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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아이테토스 메모
정준영 옮김, 아카넷
참고: 제 의견이 다수 들어갔으니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테아이테토스》 편의 독서에 있어 제 자신의 이해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목적에서 작성했습니다. 오류가 있어도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궁금한 점이나 의견 등은 댓글에 남겨주세요.
내용 추가
2026. 07. 05.: 149a~170d 구간 메모 추가. 206c 메모에 《향연》 편의 인용구를 삽입.
148a~b
4, 9, 16 등은 2*2, 3*3, 4*4처럼 자기자신과 곱해서(=제곱해서) 나온, 그 자체로 정사각형을 이루는 정사각수임. 반면 3, 5, 6 등은 1*3, 1*5, 2*3처럼 작은 수와 큰 수가 곱해져 생긴 직사각수임. 하지만 이 숫자들(3, 5, 6...)의 제곱근들은 제곱 시 정사각형을 이룰 힘(dynamis)을 가짐. 이를 테아이테토스가 증명했고 소크라테스가 칭찬하는 대목.
149a~151c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앎을 출산시키는 산파의 기술자임을 이야기함. 스스로 앎을 지니지 못하지만 남이 잉태한 앎을 출산하는 것을 도와 그것이 참된 것인지 거짓된 것인지를 분간한다고 함. 문제는, 진정 앎을 가진 자가 무엇이 참된 앎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므로, 실질적으로 누군가가 가진 앎을 출산하는 것을 돕는 것은 진정 지혜로운 자가 아니면 불가능할 것임. 즉 소크라테스는 본인 스스로 무지함을 주장했으나 실제로는 엄청나게 많은 것을 알고있었을 것임.
151d
테아이테토스의 첫 번째 명제: 앎은 지각이다.
156e~157a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유전설
눈과 사물이 부딪히며 눈은 봄의 운동을 통해 보는 것이 되고, 사물은 보여짐의 운동을 통해 보여지는 것이 되며, 흼은 보여짐을 통해 흰 것을 낳으므로, 우리는 흰 것을 인식하고 흰 것은 흰 것이라고 인식됨.
160e~161d
프로타고라스는 오직 인간만이 척도가 되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음
161d~162a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면 모두가 지혜로우므로 프로타고라스 본인이 남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주장하는 것이 성립할 수 없음
170d
인간척도설은 모든 인간에게 척도가 주어지므로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는 문제가 생길 수 있으며, 프로타고라스는 자신이 사람들을 지혜롭게 만든다고 주장하지만, 모든 사람들 각자에게 척도가 존재하는 까닭에 가르침이 성립할 수 없는 모순이 존재.
177c 525번 주석
이미 플라톤은 후기에 이르러 이데아와 질료의 결합을 시도했음. 박종현 교수님이 파이돈 서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비판한 맥락을 마침내 이해함.
180d
파르메니데스는 “있음은 모든 것에 대한 이름이다”라고 발언. 그는 이름이 존재의 있음이라는 본질을 나눠버리는 것이라고 여겼기에 이름을 단지 본질을 비추는 환영일 뿐이라고 정의. 하지만 각각의 존재는 구분이 되어야 할 것인데, 이름이 그 경계 역할을 하지 않을까? 그리고 언어는 사회적 합의인데, 모두가 사과를 사과라 부르는 시점에서 이 사과라는 이름은 본질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182a~d
작용을 가하는 것과 작용받는 것을 통해 흼은 흰 것을, 지각은 지각하는 것을 각각 낳는데, 문제는 움직임이란 운동과 변화의 속성을 포함하기에, 우리가 무엇을 인식한 순간 그것이 태어남과 동시에 변화하여 다른 것이 됨. 즉 무엇을 인식했다고 말한 순간 그것은 이미 다른 것으로 돌변함.
185c~d
소크라테스는 인식에 있어서 우리가 봄, 들음을 각각 눈을 통해, 귀를 통해 라는 대답을 테아이테토스에게 받아냄. 이는 눈 또는 귀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혼에 의한 도구적인 성격을 띄고있다는 의미로써 소크라테스가 원하던 대답임. 이에 소크라테스는 고도의 함정을 놓음. 시각과 청각이라는 개별 감각으로는 결코 포착할 수 없는 것들, 즉 '있음', '다름', '같음'과 같은 공통적인 것(koina)들을 어떻게 인식하느냐고 질문함. 이때 테아이테토스는 “영혼 자체가 자신을 통해서 고찰하는 것 같다”고 철학자로서의 자질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답변을 했음. 마침내 추론적 사고(dianoia)에서 지성의 사고(noesis)를 하는 기반을 마련하며 철학자로 각성하기 시작함.
186c~e
보고 듣고 만지는 감각적인 지각(aisthesis)은 보는 것, 듣는 것 각각의 것에만 관여해서 이를 어우르는 있음 자체를 추론(syllogismos)할 수 없다. 이는 혼의 영역이다. 사실(있음)에 적중하지 못하므로 진리에 적중할 수 없다. 고로 앎은 지각일 수 없다.
188d~189b
있는 것을 판단한다는 것은 그것이 하나의 것임을 전재. 하나의 것을 판단한다는 것은 있는 것을 판단하는 것임. 따라서 있지 않음을 판단하는 것은 아무것도 판단하는 것이 아니게 됨.
-《소피스테스》 238d, 박종현 교수님 번역 발췌
“손님: 이 사람아! 이미 했던 바로 그 말들에서, '있지 않는 것'을 반박하는 사람조차도 당혹스러움에 이런 식으로 빠트려서는, 누군가가 이를 반박하려고 시도할 때는, 그것에 대해서 자기모순의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가?”
즉, 거짓을 반박하려면 자신도 거짓을 말하게 되는 모순이 존재함. 또한 ‘~이지 않은 것‘이라 지칭하게 되며 역설적으로 그것이 존재함을 인정해야 함. 그러므로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논의를 중단. 그래서 to me on을 ‘~이지 않은 것‘으로 규정하며 없음이 아닌 ‘다름‘의 관점으로 접근함.
191c~192e
밀랍 서판 비유를 통해 인식 또는 판단의 종류를 단계적으로 해체. 앎의 유무가 판단의 조건인 경우, 지각의 유무가 판단의 조건인 경우, 앎과 지각이 일치하는 판단인 경우, 앎도 지각도 없는 판단인 경우,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짓 판단이 성립하는 경우 이렇게 다섯 단계로 구분함. 특히 마지막이 중요한데, 알고 있음에도 지각하지 않아서 이것이 다른 것과 같다며 판단을 착각하거나(오렌지를 보며 귤이 이렇게 컸나? 하며 착각), 이것에 대해 알지 못하며 다른 아는 것과 같다고 착각하거나(이건 오렌지처럼 생겼으니 오렌지일거야!), 알고서 지각까지 하는 것을, 판단 과정에서 지각의 실수로, 다른 알고 지각하는 것과 같다는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것이다(오렌지를 만지는 중에, 다른 손은 검은 비닐봉지 속 여러 과일들 속에 있는 귤을 만지며 이것은 오렌지구나 라고 착각).
195e~196b
다섯 더하기 일곱 같은 단순한 판단에도 열둘이라는 대답 대신 열하나라는 오류를 일으킴. 수가 커질 수록 더 빈번해짐. 즉 열둘과 열하나 둘 모두를 아는 상태라고 해도 지각의 선행조건이 없을 경우 얼마든지 오류를 일으키는 것이 가능해짐. 앎은 참된 판단이라는 명제가 흔들리기 시작.
196d~e
밀랍 판에 낙인이 제대로 찍힌 앎이라 해도 판단에 오류가 있는 것을 통해, 거짓된 판단이 불가능하다 했음에도 이것이 실제 벌어지는 것을 확인했으므로, 거짓 판단이 없거나 아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를 강요받음. 그와 동시에, 앎이 무엇인지 모른 상태에서 과연 탐구가 가능한지 근본적 의문 제기.
197d
새장의 비유 시작
198d
지식을 사냥하여 마음 속 새장에 가둬 보존한다고 할 경우, 그것들 각각에 이름을 붙여서, 누군가에게 주는 행위를 하거나(가르침), 누군가에게서 받기도 한다(배움). 사냥하는 행위는 기존에 없던 것을 잡는 것과, 이미 울타리에 가둬둔 것을 붙잡기 위해 다시 잡는 것이 있음. 지식을 습득한 뒤에 이걸 다시 잡아서 철저한 이해를 하게 될 것임을 언급함.
여기서 hexis(이미 가진 것, 소지)와 ktesis(소유, 획득)의 구분이 이루어짐.
“그런데 내게는 지니고 있는 것(hexis)이 소유하는 것(ktesis)과 동일한 것으로 보이지 않네. 이를테면 겉옷을 사서 그것의 주인이 된 어떤 사람이 그걸 걸치지 않을 경우, 우리는 그가 그것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소유하고는 있다고 말할 걸세.“
하지만 바로 다음에 소크라테스는 잡은 뒤에 놓아주고 다시 잡는 행위도 사냥임을 언급하며, 철저하게 배우는 과정이라고 묘사함. hexis는 활동성을 지니며, 지금 가지고 있음에 해당함. 옷을 걸친 상태임. 즉 지식을 갖고 사고하는 과정에 해당함. 반면 ktesis는 잠재성을 지니며, 소유하는 행위에 해당함. 옷을 구입하여 보관한 행위임. 즉 지식 자체를 습득하여 보관하는 것에 해당함. 하지만 놓아주고 다시 잡는 것을 통해 앎을 견고히 할 수 있으므로, 이해를 깊게 하는 잠재성을 지님. 따라서, 소유(ktesis)했다고 해서 이를 제대로 갖고 있는(hexis) 것은 아님을 의미.
199b
새장 속에서 비둘기를 잡으려다 다른 새를 잡는 경우처럼, 많은 앎들 속에서 하나의 앎을 다른 앎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존재함을 언급. 문제는 이렇게 잡은 앎을, 잘못 잡은 것이 아니라고 믿는 경우가 존재.
199d
사냥꾼이 자신이 잡은 이것을 다른 앎이라고, 다른 앎을 이것이라고 믿는, 무지 자체가 아니라 앎 자체에 의한 거짓 판단의 문제. 무지의 무지 상태.
201c~d
재판관들의 예시 등장. 만약 앎이 참인 판단이라면, 목격 없이 청취만으로 판결을 내리는 행위가 과연 옳은가에 대한 문제가 발생. 즉 앎 없이도 참인 판단은 가능하다는 것을 반증. 그러면서 앎은 설명 가능한 참인 판단으로 명제를 변경.
201e~202c
최악의 난해한 구간인 꿈 이론 등장.
존재를 합성하는 요소들은 그것 자체로 있기에 어떤 것, 그것, 자체 등 이를 수식하는 다른 설명이 붙을 수 없음. 여기서 합성되어 나타난 것들(복합체)에야 비로소 설명이 붙을 수 있게됨. 이름들(onoma)의 섞임이 설명(logos)의 본질이기 때문.
여기서 드는 생각은, 요소들은 각자 분열되어 존재하는 낱말들이고, 이것들이 명사와 동사 따위로 조합을 이루어 문장(복합체)을 형성해야 그 자체로 설명(logos)이 된다는 의미 같음. 《소피스테스》 편 262d에서 나오는 내용이 이 구간을 이해할 핵심 같음(박종현 교수님 번역본 발췌).
“이제야 그가 사태들(ta onta), 곧 현재 또는 과거 또는 미래의 것들에 대해 밝히고 있기 때문이겠으며, 그는 명사로써 뭔가를 지칭할 뿐만 아니라 뭔가를 완성했는데, 이는 동사들을 명사들과 엮음으로써 하는 것일세. 이 때문에 이걸 우리는 '진술한다(legein)' 고 말하지, 명사로써 지칭한다(onomazein) 고만 말하지는 않거니와, 특히 이 엮음(plegma)'에 대해 '진술(logos)'이라는 명칭으로 일컬었네”
203a~d
요소를 음소로, 복합체를 음절로 변환. 음소들의 결합으로 음절이 되는데, 음소 둘 모두를 알아야 그 쌍(음절)을 인식함.
203e
“음절을 음소들이라고 놓아선 안 되고, 오히려 그것들(음소들)로부터 생겨난 어떤 하나의 종이라고 놓았어야 했네”
소크라테스가 테아이테토스를 떠보기 위해 슬쩍 던진 함정. 이에 테아이테토스가 동의. 즉 요소에 의해 생겨난 복합체는 요소와 상관 없다는 인식이 테아이테토스에게 있던 것.
204a
“소크라테스: 그러면 음절에는 그것의 부분들이 있으면 안 되네.
테아이테토스: 아니 왜요?
소크라테스: 부분들이 있는 것이 무엇이 되었든 그것의 전체는 부분들 전부들 일게 필연적이기 때문이네. 아니면 자네는 전체가 부분들로부터 생겨난 것이면서도, 부분들 전부들과는 다른 어떤 하나의 종이라고 말하겠는가?“
소크라테스는 테아이테토스에게 음절이 음소와 결합하여 단일한 형상이 된다면 하나로 존재하는 음절에 부분이 없어야 한다며 본격적으로 논리적인 맹점을 공격. 그러나 테아이테토스는 203a~d에 나오는 음소와 음절 이야기를 했음에도 요소의 중요성을 아직 인식하지 못해서, 후자를 선택.
(내 의견: 하지만 이 이지선다에도 살짝 따질게 있는 거 같은데, 부분들이 모여 전체이다, 그러니 요소들도 중요하다 라는 것을 보면, 각각 요소가 전부 있어야 전체가 된다는 식으로 착각할 위험이 있음. 본문에서도 소크라테스는 “결여된 게 있으면 전체도 아니고 총체도 아니게 되는거 아니겠는가?” 라고 언급(205a). 마치 백인대처럼, 그 중 한 명의 결원 또는 추가로 백명이 아니게 되면 백인대란 명칭이 사라지는가? 언어의 경우도 주어, 동사가 결합해 일차원적 문장이 형성되지만, 단지 명사나 동사만으로도 상황 설명이 가능함. 진격! 수류탄! 정지! 출발! 이런식으로. 즉 결합하여 생긴 전체 자체만으로 하나의 형상이 되는 것은 아니고 요소 자체도 형상의 지위를 갖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봄. 묘하게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의 가족 유사성’ 이론이 생각나던 구간.)
204d 835~837번 주석
본문 내용에서 언급되는 바와 다르게 총체를 그것의 총합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는 내용이 나오는 것 같음. 그리고 주석에 따르면 군대의 부분들 전체가 군대 자체와 같다 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음. 가령 백인대 라는 부대 단위가 있다고 하면, 이는 대략 백인의 병사가 모인 부대 단위임을 뜻하고, 백인대라 하면 당연히 그 백명의 부대원 전체를 일상적으로 생각하게 됨. 하지만 백인대가 철저히 백명으로 구성된 것이라 할 수 없고 만약 실제 그럴 경우, 그 중 한 명이라도 부대를 이탈하거나 전사하거나 편입되어 추가된다면, 백인대라 할 수 없는 논리적 오류가 생기므로, 양으로서 부분들의 전체를 질로서 그것 자체라고 같다고 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204d~205b
“다음은 어떤가? 요소들이 복합체의 부분들이 아니라 면 자넨, 복합체의 부분들이지만 그러면서도 복합체의 요소들이 아닌 그런 어떤 것들을 말할 수 있는가?”
204d부터, 각각의 요소가 보여 복합체가 되었는데, 총체란 부분들이 모인 것이니 총체=부분들 전부가 되고, 총체란 부분들에 의해 완전한 하나(전체)이므로, 총체=전체인데, 복합체는 요소들로 이루어지고, 음절(복합체)을 인식하려면 먼저 음소(요소)를 인식해야 한다는 논의가 나옴(203d). 즉 복합체 또한 부분들로 이루어졌으니 부분 없이는 불안정해진다는 의미. 요소 중 하나라도 없으면 총체의 지위를 상실.
205c~e
요소들은 일차적인 것이고 설명이 없는데 이는 그것 자체로 비복합적인 것이고 단일의 것이라 결합이 되기 전에는 설명될 수 없다는 논의를 했었음(201e~202e). 그런데 복합체가 단일한 종이며 부분들로 나뉠 수 없다면 요소와 동일한 종이 됨. 그러므로 복합체가 여러 요소들로 구성된 전체이자 그걸 이루는 요소들이 그것의 부분들이라면 복합체와 요소들 모두 인식될 수 있는 것들임. 반대로 복합체가 단일한 것이고 부분들이 없다면 요소와 같이 인식될 수 없을 것임.
206b
언어를 배울 때 음소 각각을 먼저 인식하여 구분하는 것을 연습하는데 이는 배열을 실수하지 않기 위함에서 하는 것임. 그러므로 요소 각각을 인식하는 것이 복합체를 인식하는 것에 앞선다고 볼 수 있음.
206c
‘참인 판단과 함께 설명이 덧붙여진 것이 가장 완벽한(최종적인, teleotate) 앎‘에 대한 탐구 시작.
《향연》 202a에 이미 등장함. 이하 박종현 교수님 역본 발췌.
“옳은 판단을 하는 것(바른 의견들을 갖는 것)이면서도 그 논거를 댈 수는 없는 것은 아는 것도 아니고,ー합리적인 설명을 하지 못 하는 것이 어떻게 앎(episteme)일 수 있겠습니까?ー무지도 아니나,ー사실인 것(to on)에 적중하는 것이 어떻게 무지일 수 있겠습니까?ー지혜(phronesis)와 무지 사이에 있는 옳은 판단(바른 의견: orthe doxa)이 그런 것인 게 틀림없습니다.“
207e~208a
짐수레의 한 가지 요소로 그것이 짐수레라고 판단하면 결과적으로는 옳은 판단일 것이나, 구성 요소들인 바퀴, 차축, 널빤지 등을 모두 열거(설명)할 수 있으면 짐수레에 대해 알고있는 전문가라고 할 수 있을 것임. 더 나아가, 사람의 이름의 철자를 틀리지 않고 제대로 표기한다면 옳게 판단했다고 할 수 있으나, 그것의 구성 원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설명하지 못한다면) 안다고 할 수 없을 것임. 즉, 단지 ‘테아이테토스’라는 이름을 제대로 썼다고 해서 알파벳을 안다고 할 수 없고, 다른 이름들(테오도로스)도 제대로 쓸 수 있는 응용력을 지녀야 진정 아는 것임. 요소들을 단순히 나열한다고 앎은 아니다는 결론.
하나 속의 열을 알아서 열을 전부 설명하는 것도 중요하나, 이것 하나의 본질을 관통하는 특성을 인식한다면 이 열가지 전부를 열거할 필요는 없게 될 것 같음. 즉 수레, 마차, 기차 등 이것들의 본질이 운송수단이란 것을 알면 굳이 차축이나 바퀴 따위를 열거할 필요가 없어질 것임. 하지만 이러면 열가지 요소에 대한 앎의 이해가 옅어지는 모순을 마주함. 즉 무언가를 실을 수 있는 바퀴달린 것을 수레라고 간단히 정의했다가는 각각의 바퀴가 무엇인지 요소의 본질을 잊어서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바퀴를 만들게될 위험성도 있음.
208c
‘앎은 설명을 동반한 옳은 판단이다‘라는 명제에 따라올 설명에 대한 세 가지 종류
1. 소리 속에 반영된 생각의 모상(206d: 자신의 생각을 표현(동사) 및 이름들(명사)과 함께 소리를 통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일 것 같네. 이를테면 거울이나 물에다 찍어 내듯이 판단을 입을 통한 흐름에다 찍어 내는 것 말일세. 자네는 그러한 것이 설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2. 요소를 통해 전체에 이르는 방법(206e: 그자는 각각의 것이 무엇인지 질문을 받았을 때 물어 오는 자에게 요소들을 통해서 대답을 해 줄 수 있다는 뜻으로 말한 것 같으니 말일세.)
3. 각각의 것들이 다른 것들과 구분되는 것을 판별하는 설명(208d: 각각의 것을 다른 것들과 차이가 나게 해 주는 그 차이를 자네가 파악한다면, 어떤 사람들이 말하듯, 자네는 그것에 대한 설명을 파악하게 될 걸세.)
209d
하나의 앎이 각각의 다른 앎과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해야 하는데, 이 다른 점은 어떻게 다른지 또 설명해야 하는 무한한 설명의 반복이 이루어질 모순이 발생. 예를들어 한 사람의 외모적 특성을 설명하기 위해 그 사람의 갈색 머리칼을 설명한다고 해도 갈색 머리칼을 가진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 설명해야 함. 곱슬기, 머리칼의 길이, 윤기, 머리숱의 양을 거론했다고 치자. 그러면 곱슬기의 다른 점, 길이의 다른 점, 윤기의 다른 점, 머리숱의 다른 점을 전부 각각 설명해야 하고, 설명의 설명이 무한하게 뻗어나가는 결과가 나오게 됨.
내 생각에, 언어는 숫자처럼 칼같이 맞아 떨어지지 못하는데, 곱슬기의 다른 점을 설명한다고 해도 그것의 곱슬기가 가령 웨이브 곱슬이다 라고 하면 어떻게 다른가? 라고 하면 이게 수학적으로 곡선을 계산해서 몇도의 각도로 휘어지는지 설명할 수가 없지 않나? 결국 어느 선에서 언어적 수렴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곱슬은 대략 넓게 물결지는 정도인데, 그 갈색은 밤나무 열매보다 진하지만 전나무 색깔보다 연하다. 숱은 두피가 보이지 않을 정도는 아니고 가르마 선이 얇아 보일 정도의 풍성한 숱”이라는 식으로, 두루뭉술한 어느 타협접을 찾을듯 싶은데? 아니면 이런 것도 가능함. 언어적인 설명은 수학적 엄밀성을 지닐 수 없어서, 내가 죽어라 각각의 다른 점을 열심히 설명해도, 남은 그걸 제멋대로 이해해버릴 수도 있음. 어찌되든 언어로 완벽한 설명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니, 결국 모상(eidolon)의 도움을 받아야 함.
역설적이게도, 언어로 설명이 불가능하니 우리는 무언가를 구현하기 위해서 인식의 가장 낮은 단계인 상상(eikasia)에서 시작해야 할 것임. 이는 인간 이성의 한계일 수도 있어서, 소숫점을 수백만 자리까지 계산해낼 수 없고 무엇이 무엇과 100% 다르다는 것을 설명할 수 없음. 로켓의 대기권 진입궤도나 태풍의 진행경로 예측 같은 천문학적 계산이 아님에도. 바꿔 설명하면, 0.999가 무한하게 뻗어나가는 수를 1로 수렴한다고 판단하여 무의미한 계산을 중단하고 전진할 수 있는 것도 인간 이성의 힘일 것임. 칸트가 인간 이성의 한계(grenze)를 비판하고(kritik) ‘이 정도 까지만 인식할 수 있다‘라며 선을 그은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 이성의 한계를 타협이란 수단으로 극복하여 모든 사물을 재정의할 힘을 제시한 것일지도 모름.
결론: 2,500년을 거치며 살아남은 철학자의 혼
《테아이테토스》 편은 두 가지 큰 의의를 갖는 책 같음. 첫째, 인간의 지식과 앎, 더 나아가 이성은 상당히 불안정한 기반 위에 있다. 둘째, 그 기반에서 무언가를 탐구하며 나아가는 힘이 바로 철학자의 혼이 가진 힘이다.
여태껏 플라톤의 대화편들에서 느끼던 것은, 아는척 하는 자들과 그들이 사실 무지함을 깨우쳐주던 소크라테스의 구도를 보여주는 편들이 많음. 아니면 일방적으로 소크라테스가 가르쳐주거나. 그런데 《테아이테토스》 편은 핵심 등장인물인 테아이테토스가 스스로 알지 못함을 인식한, 즉 소크라테스만큼 지혜로운 자임을 암시하며 시작함. 소크라테스도 본인이 가장 지혜롭다는 신탁을 받고 왜 그런지 고민하다가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깨달음을 통해 역설적으로 자신이 가장 지혜롭다는 신의 인정을 받았음을 알게됨. 테아이테토스의 혼 역시 마찬가지임. 그런데 가장 모르는 자들끼리 앎을 탐구하는 것에 위화감이 들어야 하는 것인데, 실제로는 이 두 사람은 매우 지혜로움. 특히 ’앎은 설명을 동반한 참인 판단이다‘ 라는 정답에 가장 가까울 것으로 보이는 대답을 찾았음에도 끝까지 비판적으로, 변증법으로 분석해서 그것의 허점을 찾아냄. 자기 앎에 안주하지 않고 정말 맞는지 의심하며 그것이 틀렸을 가능성을 발견하면 과감히 수용하는 자세는 가히 철학자의 귀감이라 할 것임.
이 책과 《소피스테스》, 《정치가》 이렇게 세 권이 이어지면서, 앎을 찾아가는 탐구의 방법을 논했고, 닮아선 안 되는 자들을 분석하며, 결과적으로 국가에 이바지할 정치가가 될 방법을 논하는, 철학자 교육론을 담은 것 같음. 즉, 내가 무엇을 아는지 엄밀하게 따지는 인식론적 훈련을 하고(테아이테토스 편), 진짜 앎을 흉내내며 궤변을 늘어놓는 가짜 사유자들을 그물로 가려내는 안목을 기른 뒤(소피스테스 편), 마침내 공동체를 지키고 이바지하는 실천적 지혜(정치가 편)로 나아가는 정교한 교육 과정임. 인생의 말년에 이른 노철학자 플라톤이 자신이 직접 철학자들을 가르치지 못하니 그 교육법을 담은 책 세 권을 내놓은 것임.
테아이테토스에게 걸었던 기대가 테아이테토스의 요절로 인해 좌절되나, 그와 같은 철학자의 혼을 지닌 자들을 각성시키기 위해 플라톤은 《테아이테토스》 편을 집필한 것 같고, 그의 부름에 응답해서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해서 스콜라 철학, 합리론, 경험론, 관념론을 거쳐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에 이른 것 같으며 앞으로도 이런 철학자들이 계속 태어날 것이라는 낭만적인 기대를 품게 된 책임. 이 책이 결론을 내리지 않으며 끝난다는 것에 분노한 독자들도 있을 것임.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책이 가르친 것은 앎이 얼마나 취약한지 따지며 앎이 아닌 것들을 확실히 검증하고 넘어가는 그 과정이니, 답 자체에 맹목적으로 집착하지 말고, 우리는 ‘겸손한 자세를 유지하며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의 가치’를 플라톤에게 선물받은 것일지도 모름. 플라톤의 대화편 중 가장 낭만적인 책이었던 것 같고, 내 인생책이 되어버린 대화편. 여전히 이 책을 이해하지 못했으니 아마 앞으로도 주기적으로 이 책을 읽게될 것임. 왜냐? 앎은 고정된 ‘소유(ktesis)’가 아니라 끊임없이 다시 사냥해야 하는 ‘지님(hexis)’의 과정이니까.
(참고하면 좋은 글)
테아이테토스 편은 철학자 양성론의 성격이 있는 것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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