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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순수이성비판
· 순수이성비판1 대화형 독서 리뷰



체력적으로 한계인 거 같다. 초월적 변증학 부록부터, 칸트의 초월철학이 형이상학의 사형선고가 아닌 이유가 풀이되고,


이성 사용에 대한 훈계가 시작된다. 그래서 적어도 변증학 부록까지 좀 더 힘냈으면 좋았을텐데, 업무적으로 집중이 안 돼서 중단한다.



순수이성비판1이 현학적으로 다가오는 것 맞다. 개념 정립하는 게 어렵다. 그래도 어떻게 AI 돌리면 넘어갈 수 있다.


근데, 그렇게 해서 도달한 순수이성비판2에서 요구하는 추상력과 논증이 너무 어렵다. (이게 맞는지 의심하거나 검증할 능력이 내게 없다.)


순수이성비판2는 진짜 처참하다. (영혼론 이율배반, 필연적 존재자 이율배반은 어거지로 ㅇㅋ임 근데 우주론적 이념 및 이율배반이 지1랄임)



떄문에 기존 대화형에서 강연형(?)으로, 그러니까 칸트 원맨쇼로 바꿀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의의는 있다고 생각한다. 진짜 AI로 해결이 안 되어서 영상들을 찾아봤는데, 순이비1 순수 이성의 체계는 다뤄지지만


순이비2 영상은 못봤다. (5ㅂㄸㄸ도 영상 2편이 1에 대한 분할이었음)



900p고, 73p가 남았다. 이건 평일 업무랑 주말 일정들 소화하고 넉넉히 5.17.(일)까지 보완할 생각이다.


참고로, 순이비1의 개념, 정의 엄밀성이 상대적으로 덜 요구되다보니 ai 점수가 더 잘 나왔다. 귀엽게 봐줘라.


느낀 점은 따로 쓸 건데... 분쟁적이지 않을지 염려가 된다......




후기글 따로 쓰려고 했는데, 그냥 최대한 축약해서 여기에 남김



ⓐ 이성으로 부여된 원죄


‘도대체 무엇이 우리에게 원죄를 심을 수 있는가’라는 고민에 빠졌던 적이 있다. (종교의 교리를 제외한다면)


잘못이란 것은 종의 차원이 아닌 단순히 개인의 부족함의 영역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렇지만 순수이성비판은


이성이 초험적으로 순수 지성과 관계 맺어 발생하는, 착오에서 출발하는 교조주의를 구조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우리 인간 사회의 구성원들이 지적 충만함의 결여(일반적 가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통일하고자 하는,


무조건자를 찾는 성질로 인해 당연하게 초월적 가상 빠진다는 것은, 원죄를 부여하는 지위를 이성으로 옮겼다.


무언가에 기댈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란 사실은 나 스스로를 점검하는 계기와 함께, 타인을 향한 시선에


측은함과 이해심의 무게를 더하게 만드는 듯하다.



ⓑ 현상계에서 예지계로


원인과 원인 사이의 필연성을 증명하기 위해, 즉 과학을 증명하기 위해, 그리고 재래 형이상학의 월권을 막기 위해


현상계와 예지계를 구분한 사실이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하다.’, ‘흔들리는 것은 오직 마음 뿐이다.’


같은 소리들을 이전에는 무슨 소린지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칸트 철학을 접한 이후로 그러한 문장들이 말하는


논지가 무엇인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범주라는 체계로, 원상(사물 자체)이 아닌 현상만을 본다는 이 가정은, 우리가 그간 말해왔던 객관(자연법칙 외)이


단순히 주관적 객관임을 깨닫게 하였고, 상식이란 말이 얼마나 편협한 단어인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왜인지 물자체라는 개념에 나를 의탁하게 되는 기분에 빠져든다. 우쭐거리고 싶어진다.



ⓒ 예지계에서 다시 현상계로


그러나, 순수이성비판1에서 모든 체계를 구축하고, 순수이성비판2에서 순수 이성의 이율배반 문제를 다루며,


차츰차츰 물자체에 대한 동경이 벗겨진다. 결국 우린 경험에서 주어진 것을 넘어서는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며,


자칫 형이상학이란 무용한 것이 아닌지 회의감에 젖어들기 시작한다.



ⓓ 당위성, 실천


이론 이성은 막혔다. 영혼론도, 우주론도, 필연적 존재자도 알 수 없음이 증명되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분명


좌절뿐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초월철학의 끝에서 실천을 말한다. 어떤 이유에서일까?


현재로서는 1. 이론 이성의 한계 인식에도 불구하고 통일하고자 하는, 무조건적인 어떤 것을 찾고자 하는 성질 때문


2. 지성과 이성의 구조가 만드는 반성적 태도를 경험하므로 3. 착오가 필연이라면 착오의 교정 또한 필연


정도로 추측이 되는데, 이것이 맞다면 실천 이성의 주장을 마냥 자기 합리화라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 형이상학의 재정립


결국 형이상학의 근간이, 알 수 없는 것들을 알고자 했던 이성에서 출발한 것이라면 형이상학이 무슨 의미를 갖는단 말인가?


세계 전체가 대상으로 주어질 수 없다면(경험적으로는 부분만 주어지기 때문에), 단순히 인간의 이념이라면


귀결을 향해 전진하는 것이 아닌, 전제를 향해 배진하다는 사실은, ‘완전히 아는 상태’가 아니라, 사고를


정교하게 만드는 무한한 전개, 즉 ‘태도’에 있음을 시사할 것이다.



ⓔ 실천의 가변성, 실천의 상속자들


순수 이성의 한계로 인해 규제적 사용이 요구되고, 우리들의 목표가 ‘완전한 지식’이 아닌 ‘태도’로 옮겨간다면,


많은 것들이 스스로를 실천이란 이름의 상속자로 주장될 수 있을 것이다. 종교, 역사, 국가, 사회, 제도 등으로 말이다.


후대의 철학들이 태도와 실천에서 어떻게 해석될지가 기대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