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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시절, 전역하고 풀꽃이 한창 피어날 무렵에 들판에서 이 책을 읽자는 마음으로 집에 이 책을 주문해두었다. 생각해 보면 주둔지에도 풀꽃은 널려 있었는데, 그냥 철책 밖이 좋아서 그런 막연한 꿈을 꾸었던 듯하다. 전역한 지 2년이 넘었는데도 이 책을 집어 들 일이 없었다. 시간에 쫓기는 도시인의 생활로 돌아가니 풀꽃보다도 시계를 볼 일이 많았기에 자연스레 이 책을 잊은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사진조차 찍기 전에 벚꽃도 철쭉도 다 시든 것을 보았다. 감정에 취할 새도 없이 봄의 끝자락에 다다른 것을 느꼈다. 그때 갑작스레 묵혀두었던 이 책이 생각났다. 지금이 가장 좋을 때라는 생각에 이번에는 없는 여유를 내서 이 책을 의무감으로 읽었다.


물론 이런 변덕스러운 계기로 하는 체험이 으레 그렇듯이 나는 처음에 느끼기로 마음먹은 것과 전혀 다른 것을 느꼈다. 이 책은 전원이나 봄날과는 별 상관이 없다. 책 뒤표지는 「풀꽃」을 '잃어버린 청춘의 이야기'라고 소개한다. 정확히 말하면 「풀꽃」은 '청춘'이라는 단어보다 '잃어버린'이라는 단어에 무게가 훨씬 더 강하게 실린 이야기다. 봄날 들판을 수놓은 풀꽃처럼 파릇파릇하다기보다는, 이미 여름날의 풍파를 한껏 맞아 해진 채로 간신히 고개만 들어 올린 채 버티는 풀꽃의 이야기다. 하지만 그런 풀꽃에서 아름다움을 느끼지는 못하더라도 강인함을 느낄 수는 있다. 꽃은 언젠가는 진다. 풀의 꿈은 꽃이 아니라 새로운 씨앗이다. 누가 시든 꽃을 비난할 수 있으랴. 씨앗을 피우기를 포기한 풀만이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지 않고 꿋꿋이 서있는 한 생명은 자신의 의지를 발해 충실히 살아가고 있으므로 아름답지는 못해도 숭고하다.


직접 풀꽃에 관해 이렇게까지 장황하게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내가 방금 쓴 문장들은 시오미가 요양원에서 한 말에서 피어났다. 초반부에서 시오미는 니체를 연상시켰다. 교리와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충실하게 현재를 살며 의지를 최대한으로 발하는 파릇파릇한 영혼이 시오미의 말에 깃들어 있었다. "산다는 건 전혀 다른 거야. 그건 일종의 도취야.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이성도 감정도 지식도 정열도 전부 다 불타올라 넘쳐흐를 것만 같은 것, 그게 산다는 거야." 나는 그래서 시오미로부터 삶에 대한 열의를 직접 보기를 원했다.


그런데 시오미는 허무하게 퇴장했고, 그의 말도 아닌 그의 수기를 통해 들여다본 과거사는 내가 바라던 것과 전혀 달랐다. 그는 니체보다는, 뭐랄까,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에나 등장할 법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스타브로긴과 키릴로프를 섞으면 시오미 시게시가 되려나? (상상만 해도 기괴한 조합이다.) 아니면 이렇게 비유할 수도 있겠다. 삶에 대한 열의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정작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오면 좌절을 스스로 택하는, 자신보다 자신의 비애와 고독을 더욱 사랑하는 시지프스.


시오미와 후지키 사이의 인연은 정말 애달팠다. 사회적 금기나 앞으로의 운명을 차치하더라도, 둘이 내적으로 닿을 수 없다는 것이 정말 안타까웠다. 이때는 벽을 친 것이 시오미라기보다는 후지키였기 때문에 시오미의 우유부단함에도 나는 공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랑의 좌절로 느낀 고독이 컸는지, 시오미는 고독에 비범한 의의를 둔다. "고독이란 어떤 약한 것, 인간의 무력함, 인간의 비참함을 나타내는 거겠지. 하지만 난 그걸 강한 것, 나 자신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했어." 아무래도 그의 견해는 이전에 가스가에게 들었던 이 말에서 유래한 것인 듯싶다. "진짜 고독이란 그 무엇에도 상처받지 않는 것, 어떤 괴로운 사랑에도 견딜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 그건 영혼의 강하고 적극적인 상태라고 생각해. 남에게 사랑받는다는 건, 햇볕에 미지근해진 물속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과 같아서, 거기엔 어떤 고독도 없어. 남을 강하게 사랑한다는 건 자신의 고독을 거는 거야. 설령 상처받는 두려움이 있다 해도 그게 진짜 삶이 아닐까? 고독이란 그런 식으로 단련되어 성장해가는 게 아닐까?" 강하게 사랑할수록 기쁨보다는 좌절을 느끼기 쉽다. 내가 베푸는 사랑과 상대에게서 돌아오는 사랑의 불균형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은 그 좌절을 감수하고도 매달린다. 마음의 평안을 내버리고 타인으로부터 불어오는 격정에 스스로를 맡기는, 위태롭지만 한껏 뜨거운 불꽃이 사랑이다. 반면 고독이란 자신의 불꽃을 꺼버릴 수 있는 바람 따위는 애초에 틀어막은 채,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지만 은은하게 빛나는 불꽃이다. 이 비유 자체는 정말로 절묘하다. 인연을 맺고 끊기를 반복하며 쇠해가는 듯 보이는 영혼들에게 들려주어 고독의 숨은 가치를, 즉 은연중에 굳건해진 마음을 일깨워 주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시오미는 이 말과 당대의 상황에 너무 얽매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특히 전범국이었던 일본에서 징집을 기다리는 신세였던 시오미에게 세상은 정말로 희망이 없는 곳처럼 보였을 것이다. 세계인들이 서로를 초토화시키는 시대, 신의 존재가 한껏 의심스러워진 판국에, 신앙에 매달리는 지에코를 시오미는 이성적으로 거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둘은 서로를 원했다. 둘이 서로를 껴안았을 때 시오미의 뇌리를 스친 자각. "지금까지의 격앙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깨끗이 씻어낸 맑은 행복만이 남았다. 이렇게 살아 있는 것도 인생이고, 비참하게 삶과 죽음의 경계에 육체와 정신의 자유를 거는 것도 인생이겠지. 그렇다면 왜 지금 이 한순간은, 서로를 사랑하는 의식이 고조된 이 한순간은 영원히 계속될 수 없는 걸까. 이것이 진실이고 그것이 허망일까. 그것이 진실이고 이것이 허망일까. 이 따스하고 향기로운 꽃 같은 것. 왜 이것은 살아 있다는 것의 기쁜 확증이 아닐까." 모든 것을 배제하고 서로의 마음이 통한 그 순간에 행복을 느꼈다면, 그 행복을 더 느끼고자 하는 마음에라도 생각을 바꿀 수 있지 않았을까. 타당하지만 머리를 아프게 하는 염세주의에서 벗어날 시도라도 해봤더라면 어땠을까. 신을 사랑하지 않지만 신을 사랑하는 지에코에 대한 사랑으로 인생의 새로운 국면에 과감히 들어섰더라면 「풀꽃」이 이렇게까지 슬픈 이야기로 남았을까.


충동을 확인한 순간에 시오미는 주저하다가, 끝내 '자신의 이성적인 자의식'을 택한다. 지에코의 길을 따르는 것은 여태 직접 좌절을 겪으며 쌓아왔던 자아를 부정하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즉 자아 대신에 사랑을 죽여서 완전한 고독 속에서 가장 자신다운 삶을 살아가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결정이 오히려 자아를 죽였다. 지에코를 포기한 이래로 그의 삶에 새로운 동력원은 생기지 않았다. 삶에 대한 태도를 정했는데 정작 삶의 동력을 잃었으니, 그의 삶은 폐병 때문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고장 날 운명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돼야만 했는지…


시오미는 고독에 대한 의미를 확립한 후에 그 틀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왜 그 길이 영원히 옳을 것이라고 확신했을까? 어쩌면 후지키에게 제대로 닿아보지도 못한 채로 인연이 끊겼던 경험 때문에 더는 상처를 받지 않겠다는 마음이 앞서서 그의 앞길을 영영 틀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이 그렇게나 꺼리던 다른 길에 어떤 가치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못 했다는 것이 너무 아쉽다. 시오미는 자신의 인생을 비롯한 모든 것이 허무하니 상처라도 받지 않겠다는 약한 마음을 철학으로 포장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가 느낀 인상이 옳다면 시오미는 정말로 크나큰 모순을 저지른 셈이다. '지금'에 충실하자고 수차례 마음먹었으면서 어찌 지금으로부터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는 '끝'을 생각한단 말인가. 지금에 충실한 사람은 지금 외에 다른 것을 보지 않아야 한다. 물론 지에코와의 인연을 붙든다면 자신이 이성이 여태껏 그려온 길 밖으로 새어나가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하지만 시오미가 여태껏 살아온 '지금들' 중에서도 '지에코와 보냈던 지금들'이 가장 황홀하지 않았던가? 삶의 이유와 삶의 원칙 중에 후자를 고른 시오미에게 나는 동의할 수 없다. 마음은 철저히 공감하지만, 그리고 내가 모든 상황을 밖에서 바라보고 있는 독자이기 때문에 이런 트집을 잡을 수 있다는 것도 알지만, 그래도 나는 스스로의 삶에 한계를 정해둔 채 말라죽은 시오미에게 솔직히 화가 난다. (물론 이 화는 아쉬움의 한 형태다. 너무 진지하게 보지 않기를.)


영원히 옳은 것, 영원히 믿을만한 것은 없다. 우리가 삶이라는 큰 흐름 속에, 특히 지금에 매달려있다는 것만이 유일한 진리다. 물론 놓쳐버린 것에 대해서는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다. 영원을 갈망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어리석은 본능이다. 그나마 인간은 성장하며 작가의 수필집의 문구처럼 '인생이란 늘 무언가를 잃어가며 살아가는 것'임을 깨닫고, 상처에 둔감해지거나 애초에 잃어버릴 것을 피해가는 지혜를 터득한다. 하지만 절대로 놓치기 싫은 것, 지금 내 마음을 너무도 강하게 잡아당기는 것이 있다면, 모든 것을 감수하고 그곳으로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는 용기도 필요하지 않을까. 삶의 자세를 뻣뻣이 고정하면 삶의 이유를 잃어버릴 수 있다. 희열이 사람을 살아가게 한다면, 이성을 위해 희열을 내려놓는 것만큼 이성이 희열을 눈 감고 도와주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이미 입은 상처를 이성으로 치유하면서도 새로운 희열을 위해 가시덤불 속으로 기꺼이 뛰어드는 것이 정말로 자신에게 충실한, 진정한 삶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적어도 지금 내게는 그렇게 보인다. 어쩌면 내가 아직 철이 덜 들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이게 청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