에 응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히라노의 '액추얼리티' 표명은 신일본문학회의 문학자들을 향해, 그들이 발표하는 '액추얼리티'론 역시 '대동소이'하다는 인식을 명료하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것은 순문학 논쟁 속에서 발견된 '액추얼리티'의 새로운 핵심어화 방법이었다. 기록예술의 모임처럼 '액추얼리티'를 기초적인 지침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단어의 정의 자체가 여러 개념과의 관계 속에서 광범위하게 논의되는 상황 속에서 히라노는 사유했다. 이러한 히라노의 입장 표명은 유행어를 운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상황에 따른 실천적 행위로 파악되어야 한다. 히라노의 소설 액추얼리티설은 이 어휘를 절박한 예술 운동 내부의 유통 회로로부터 탈취한 뒤, 문예지와 관련된 문제로 전용하여 논쟁 속에서 새롭게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4. '액추얼리티'의 조건

――개념의 변용과 구보 사카에(久保栄)의 『오름가마(のぼり窯)』 평가를 중심으로――

소설 액추얼리티설의 표명과 동시에 히라노는 문학사의 구축이나 구체적인 작가 및 작품에 대한 의미 부여를 진행해 나갔다. 본 절에서는 히라노의 '액추얼리티' 개념의 변용을 추적한 뒤, 구보 사카에의 소설 『오름가마』에 대한 특권적인 평가를 축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히라노는 『문학계』 1961년 12월호에 발표한 「문학·쇼와 10년 전후」 제16회 '중간 결산'에서 이토 세이의 '삶의 공리성'이라는 개념을 "사상도 도덕도 이데올로기도 생활 기록도 포괄할 수 있는 광범위한 개념"으로 파악한 뒤, "그것이야말로 액추얼리티 그 자체"가 아니겠냐고 주장하고 있다. 히라노에 따르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액추얼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정치이며, 정치야말로 현세의 액추얼리티를 대표하는 최고의 상징"이다.


'정치'야말로 '액추얼리티'의 상징이라는 생각은 히라노의 소설 액추얼리티설의 기조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히라노는 이듬해 6월에 발표한 「나의 액추얼리티설」에서 이와는 다른 개념 규정을 내렸다.


시국성이든 역사적 현재성이든 시사성이든 선정성이든 상관없지만, 액추얼리티라는 단어 속에는 현재적 관심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이를 도사카(戸坂)의 비평론에 따르자면, 액추얼리티의 정신은 사회 상식에 꽤 가까운 것이지만, 그 사회 상식이 하나의 사회 인식으로까지 심화되었을 때, .즉 "현실성 있는 사회과학적 인식으로까지 파고들었을" 때 비로소 "비평은 시국성의 정신에 선다"고 할 수 있다. 내가 말하는 현재적 관심이란 바로 그런 의미다.


이렇게 도사카 준이 소환됨으로써, '액추얼리티'라는 말은 사회를 대상화하고 문제 삼는 이론적인 인식을 가리키는 말로도 운용되었다. 히라노는 같은 해 7월호의 「문학·쇼와 10년 전후」 제19회 '행동주의 문학론'에서 "쇼와 10년 전후에 도사카 준이 액추얼리티라는 말을 사용한 사실을 발견했다"는 점을 언급하며, "아마도 늘 액추얼리티의 본가인 양 행세하고 싶어 하는 하나다 기요테루조차도 이 사실은 모를 것이라 생각하니 내심 통쾌했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처럼 히라노가 도사카의 '액추얼리티' 개념을 제시한 데에는 하나다에 대한 대항 의식을 엿볼 수 있다. 하나다의 기록예술론에서 사용되었던 '액추얼리티'라는 말은 히라노에 의해 '쇼와 10년 전후'의 문학사에 내재된 문제로 영유(領有)되었다.-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하나다 등 당원 문학자의 제명에 관한 히라노의 태도이다. 6월호에 게재된 「문학·쇼와 10년 전후」 제18회 '사소설과 공산당'에서 히라노는 『군조』 5월호에 발표된 사사키 기이치의 당원 문학자 제명에 관한 평론을 언급하며, "드디어 사사키 군도 절연장을 썼구나, 싶었다"라고 서술했다. 사사키는 이 평론에서 일본 공산당 중추부의 문학관에 대해 현실과 유리되어 위증을 하고 있다고 엄하게 비판했었다. 히라노는 이에 대해 사사키의 "역사적인 인식이 있는 고발 혹은 단념으로 발현되고 있는 지점에 틀림없는 오늘의 액추얼리티가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처럼 히라노는 사사키의 '역사적인 인식'을 '액추얼리티'의 관점에서 평가했다. 그 위에, 현재의 일본 공산당을 생각하려면 50년 문제를 볼 필요가 있다는 것, "50년 문제 자체의 혼란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는 역시 쇼와 초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것, "쇼와 10년 전후의 문단 재편성"이라는 "문제가 오늘날에도 온전한 해결을 보지 못한 데에 순문학 논쟁의 원인이 있다"는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다음 달, 히라노는 도사카 이론의 발견을 이야기했던 것이다.


히라노는 당원 문학자 제명이라는 문학 운동의 위기를 포착하면서, 동시에 '쇼와 10년 전후'의 문제를 발굴하여 문학 논쟁에 접속시키고자 시도하고 있었다. 이 「문학·쇼와 10년 전후」라는 문학사는 잡지 연재라는 매체 형식에 의해 앞뒤 논고와의 연속된 맥락을 형성하면서도, 매회 상황론적인 응답도 가능케 하는 담론 구성체로서 존재했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히라노가 특권적으로 평가한 작품이 구보 사카에의 『노보리가마』였다. 히라노는 「나의 액추얼리티설」에서 도사카가 주장하는 액추얼한 사회 인식을 달성한 소설로서 구보 사카에의 『노보리가마』를 칭송했다. 『노보리가마』는 4부작 구상의 제1부로 발표된, 홋카이도의 니시구미 벽돌 공장을 무대로 사람들의 움직임을 그린 소설이다. 아시오 폭동 등 메이지 시대의 노동 운동을 다룬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도사카의 '액추얼리티' 개념을 내세우는 히라노의 주장은 작품 평가로서는 이 지점에 착지하게 되는데, 이것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서는 아직 상세한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히라노가 『구보 사카에 전집』 제4권에 발표한 해설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것은 종래에 논쟁 관련 자료로 간주되지 않았으나, 발행일이 1962년 5월 31일임을 감안하면 「나의 액추얼리티설」과 나란히 놓고 고찰할 가치가 있는 논고이다.


히라노는 이 20쪽이 넘는 해설에서 『노보리가마』의 '주요 테마'를 여러 개 나열하고 있다. 히라노에 따르면, 구보는 『노보리가마』에서 '기계 도입'을 계기로 한 조(組), 우두머리, 하층 노동자라는 "삼중의 피라미드형 세계"의 "반응과 변질"을 그리며, "복잡한 제반 관계를 하나의 '종합적인 사회상'으로까지 조각해" 내려고 하고 있다. 또한 본사와 벽돌 공장의 파이프 역할을 하는 니시 레이타로 개인의 모순을 "자본주의 사회 그 자체의 심벌"로 조형하고 있다. 나아가 "폐쇄적인 밑바닥 세계"가 "이중 삼중의 세계 구조에 대치하고 길항하려는 모습으로까지 성장하는 실마리"를 그리고 있다. 그것은 벽돌 공장의 세계가 "각성하고 분화해 가는 과정"을 통해 제시된다.

그리고 가타카미 전무에 의해 "새로운 일본적인 방향으로" 대중을 이끌어 들이기 위한 "테스트 케이스"로서 니시구미가 이용되려 했던 사실이 포착되어 있다. 이러한 '주요 테마'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단계'라는 세계사적 위치와 '철도 국유화라는 정책'을 벽돌 공장의 "기계화로의 개혁을 불가피하게 만든 원인과 근인"으로 명확히 인식한 위에서 논의되고 있다. 히라노가 「나의 액추얼리티설」에서 언급한, 『노보리가마』에서 엿볼 수 있는 도사카적인 '사회 인식'이란 구체적으로는 이처럼 발견된 텍스트의 성격에 대응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히라노는 『노보리가마』를 벽돌 공장의 기계 도입으로 집약되어 표현되는 사회의 구조적 변질을 포착한 소설로 읽어냈다. 그것은 기술과 사회라는 문제 제기라고도 할 수 있지만, 기술결정론적인 독해와는 달리 세계사적 상황이나 인물 상관관계, 텍스트의 세부를 포함한 위에서 집요하게 논의되고 있다. 또한 그것은 다음 문장에서 볼 수 있는 문제로 접속된다.


그런 조지를 포함한 방 전체의 폐쇄적인 선잠 속에, 작가는 먼저 오치아이 마사아키라는 도쿄대 공학부 대학생을 새로운 이분자로 등장시켜, 장차 기계장 주임이 되어야 할 이 대학생으로 하여금 기계 도입이라는 새로운 사태에 조응하게 하려 하고 있다. 기술적 인텔리겐치아의 문제는 구보 사카에를 관통하는 한 가닥의 붉은 실이지만, 여기서도 오치아이 청년이라는 이상주의적인 '오언(Owen)의 아류'를 오히라 조지와 대치시키고, 아마도 이 두 주요 인물을 장차 각축하게 만듦으로써 조장, 우두머리 등과 하층 노동자와의 분화 과정을 가능한 한 폭넓게 리얼라이즈(realize)하려고 애쓰고 있다.


히라노는 사회의 복잡한 제반 관계의 변화를 '기술적 인텔리겐치아의 문제'와 결부되는 것으로 파악했다. '인텔리겐치아'는 히라노가 희구하는 문학상, 문학자상을 끊임없이 의탁해 온 개념이다. 「나의 액추얼리티설」 또한 후타바테이 시메이가 『뜬구름』에서 '인텔리겐치아 문학'을 완성하는 데 실패했음을 이야기한 비평이며, 『노보리가마』의 성취는 "끝내 실패한 후타바테이의 이론과 창작의 지점을 프롤레타리아 문학 이론을 매개로 삼음으로써" 극복해 낸 점에 있다고 보았다. 히라노는 상황에 따라 자신이 사용해 온 어휘를 재편성함으로써 문학사적인 논리를 가다듬었는데, 『노보리가마』는 그것을 결정화하기 위한 핵의 역할을 완수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히라노는 이 소설의 시대 설정을 추정하며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메이지 39년 연말부터 메이지 40년 4, 5월에 이르는 역사적 시점을 작가가 『노보리가마』 제1부의 시간으로 선정한 것 자체가 이 작가 특유의 용의주도함을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 그런 메이지 40년 상반기의 시점에 작가는 『노보리가마』 제1부의 무대를 정해놓고서, 같은 해 7월에 발발한 유바리 탄광이나 호로나이 탄광의 파업과 폭동 직전에 붓을 놓고 있는 것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작품상에서도 유바리나 호로나이의 탄광은 가타카미 전무의 지휘하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다소 불분명한 필치지만,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노보리가마』가 파업과 폭동의 전야를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히라노는 파업이나 폭동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발생하는 조건을 다루었다는 점에 착안하여 분석을 진행했다. 그 논술은 일간 『평민신문』 등 초기 사회주의 관련 자료를 인용하며 전개된다. 말할 것도 없이 구보는 전쟁 전 노동 운동이 맞이한 결말을 안 상태에서 『노보리가마』를 발표했다. 가변적인 미래를 지향했던 사건의 전야를 사후적으로 바라보며 그 '원인과 근인'을 인식하는 것. 이러한 지연을 바탕으로 하는 반성적인 사고를 히라노는 작품의 설정과 구성에서 읽어냈다.


이처럼 히라노가 『노보리가마』에서 본 '사회 인식'으로서의 '액추얼리티'란, 말하자면 '정치'로서의 '액추얼리티'가 발동하는 역사적·사회적인 조건을 재인식하려는 시도였다. '정치'로서의 '액추얼리티'는 단순한 민중의 내재적인 에너지의 발로나 추상화된 이념 같은 것이 아니라 기술·사회·담론의 제반 연관 속에서 문제화되고 있다. 신일본문학회와 일본 공산당의 관계에 균열이 가는 상황 속에서, 히라노는 이렇게 구보 사카에의 『노보리가마』를 문학사적으로 계승해야 할 대상으로 발견하고 그 너머에 있어야 할 '액추얼'한 소설의 모습을 상망(想望)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5 '액추얼리티'의 가능성

――오쿠노 다케오를 프리즘으로――

1961년부터 62년에 걸쳐 문단을 형성했던 문예지에서는 앞서 서술한 문학·예술 운동의 조직적인 위기와 병행하여 새로운 언론 상황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발신된 히라노의 문제 제기는 순문학 논쟁 이후 자신과 타인에 의해 어떻게 다루어지고 전개되었는가. 그것을 추구하는 것은 본고의 과제를 넘어서는 일이다. 여기서는 논쟁이 전후 제2차 '정치와 문학' 논쟁으로 접속된 논고를 프리즘으로 삼음으로써, 순문학 논쟁에서 히라노가 지녔던 가능성의 소재를 조명하는 데 그치고자 한다.


오쿠노 다케오는 「'정치와 문학' 이론의 파산」에서 스탈린 비판 이후의 정세 속에서 마르크스주의 신화의 해체를 전제로, 히라노의 이론적 전망 자체가 실효(失效)되었다고 선고했다. "히라노가 문학 액추얼리티설을 굳이 제창한 것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최후의 충성 표현이다"라고 오쿠노는 주장한다. (41)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히라노의 '액추얼리티' 표명은 마르크스주의와의 격투를 통해 자기 비평을 지탱해 온 자에 의한 마르크스주의의 연명 조치로 파악된다. 하지만 '정치와 문학'이라는 문제 자체를 기각하려는 이 도식적인 재단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작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었다.


오쿠노에 따르면, 히라노는 "나는 액추얼리티 같은 것은 성미에 맞지 않는다. 노마 히로시의 문학도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하면서도 노마 히로시의 『나의 탑은 거기에 선다』를 평가했다. 왜냐하면 "만약 『나의 탑은 거기에 선다』가 문학적으로 무가치하다는 것이 되면, 지금까지 부지런히 쌓아 올린 '정치와 문학' 이론이, 자신의 문학적 모티프가 모두 허망해지기" 때문이다. (42) 즉, 히라노가 자신의 이론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노마의 소설에 가치를 두는 것이 필수불가결했다고 오쿠노는 지적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상세히 검토해 보면 상당히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히라노의 노마 평가를 확인해 보면, "내 인상은 안정되어 있지 않다", "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다",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라며 유보적인 표명을 하고 있으며, (43) 오쿠노의 말처럼 노마 평가가 무너지면 히라노 이론은 허망하다는 식의 방점이 찍혀 있지는 않다. 또한 오쿠노가 인용한 히라노의 글과 그 전거인 「문학·쇼와 10년 전후」 제24회 '구보 사카에와 나카노 시게하루'를 비교해 보면 차이가 나타난다. 히라노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액추얼리티 같은 것은 성미에 맞지 않는다. 또한 구보 사카에의 문학도 노마 히로시의 문학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미에 맞지 않고 좋아할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들을 결부시켜서 조금 더 파고들어 보고 싶다고 바라고 있다. 아무리 나라도 아직 딜레탕트로 전락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44)


이 논고는 제목에 나와 있듯이 '구보 사카에'를 '나카노 시게하루'와 비교하여 높이 평가한 것이다. '노마 히로시'는 그에 수반하여 유보를 달고 언급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오쿠노는 앞의 문장에서 "또한 구보 사카에의 문학도"라는 부분을 누락하고, 마치 노마 히로시론인 것처럼 인용하고 있다. (45)


오쿠노는 이처럼 히라노의 비평을 '노마 히로시'를 칭송한 것으로 가공하고, '구보 사카에'라는 문제를 소거했다. 이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노마는 당시 『신일본문학』 편집장 위치에 있던 작가이다. 한편 구보는 신일본문학회와 복잡한 관계에 있던 작가이며, 또한 1958년에는 자1살했다. 오쿠노가 '정치와 문학' 이론의 파산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알기 쉬운 논적으로서의 '노마 히로시'가 필요했던 것이며, '구보 사카에'라는 고유명사가 야기하는 노이즈는 오쿠노의 단언이 일정한 설득력을 지니기 위해 사상(捨象)될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이 시점에서 논점의 사각지대에 들어간 '구보 사카에'야말로 도식적인 재단에 회수되지 않는 히라노 비평의 가능성으로서 새롭게 자리 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액추얼리티 같은 것은 성미에 맞지 않는다"만, 그렇기 때문에 "조금 더 파고들어 보고 싶다"라는 말에는 굳이 '액추얼리티'를 주장한 히라노의 전략성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이 문장은 가장(假裝)된 히라노의 도착적인 입장 표명과, 『노보리가마』 평가에서 엿볼 수 있는 '액추얼리티'의 조건에 대한 사고와 아울러, '구보 사카에'라는 이름을 올바르게 복원한 위에서 다시 읽어내야만 한다.


본고에서 밝힌 것은 '액추얼리티'라는 말을 둘러싼 이러한 히라노의 실천의 제상(諸相)이다. 하나다 기요테루, 기록예술 모임이 이론적·당파적으로 사용했던 '액추얼리티'라는 단어를 히라노는 유행어적·상황 의존적으로 운용함으로써 문예지 변혁에 관련된 담론 전략을 수행할 수 있었다. '액추얼리티'의 시대 속에서 굳이 '액추얼리티'를 논함으로써 비평적일 수 있었던 히라노 겐. 그 의의는 특정 상황에서의 매체적인 실천으로서 개별 구체적으로 정위(定位)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히라노의 행위를 현재의 '액추얼리티'를 둘러싼 상황과 매개 없이 직결시켜, 그 오늘날의 의의――혹은 '액추얼리티'――를 칭송하는 것은 엄히 삼가야 할 것이다. 다만, 그 역사적인 현격함을 초기 조건으로 삼은 위에서, 우리는 그로부터 '액추얼리티'라는 단어의 역사를 떠안기 위한 자기 점검의 방도를 배울 수 있다. 이러한 인식하에 지금 여기에서 히라노의 비평은 '액추얼'하다고 굳이 언명해 보는 것은, 과거에 이상을 투영하는 행위와는 위1상을 달리하는 하나의 판단으로서 성립할 터이다.


주석

(1) 이소가이 히데오 「쟁점·쇼와 문학사의 구상」(『현대문학사론』 메이지 서원, 1980년), 야노 마사쿠니 「히라노 겐·순문학 논쟁과 그 후」(논구의 회 편 『히라노 겐 연구』 메이지 서원, 1987년), 특집 「전후의 문학 논쟁」(『군조』 1986년 9월 특대호)에 게재된 여러 논고 등을 들 수 있다. 덧붙여 사토 이즈미는 히라노의 비평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한편으로 히라노는 1950년대 '기록' 문화에 의해 발생한 리얼리티의 변용을 포착하는 데 실패했다고 서술하고 있다(사토 이즈미 「1960년의 액추얼리티/리얼리티」 『현대사상』 2005년 3월호).

(2) 스즈키 사다미 『일본의 '문학'을 생각한다――문학사 다시 쓰기를 향하여』(가도카와 쇼텐, 1994년), 다이라 고이치 「'순문학 논쟁'으로의 도정――히라노 겐의 '문예부흥' 관(觀)과 1960년 전후의 비평을 중심으로――」(『문예와 비평』 2009년 5월)를 들 수 있다.

(3) 히라노 겐 「문예지의 역할 『군조』 15주년에 부쳐」 『아사히 신문』 1961년 9월 13일, 조간 7면.

(4) 오쿠보 후사오는 히라노의 주장을 현재 혹은 미래에 있어서 『군조』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히라노의 순문학 변질설을 공격하기로 마음먹고 다카미 준에게 반론 집필을 의뢰했다고 한다(오쿠보 후사오 『문사와 문단』 고단샤, 1970년). 이러한 증언으로부터 히라노의 글이 오쿠보를 도발하여 잡지 편집 현장으로 향하게 했음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히라노의 사상 내용에 관한 오쿠보의 이해의 옳고 그름이나 논점에 대한 양자의 인식 차이라기보다는, 히라노의 언명이 지니는 행위 수행성과 그에 호응한 편집 측의 매체적인 실천성이다. 히라노와 오쿠보 사이에 발생한 마찰은 양자의 의도를 넘어 논의의 장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논쟁으로부터 약 10년 후, 히라노는 "그 논쟁의 숨은 장본인은 당시 《군조》 편집장 오쿠보 후사오에 다름 아니었다는 것이 현재 나의 의견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히라노 겐 「순문학 논쟁 이후――10년간의 나의 발자취」 『군조』 1971년 10월 특별호, 266쪽).

(5) "신년호를 보내며, 올해는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자 하지만 순문학으로서의 근본 방침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음을 밝혀두고 싶다" 무기명 「편집후기」 『군조』 1960년 신년 특대호, 268쪽.

(6) 히라노 겐 「『군조』 15년의 발자취」 『주간 독서인』 제392호, 1961년 9월 18일, 3면.

(7) 히라노의 소설 액추얼리티설이 전략적인 것이라는 점은 동시대에도 주목받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순문학 논쟁을 '근대문학'파의 '왕위 청구 운동의 재개'로 파악하고, "'액추얼리티=코미트(commit)'는 청구권을 증명하는 보증서 같은 것"이라고 서술한 후쿠다 쓰네아리 「문단적인, 너무나 문단적인」(『신초』 1962년 4월호, 11쪽)을 참조. 단, 후쿠다가 파악한 논쟁의 지형도에는 『군조』 편집자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8) 쓰무라 히데오 「폴 로타의 영화론 비판 그 저서 "Documentary Film"에 대하여」 『속 영화와 비평』 고야마 서점, 1940년.

(9) 하나다 기요테루 「웃는 고양이――기록예술에 대하여――」 『군조』 1954년 3월호, 165쪽.

(10) 도바 고지 『운동체·아베 코보』 이치요샤, 2007년, 64쪽. '예술협동조합'이라는 표현은 다케이 아키오의 것이다(하나다 기요테루·다케이 아키오 「예술 종합화의 과제」 『신극 평판기』 게이소 쇼보, 1961년, 299쪽).

(11) 아베 코보 「심판받는 기록자――영화예술론(1)――」 『군조』 1958년 신년 특대호, 222쪽.

(12) 당시 『군조』 편집자였던 나카지마 가즈오는 이 좌담회의 사회·진행역을 맡았다고 서술하고 있다(나카지마 가즈오 「순문학 논쟁 무렵」 『히라노 겐 전집』 제4권 '부록', 신초샤, 1975년 7월. 같은 이 「잊을 수 없는 것 잊고 싶은 것――어느 문학적 회상」 무사시노 쇼보, 1999년). 오쿠보 후사오는 사정상 이 좌담회에 참석하여 사회를 볼 수 없었다고 한다(주4 전게서).

(13) 히라노 겐·마쓰모토 세이초 「<대담> 사소설과 본격 소설」(『군조』 1962년 6월호)에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14) 문학광중년 「독자 논평 '히라노 겐 씨의 문예시평에 대한 의문'」 『군조』 1962년 7월호, 히라노 겐 「이달의 소설(상)」 『마이니치 신문』 1962년 6월 26일, 문학초심자 「독자 논평 '히라노 겐 씨의 문예시평에 대한 의문'을 반박한다」 『군조』 1962년 8월호.

(15) 이 구체적인 양상에 관해서는 모기 겐노스케·기무라 마사키·니시다 기리코 「연소(延燒)하는 <액추얼리티> 문예지에서의 담론사 1953-1963」 『언어태』 제13호(2014년 2월)를 참조. 해당 논고는 1953년부터 63년까지의 『군조』, 『신초』, 『신일본문학』, 『문학계』, 『문예』에서의 '액추얼리티', '액추얼' 관련 어휘의 사용 기사 목록을 첨부한 위에서, 신일본문학회의 조직 문제와 해당 어휘의 연관성, 5개 지에서 어휘가 유통, 확산되어 가는 과정에 대해 고찰한 것이다.

(16) 노마 히로시 「일본 문학의 현상과 창조의 방향 신일본문학회 제10회 대회에서의 창조 활동 보고」 『신일본문학』 1962년 3월호, 106-108쪽.

(17) 이즈미 다이하치 「액추얼한 여자」(별책 신일본문학) 창간호, 1961년 7월. 단행본 『액추얼한 여자』(산이치 쇼보, 1961년)에 수록됨.

(18) 무기명 「편집후기」 『신일본문학』 1962년 1월호, 196쪽.

(19) 하리우 이치로 「문예시평 액추얼리티란 무엇인가」 『신일본문학』 1962년 3월호.

(20) <액추얼한 남자> 「회전목마」 『문예』 1962년 창간 특대호, 1962년 3월, 245쪽.

(21) 히라노 겐 「나의 액추얼리티설(1)」 『도쿄 신문』 1962년 6월 23일, 석간 8면.

(22) 히라노 겐 「이달의 소설(상)」 『마이니치 신문』 1960년 3월 24일.

(23) 히라노 겐 「이달의 소설 베스트 3」(『마이니치 신문』 1957년 6월 19일), 같은 이 「이달의 소설 베스트 3」(『마이니치 신문』 1958년 8월 16일), 같은 이 「추리소설 시평」(『도쿄 신문』 1959년 2월 15일), 같은 이 「이달의 소설(하) 베스트 3」(『마이니치 신문』 1960년 1월 29일), 같은 이 「추리소설 월단」(『일본 독서 신문』 1961년 6월 28일) 등을 참조.

(24) 히라노 겐 「이달의 소설 베스트 3」 『마이니치 신문』 1957년 6월 19일(전게), 조간 3면.

(25) 히라노 겐 「이달의 소설 베스트 3(하)」 『마이니치 신문』 1960년 4월 28일, 조간 7면.

(26) 히라노 겐 「왕복 서한 악센트를 찍는 법(구보타 마사후미 씨에게)」 『신일본문학』 1962년 9월호, 152쪽.

(27) 각각 사사키 기이치 「'전후 문학'은 환영이었다」 『군조』 1962년 8월호, 요시모토 다카아키 「전후 문학의 현실성――액추얼리티는 가능한가」 『문예』 1962년 8월호, 오쿠노 다케오 「예술적 감동과 액추얼리티」 『문학계』 1962년 8월호.

(28) 구보 사카에 「노보리가마」는 『신초』 1951년 6월호부터 12월호에 연재되었고, 1952년에 신초샤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29) 히라노 겐 「중간의 마무리――문학·쇼와 10년 전후 그 16――」 『문학계』 1961년 12월호, 141쪽.

(30) 히라노 겐 「나의 액추얼리티설(4)」 『도쿄 신문』 1962년 6월 26일, 석간 8면. 히라노가 인용하고 있는 것은 도사카 준 「소위 비평의 '과학성'에 대한 고찰」(『문예』 1938년 신년호)이다. 여기서 말하는 '과학', '사회과학'이란 유물론을 가리킨다. 도사카는 해당 논고에서 "비평의 대상은 언제나 현하(現下)의 사물을 정규로 삼는다"라고 하며, "시국성(액추얼리티)의 정신"(방점 원문. 이하 동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도사카가 "비평의 시스템은 액추얼리티의 체계일 것을 필요로 한다"라고 할 때, 그것은 '현하의 사물'을 다루는 것에 더해 '과학적'인 '사회이론'의 '시스템'에 의한 사고를 가리키고 있다(232-233쪽). 덧붙여 '액추얼리티', '상식', '사회과학' 등의 문제는 주저로 꼽히는 『일본 이데올로기론』(하쿠요샤, 1935년)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31) 히라노 겐 「행동주의 문학론――문학·쇼와 10년 전후 <그 19>――」 『문학계』 1962년 7월호, 172-173쪽.

(32) 히라노 겐 「사소설과 공산당――문학·쇼와 10년 전후 <그 18>――」 『문학계』 1962년 6월호, 124쪽.

(33) 사사키 기이치 「문학 운동과 당원 문학자의 제명」 『군조』 1962년 5월 특대호.

(34) 주32 전게 논고, 128쪽.

(35) 상동, 같은 쪽.

(36) 히라노 겐 「해설 『노보리가마』와 『일본의 기상』의 문제」 『구보 사카에 전집』 제4권, 산이치 쇼보, 1962년 5월 31일, 421-433쪽.

(37) 상동, 432쪽.

(38) 개념사적으로 보면, '기술적 인텔리겐치아'는 도사카가 『일본 이데올로기론』(전게)에서 논한 문제로 알려져 있다. 도사카는 '인텔리겐치아'를 모든 계급에 걸쳐 존재하는 "분산된 지능 분자"로 파악하고, 그 일본에서의 대표자를 '기술 인텔리'로 삼았다. 도사카의 '기술 인텔리'론은 "우선 첫째로 자본제하에 있어서의 생산 기술자의 유능성을 어떻게 자본제로부터 독립시킬 것인가에 존재한다"라는 것이다. '기술적 인텔리겐치아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이 주장은 당시의 인텔리겐치아론에 대한 의문에서 제기되었다(292-295쪽). 한편 히라노는 주31의 논고에서 행동주의 논쟁에서의 도사카의 인텔리겐치아론을 언급하고 있다.

(39) 히라노 겐 「나의 액추얼리티설(3)」 『도쿄 신문』 1962년 6월 25일, 석간 8면.

(40) 주36 전게서, 437-438쪽.

(41) 오쿠노 다케오 「'정치와 문학' 이론의 파산」 『문예』 1963년 6월호, 222쪽.

(42) 상동, 227쪽.

(43) 히라노 겐 「이달의 소설(상) 베스트 3」 『마이니치 신문』 1962년 11월 30일, 석간 3면.

(44) 히라노 겐 「구보 사카에와 나카노 시게하루――문학·쇼와 10년 전후 <그 24>――」 『문학계』 1963년 1월호, 109쪽.

(45) 상동, 같은 쪽.

(46) 해당 부분에 해당하는 히라노의 한 문장은 단행본 『문학·쇼와 10년 전후』(분게이슌주, 1972년) 수록 논고에서는 삭제되어 있다. 『히라노 겐 전집』 제4권(신초샤, 1975년) 수록 논고도 마찬가지이며, 이상의 실태는 초출(初出)을 확인하지 않으면 밝혀지지 않는다.

부기

본고는 2013년도 일본근대문학회 춘계대회 신진연구자 워크숍 패널 발표 「번져가는 '액추얼리티' ――순수문학 논쟁의 주변을 둘러싸고――」(호세이대학)에서의 보고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이다. 회장 안팎에서 가르침을 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아울러 본고는 일본학술진흥회 과학연구비 보조금(특별연구1원 장려비)에 의한 연구 성과의 일부이다.

【키워드】히라노 켄, 순수문학 논쟁, 액추얼리티, 문예 잡지, 문학·예술 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