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요로 된 철학적 학들의 백과사전』(Enzyklopä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im Grundrisse)은 헤겔이 생전 직접 출간한 판본이 셋임.
1817년도에 출간한 초판("하이델베르크 엔치클로페디")은 하이델베르크 대학 강의용이고, 절(§) 개수는 477개.
2판은 1827년도에 베를린에서 나왔고, 574개 절로 대폭 증보되었음.
헤겔이 죽기 1년 전인 1830년에 나온 3판이 흔히 말하는 『엔치클로페디(철학백과)』임.
정확히 말하면 시중의 판본들은 대부분 헤겔이 쓴 1830년판 본문에 방대한 양의 추가(Zusätze) 내용들이 합쳐져 있는데, 이는 헤겔의 여러 제자들이 헤겔 사후 여러 강의 노트와 청강 필기를 편집해 본문 절 사이에 끼워 넣은 거임. 즉 우리가 인용하는 자연철학과 정신철학의 풍부한 사례나 역사적 부연 대부분은 사실 헤겔 본인만이 아니라 제자들의 손을 거친 글임.
그러면 이번에 왜 하이델베르크 판본이 새로 번역돼서 나왔는가? 왜냐하면 이 책의 철학사적 의의가 아주 크기 때문임.
먼저 자연철학과 정신철학이 1830년 판본의 절반에도 못 미침. 그래서 단행본 한 권으로 나오는 거임. 본문 절들 자체가 짧고, 주석(Anmerkung)도 적고, 추가는 당연히 아예 없음. 그래서 헤겔 자신의 손에서 나온 체계의 골조를 가장 응축된 형태로 볼 수 있다는 강점이 있음.
두 번째로, 이게 사실 진짜 중요한 문제인데, 『정신현상학』의 위.상(이게 왜 금지어지) 문제임.
『정신현상학』(1807)이 원래 헤겔 체계의 "제1부"로 구상되었다는 점은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을 거임. 하지만 헤겔은 『논리의 학』과『엔치클로페디』에 가서는 이 기획을 번복하고 정신현상학을 정신철학 내부의 한 계기(주관정신의 한 단계)로 흡수시켜 버림.
그런데 1817년판과 1830년판에서 그 양상이 다르게 나타남.
1817년판에서는 격하가 일어나긴 했지만, 정신현상학이 체계의 입구(Einleitung) 기능을 잔존적으로 유지함.
1830년판으로 가면 그 기능이 더욱 협소화되어, 의식·자기의식·이성의 단계만 약식으로 등장하고, 절대지로의 상승 운동은 아예 사라져버림.
그래서 장 이폴리트 같은 서구 헤겔 해석자들이 정신현상학을 헤겔 체계의 "진입"으로 독립시켜 유의미하게 천착하고자 할 때의 텍스트적 근거 중 하나가 바로 이 1817년판의 위치 설정임. 정신현상학의 변증법적 운동이 논리학 안에서 선명히 드러나는 과도기적 텍스트란 거.
다른 이유도 있는데, 1817년은 『법철학』(1820)이 아직 쓰이기 전임. 그래서 이 책은 객관정신 부분이 매우 짧음. 이후 헤겔은 객관정신을 별도 저작으로 전개한 뒤, 1827/1830년 판에서 그 결과를 압축해 다시 끼워 넣게 됨.
즉 1817년판의 객관정신은 『법철학』 이전에 헤겔이 정치철학에 대해 어떻게 사고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거의 유일한 출간된 텍스트라고 볼 수 있음.
마지막으로 헤겔이 당대 자연과학(생리학·화학·전자기학)의 발전과 어떻게 소통해나갔는지를 두 판본의 비교를 통해 추적할 수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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