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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의 걸작들을 둘러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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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엘러리 퀸은 네 권의 장편을 발표했다. 퀸 명의로 낸 『그리스 관 미스터리』, 『이집트 십자가 미스터리』, 그리고 버나비 로스라는 변명(필명)으로 발표한 『X의 비극』, 『Y의 비극』이다. 이 네 작품은 모두 초기 퀸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40년 이상 이어진 그들의 작가 활동에서 의심할 여지 없는 확고한 정점을 이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본격 탐정소설이라는 장르 전체를 통틀어서도 최정상에 위치하는 불후의 명작들이라는 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퀸이 두 사촌의 합작 필명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이런 기념비적인 걸작들을 단 1년 만에 연달아 발표했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경탄할 만한 사건이다. 단순히 이 시기에 작가로서 물이 올랐다는 설명만으로는 도저히 다 포괄할 수 없다. 오히려 탐정소설이라는 형식 자체에 내재된 필연성의 모멘트가 작용했다고 생각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성취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시기 두 젊은 작가를 강렬하게 몰아붙인 필연성의 모멘트를 고찰하기 위해, 가라타니 고진이 1980년대 전반에 전개한 일련의 작업을 참조하기로 하자. 가라타니의 작업은 일반적으로 '형식화'라고 불린다. "형식화는 지시 대상, 의미, 문맥과 같은 외부성을 환원하고, 의미 없는 자의적 형식 관계(차이)와 일정한 변환 규칙(구조)을 보는 것이다. 이 환원 과정에서 어떤 절차를 취하든 본질적으로 차이는 없다. 그 어떤 경우든, 어떤 형태로든 형식 체계 내부의 자립성을 둘러싸고, 혹은 외부성을 둘러싸고 역설이 발견된다."(「언어·수·화폐」). 가라타니는 '형식화'의 극한에서 체계가 자기 지시적인 역설에 빠져 내부로부터 자멸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기제를, 그 유명한 '불완전성 정리'를 본떠 '괴델적 문제'라고 명명했다.


20세기에 일어난 가장 극적인 사건 중 하나는, 힐베르트의 형식주의가 완성되었다고 여겨진 바로 그 시점에 한 청년에 의해 그에 대한 치명적인 비판이 제기되었다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1931년)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괴델의 정리는 어떠한 형식 체계도 그것이 모순 없이 일관적인 한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그의 증명은, 형식 체계 내에서 그 체계의 공리와 부합하지 않아 참인지 거짓인지 말할 수 없는(결정 불가능한) 규정이 발견되고 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어떤 형식 체계가 일관적이라 하더라도 그 증명은 해당 체계 내에서는 얻을 수 없으며 그 이상의 더 강력한 이론을 필요로 함을 의미한다. 이리하여 순수 수학의 완전한 연역 체계는 일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되고 만 것이다.
(「은유로서의 건축」) 

하지만 우리의 맥락에서 말하자면, 20세기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은 괴델의 논문이 발표된 이듬해, 괴델보다 한 살 많은 두 청년이 '불완전성 정리'와 궤를 같이하는 과정을 거치며 탐정소설을 '괴델화'해버렸다는 사건 다름 아니다. 이 사건을 둘러싼 아래의 논술은, 예전에 「현대사상」(95년 2월호)에 게재했던 「초기 퀸 론」의 보론으로 쓰였으나 이번에는 지면 관계상 수학 기초론에 관한 설명을 대폭 생략해야만 했다. 보다 상세한 논의에 관심이 있는 독자는 앞서 언급한 논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2
가사이 기요시는 『탐정소설론 서설』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런데 탐정소설의 '범인─피해자─탐정' 도식은 그 자체로 '작가─작품─독자'의 도식과 겹쳐진다. 피해자의 시체로 상징되는 수수께끼=사건이란, 작가=범인이 창조한 하나의 '작품' 다름 아니다. 독자=탐정은 그것을 정확하게 '읽어냄'으로써 작가=범인의 실상에 다가선다.
(「탐정소설의 구조 2 역할론」) 

여기서 가사이가 추출한 탐정소설의 '구조'는 정적이고 닫힌 모델이다. '범인─피해자─탐정'의 도식이 그 자체로 '작가─작품─독자'의 도식과 겹쳐지기 위해서는, '작품'의 내부/외부라는 두 가지 다른 레벨이 미리 엄격하게 구별되어 있어야 한다(그림 1). 다시 말해, 여기서 가사이의 논의는 러셀이 제창한 논리적 유형(Logical Type) 이론을 전제로 하고 있다. 물론 이 전제는 탐정소설의 게임성(페어플레이)이라는 요구에서 도출된 것이다.

그러나 게임 탐정소설의 작가가 항상 독자의 허를 찌를 것을 획책하고 있는 이상, '작품'은 닫힌 중립적 시스템임을 유지할 수 없다. 예컨대 애거사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에서는 중립을 가장한 일인칭 화자가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다. 이 소설은 '작품'의 외부(상위 레벨)가 내부(하위 레벨)로 미끄러져 들어온 듯한 자기 지시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논리적 유형 이론이 금지하는 클래스와 멤버의 혼동이 독자의 의표를 찌르는 '의외의 범인'을 성립시킬 수 있었음을 명시하고 있다.


이러한 자기 지시적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범인─피해자─탐정'의 도식이 오히려 그 자체로서 '작품'에 겹쳐져야 한다. 전자를 후자에 대입하면, '작가─(범인─피해자─탐정)─독자'라는 도식이 도출된다. 이를 도식화하면 그림 2와 같은 상위/중위/하위 계층을 가진 역피라미드형 배치가 얻어지는데, 물론 이 배치는 딱 겹쳐진 그림 1의 두 삼각형을 수직 방향으로 어긋나게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피해자' 항목을 '시체'로 치환한 것은, 그것이 '범인─탐정'에 의해 대상화된 객체의 레벨(오브젝트 레벨)에 위치함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자, 여기서 역피라미드의 좌변, '작가─범인─시체'라는 계열에 주목해보자. 이 계열 상에서는 범인은 시체보다, 작가는 범인보다 상위 레벨에 있다. 다른 말로 바꾸면 '범인─시체', '작가─범인'이라는 조합은 각각 '클래스─멤버'의 관계에 해당한다. 논리적 유형 이론은 클래스(상위 레벨)와 멤버(하위 레벨)의 혼동을 금지하여 그 혼동에서 발생하는 집합론적 역설을 피하려 하는 것이지만, 크리스티의 작례가 단적으로 보여주듯, '의외의 범인'을 지상명령으로 삼는 게임 탐정소설의 작가들은 역으로 그러한 역설이야말로 의외성의 원천이며, 클래스와 멤버의 혼동은 피할 수 없음을 본능적으로 간파하고 있었다. 반 다인의 형식주의를 계승하여 '국명 시리즈'로 후더닛(Whodunit) 작가로서 출발한 퀸이 이러한 국면에 도달하게 된 것은 이른바 시간문제였다고 해도 좋다.


'작가─범인─시체' 계열에서 발생하는 논리적 유형의 침범(레벨의 혼동)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1) '범인'이 '시체'의 레벨로 하강하는 경우. (2) '작가'가 '범인'의 레벨로 하강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하 각각의 유형에 대해 살펴보겠다.


(1) '범인'이 '시체'의 레벨로 하강하는 경우.

이 유형에는 몇 가지 패턴을 생각할 수 있다. 가장 초보적인 것은 살인으로 보였던 사건이 실은 자1살에 불과했다는 것인데, 이런 종류의 해결은 의외성보다는 김빠짐을 느끼게 할 가능성이 높아 어지간히 테크니컬한 처리를 하지 않는 한 독자에게 환영받지 못한다. 혹은 연쇄살인 사건에서 범행의 시간적 전후 관계를 오인시켜, 범인이 실제 사망 시간보다 이른 시점에 사자(死者)의 대열에 합류해 있었던 것처럼 위장하는 케이스도 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크리스티)에서는 범인이 시체로 위장해 의심을 피하며, 『세 개의 관』(J. D. 카)에서는 이 트릭의 무서울 정도로 정교한 변형이 피로된다.


그러나 이 유형 중에서 가장 전형적이고 중요한 케이스는, 이른바 '얼굴 없는 시체' 트릭과 그 다양한 변형 다름 아니다. 이는 한마디로 말해 처음에는 피해자라고 여겨졌던 인물이 진범으로 판명되는 기법으로, 목을 자르거나 얼굴을 짓뭉개는 등의 위장 수단을 통해 시체의 정체성을 범인 자신의 그것과 뒤바꿔치기하기 때문에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총칭되지만, 시체의 얼굴에 손상이 없더라도 범인과 피해자가 쌍둥이처럼 똑닮은 외모를 갖춘 경우라면 역시 이 케이스에 포함시켜도 좋을 것이다. 이 트릭의 주안점은 시체에 가해진 물리적 훼손의 유무가 아니라, '범인─시체'라는 주객 관계가 논리적 유형의 침범(레벨의 혼동)으로 인해 뒤바뀌어 버린다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범인─시체'의 구도가 역전되는 의외성은 M. C. 에셔의 트릭 아트 같은 '도형-배경 반전(図─地反転)'의 시각적 효과와 상통한다. 예컨대 에셔의 어떤 작품에서는 도형(figure)과 배경(ground)이 보는 시각에 따라 역전되어 '결정 불가능'해진다. 여기서 발생하는 일은 논리학적으로 말하면 클래스(상위 레벨)가 멤버(하위 레벨)가 되어 버린다는 것인데, 동일한 현상이 '얼굴 없는 시체' 트릭에도 일어나고 있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그러한 역설이 탐정소설의 '구조' 자체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이다. 즉, '얼굴 없는 시체' 트릭은 '작품' 내부에 속하는 정적인 도식을 토대에서부터 뒤흔든다.


이 역설은 또 다른 말로 바꿀 수 있다. 예컨대 가사이 기요시는 『탐정소설론 Ⅱ 허공의 나선』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탐정소설의 룰을 상징적으로 핵심화하면, 그것은 죽은 자는 죽은 자라는 동일률을 완벽하게 준수하는 것이 된다. 이 룰에는 어떠한 예외도 허용될 수 없다.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는 세계에서는 탐정소설의 대전제인 살인 사건이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9장 제3의 물결의 전선」) 요컨대 탐정소설의 세계에서는 '죽은 자를 되살려서는 안 된다.' 이 대전제를 준수하면서 어떻게 그것을 역이용할 수 있을까? 탐정소설을 구성하는 제반 코드의 임계점이 거기에 있다면, '얼굴 없는 시체' 트릭이란 바로 이 역설을 테크니컬하게 '봉쇄'해낸 것에 다름 아니다.


프랜시스 네빈스 주니어는 퀸의 30년대 초기 작품들에 이 모티프가 반복해서 사용되고 있음에 주목하여, '벌스톤 선공법 갬빗'이라 명명했다 (이 명명은 코난 도일의 『공포의 계곡』에서 유래한다). 이 모티프에 대한 당시 퀸의 집착은 예사롭지 않다. 『X의 비극』,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1932), 『미국 총의 비밀』(33)의 세 작품에서는 모두 이 기법이 사용되고 있으며, 또한 『Y의 비극』(33) 서두의 시체 공시소 장면에서도 그것을 암시하는 듯한 모호한 서술이 등장한다. 당시 퀸과 로스는 서로 다른 작가라고 여겨졌지만, 동일한 패턴을 연속해서 사용하면 그만큼 독자에게 진상을 간파당할 위험이 커지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퀸이 '벌스톤 선공법'에 집착한 이유는, 이 모티프가 탐정소설의 '구조' 그 자체에서 유래하는 중대한 역설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퀸이 이러한 역설을 자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Y의 비극』이라는 작품을 통해 뒷받침된다. 이 작품의 서장에 해당하는 시체 공시소 장면에서는 요크 해터로 짐작되는 시체가 바다에서 인양된다. 요크의 죽음은 자1살로 처리되지만, 명백하게 이 도입부는 『X의 비극』 제2막의 차장 찰스 우드 살해사건(전형적인 '벌스톤 선공법'이 사용됨)을 연상시키도록 쓰여 있다. 단, 이는 의도적인 미스디렉션의 제스처일 뿐, 인양된 시체는 틀림없이 요크 본인의 것이다. 따라서 『Y의 비극』에는 '벌스톤 선공법'이라는 모티프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조차 '범인'은 다름 아닌 '시체'인 요크 해터 본인인 것이다.


물론 위 표현은 수사적인 것이다. 이미 작품 서두에서 '시체'가 된 요크는 그 자신이 실행범으로서 살인 계획을 실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퀸은 '조종(操り)'이라는 모티프를 작중에 도입해 계획범과 실행범을 분리함으로써 이 장애물을 클리어한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사후의 '조종'이라는 기법이, '죽은 자를 되살려서는 안 된다'는 탐정소설의 대전제를 준수하면서도 그것을 역이용하기 위한 테크니컬한 빠져나갈 구멍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이다. 바꿔 말하면, 『Y의 비극』에서도 '범인─시체'라는 클래스와 멤버의 혼동(논리적 유형의 침범)이 작품의 역설적인 '구조'를 발생시킨 셈이 된다. 그렇다는 것은, 이 작품의 구상 역시 '벌스톤 선공법'과 동일한 사고의 틀에서 파생된 것이라 할 수 있다.


(2) '작가'가 '범인'의 레벨로 하강하는 경우.

이 유형은 두 가지 패턴으로 대별된다. 먼저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앞서 언급한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으로 대표되듯, 소설의 화자 자체가 범인인 케이스다. 이에 대해서는 새삼 반복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거기서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작가─범인'이라는 논리적 유형의 침범(레벨의 혼동)이 발생하고 있다. 퀸은 이런 종류의 트릭을 있는 그대로 자신의 작품에 사용한 적은 없었으나, 『Y의 비극』 중 요크 해터가 남긴 탐정소설의 '개요'(『바닐라 살인사건』)에는 다음과 같이 확신범적인 한 줄이 적혀 있다. ── "구성: 일인칭으로 쓸 것. 범인은 나 자신."


이에 반해 약간의 주의를 요하는 것은 두 번째 케이스다. 이 케이스에서는 '범인'이 '탐정'과 동등하거나 혹은 그 이상의 지적 괴물로 돌변하여, 게임 탐정소설이 요청하는 '문제편─해결편'의 이중 구조를 다중화해 버린다. 구체적으로는 '범인'이 의도적으로 허위 단서를 배치하고 명탐정의 추리를 지명하여 조종함으로써, 작품 공간이 '(문제편─가짜 해결편)─진짜 해결편'이라는 형태로 자기 증식해 나가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사태는 '범인'이 '문제편─가짜 해결편'이라는 액자소설의 '작가'로 행세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그리스 관의 비밀』에서 막 대학을 졸업한 젊은 엘러리를 농락하는 페퍼 검사보는, 퀸의 작품에 등장하는 '메타 범인' 제1호가 다름 아니다. "페퍼는 제 특수한 추리 방식의 전례를 알고서, 저를 농락하려고 생각했던 겁니다. ──일목요연한 단서가 아니라, 제가 반드시 눈치챌 것이라 여긴, 교묘하고 에두른 단서를 남겨두었던 것이죠." 이 장편에서 퀸은 최종적인 진상을 포함해 무려 네 번의 현기증 나는 해결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러한 다중 해결의 시도 자체는 『육교 살인사건』(R. A. 녹스)이나 『독 초콜릿 사건』(A. 버클리) 같은 선례가 있다. 그러나 이들 선행 작품이 '아마추어 탐정들의 추리 대결'이라는 형태로 복수의 해결편을 동일 평면상에서 병렬 처리하며 '탐정'의 추리가 지닌 자의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데 반해, 퀸은 '작가─범인'이라는 수직축을 '작품' 내부에 접어 넣어, 복수의 해결편이 자기 지시적인 피라미드 구조를 이루도록 소설을 조립하고 있다. 이러한 '작품'의 계층화는 러셀의 논리적 유형 이론에서 파생된 타르스키의 메타 언어 설정과 평행 관계에 있으며, 탐정소설의 '구조'를 답습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생겨난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두말할 나위 없이, 『그리스 관의 비밀』 같은 '메타 범인'의 출현은 탐정소설의 닫혀 있던 중립적 시스템을 위태롭게 만드는 것이다. 작중에 흩뿌려진 단서가 '작가'의 손에 의한 진짜 단서인지, 아니면 '범인'이 꾸며낸 허위 단서인지, 소설에 마지막 마침표가 찍힐 때까지는 사실상 '결정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의 역설이 '작가─범인'이라는 논리적 유형의 혼동에서 유래하고 있음은 이미 서술한 바와 같다. 이 역설을 예민하게 간파하고, 또한 그것을 자의식화된 방법으로서 탐정소설의 '구조'로 몇 번이나 되돌려 보내는 것──1932년의 '기적'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퀸의 이토록 눈부신 '발견'이 숨어 있다.



3
탐정소설의 '괴델화'란 무슨 뜻인가. 가라타니 고진은 『언어, 수, 화폐』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괴델의 증명은, 간단히 말해 초메타 수학의 산술화──초수학에서의 기호를 괴델 수라 불리는 자연수로 번역하는 것──에 의해 그림 3과 같은 순환을 형성해 버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를 통해 클래스로서의 메타 수학이 멤버로서의 형식 체계에 끼어들어 오는 것과 같은 자기 지시적 역설을 교묘하게 구성한 것이다. 괴델의 정리는 다양한 의미를 지니지만, 우리의 맥락에서 그것은 칸토어가 발견한 역설을 다른 형태로 재확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증명은 러셀과 화이트헤드의 『수학 원리』에 입각해 이루어졌다. 즉, 역설을 논리적 유형을 통해 회피했던 러셀에 대해, 설령 그렇게 하더라도 그 타이핑(유형화)이 깨어질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주: 인용 시 그림 번호를 변경함)

형식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 관의 비밀』에서 『Y의 비극』에 이르는 퀸의 장편들은 괴델의 증명이 밟아간 수순을 탐정소설의 맥락에서 재현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가령, 그림 3의 각 항목 대신 '작가─범인─시체'라는 계열을 대입해 보면 그림 4를 얻을 수 있다. 그러면 앞 절에서 서술했듯, '벌스톤 선공법'을 사용한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과 『X의 비극』은 그림의 ① 단계에, 그리고 '작가=메타 범인'이 '작품' 내부에 출현하는 『그리스 관의 비밀』은 그림의 ② 단계에 대응하게 된다.


위의 세 작품을 토대로 쓰인 『Y의 비극』에는, 앞 절에서 지적한 것처럼 ①과 ②의 단계가 이미 직조되어 있다. 그러나 탐정소설사를 새로 쓰는 결정적인 도약이 일어나는 것은, 요크 해터가 생전에 적어 둔 탐정소설 '개요'를 드루리 레인이 발견하고, 그 줄거리와 현실의 살인 사건 사이의 사상(寫像) 관계를 깨닫는 시점에서다. 이 '개요'가 작중에서 수행하는 역할은 한마디로, 괴델의 증명에 있어서 초메타 수학의 산술화──초수학에서의 기호를 괴델 수라 불리는 자연수로 번역하는 것과 같다. 즉 '개요'의 '작가'인 요크 해터는 이야기 서두에서 자1살하며 일단 '시체'의 레벨로 돌려보내진다(③). 하지만 그가 남긴 '개요'는 죽은 요크 자신을 '범인'으로 지목하는 것이며(=자기 지시적 역설), 요크의 손자 재키의 손에 의해 범행은 '개요'의 줄거리 그대로 실현된다(④).


이러한 프로세스가 괴델의 증명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똑같은 순환을 구성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요크 해터(계획범)와 재키(실행범)가, 후기 퀸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주제로 나타나는 '부─자' 관계가 아니라 '조부─손자'의 관계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부─자'의 상하 관계가 이중화되어 있음을 나타내며, 『Y의 비극』이 그림 4처럼 순환적인 구성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과 조응한다.


이러한 순환은 탐정소설의 형식적 정초가 파탄 났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궁극적인 메타 탐정소설이란 있을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Y의 비극』에서는 실행범인 재키조차도 그림 4의 순환 과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재키는 해결편 직전에 살해되어, ④의 프로세스를 답습하듯 '시체─범인' 레벨의 혼동을 재차 연기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키를 살해한 '범인'은 이야기의 마지막 한 줄에 이르러서도 명확하게 이름이 지목되지 않는다. 이는 게임 탐정소설의 룰에서 보자면 노골적인 결여에 다름 아니지만, 두말할 나위 없이 독자는 드루리 레인이 마지막에 보여주는 '비통한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레인의 침묵은 『Y의 비극』의 클라이맥스에서 하나의 완전범죄가 실행되었음을 웅변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Y의 비극』 에필로그는 탐정소설이 그 '형식화'의 극한에서 탐정소설이라는 사실 자체를 배신해 버리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이 장면에서 드루리 레인은 이른바 탐정소설의 '외부'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명탐정인 레인이 직접 손을 써서 구제 불가능한 '범인'을 단죄해 버린 데서 초래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레인의 침묵으로 인해 초래되었다고 해야 한다. 바꿔 말해 『Y의 비극』이라는 '작품'의 순환 구조는 해결편에서의 레인의 침묵, 즉 '작가'가 궁극적인 '범인'의 이름을 지시 대상으로 명기하지 않음으로써 간신히 그 균형을 지탱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탐정소설의 '외부'라는 것이 그 '형식화'의 극한에서 네거티브하게만 제시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4
두말할 나위 없이 앞 절의 결론은 '안티 미스터리'라는 개념을 선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에는 함정이 숨어 있다. 형식 체계의 '외부'는 '형식화'의 극한에서 네거티브하게만 제시될 수밖에 없다는 사고의 프레임은, 탐정소설의 맥락에서도 일종의 부정신학적인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부정신학'이란, 포지티브한 언어 표현으로는 결코 포착할 수 없는, 뒤집어 말하면 네거티브한 표현을 매개로 해서만 포착할 수 있는 어떤 존재가 있다, 혹은 최소한 그 존재를 상정하는 것이 세계 인식에 필수 불가결하다고 보는 신비주의적 사고 전반을 폭넓게 가리킨다. 우리는 『Y의 비극』이 이룩한 퀸의 성취를 최대한으로 평가하면서도, 동시에 그 평가가 부정신학적 사고의 함정에 빠져버리는 것을 경계해야만 한다.


아즈마 히로키는 '자크 데리다에 관하여'라는 부제를 단 『존재론적, 우편적』에서 위와 같은 사고의 프레임을 '괴델적 탈구축(해체)'이라 총칭한 뒤, 가라타니 고진의 '형식화'에 바탕을 둔 여러 고찰을 그것이 부정신학적 사고에 한없이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한다 (이 시기 가라타니의 '신비주의'에 대한 경도는, 후기 퀸이 탐정소설을 유대 비교(秘教)적인 신학 체계에 접속시키려 했던 것과 평행 관계에 있다). 나아가 아즈마는 제2기 데리다의 저작을 원용해 '우편적 탈구축'이라는 가설 개념을 상정하고, 이를 통해 '부정신학'에 대한 저항선을 그으려 시도하고 있다. 퀸론의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게 되므로 여기서는 상세하게 파고든 설명은 생략하겠지만, '우편적 탈구축'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데리다가 '우편', '편지'의 은유를 사용한 전략적 필연성을 꽤 분명하게 포착할 수 있다. 그 은유를 사용하는 데리다는 '불가능한 것'을 사유하기 위해 시스템 전체를 비록 부정적으로나마 언급할 필요가 없다. '불가능한 것'은 행방불명된 우편물로 이미지화된다. 그곳에서 이제 그는, 먼저 시스템 전체를 형식화하고 그로부터 "진위를 결정할 수 없는 명제가 적어도 하나는 있다"라는 명제를 도출하는 괴델적 논리, 즉 우편 제도 전체를 조망하고 그로부터 "배달이 완료되지 않는 편지가 적어도 하나는 있다"라는 명제를 도출하는 라캉적 논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어떤 편지가 행방불명(데드)이 되는 것, 바꿔 말해 기의 없는 기표가 되는 것은 우편 제도가 전체적으로 불완전해서가 아니다. 보다 세부적으로, 매번 이루어지는 기표 송부의 취약함이 편지를 행방불명으로 만든다. 행방불명된 편지는 그 도래 가능성(à-venir) 속에서 무수히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그 송부의 취약함이야말로 다름 아닌 '에크리튀르(écriture)'라 불리는 것이다. 데리다적 탈구축에는 이제, 단절되고 복수화된 기표 네트워크의 파편밖에 보이지 않는다. '불가능한 것'은 그 파편에서 나타난다. 상징계의 전체를 조망하는 것은 애당초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제2장 두 통의 편지, 두 가지 탈구축」)


다소 뜬금없게 들릴지 모르지만, 여기서 아즈마(東)의 논의를 참조하는 것은 『재앙의 거리』(1942)로 독자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서다. 이 장편은 노무라 요시타로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을 때 『배달되지 않은 세 통의 편지』로 제목이 바뀌었는데, 이 일본어 제목은 아즈마의 이론적 관심의 향방과 기묘하게 들어맞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재앙의 거리』라는 작품은 『Y의 비극』과 대비해 봄으로써, 괴델적 논리와는 또 다른 형식을 갖춘 탐정 소설의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아래에 적는 내용은 성급하게 떠오른 생각을 메모한 초고에 불과하지만, 퀸 독해 프로그램의 한 가닥 보조선으로서 간단히 밑그림을 그려보고자 한다.


『재앙의 거리』와 관련해서는 크리스티의 『비뚤어진 집』(1932)과의 유사성이 종종 지적된다(예를 들어 『본격 미스터리를 이야기하자! [해외편]』에 실린 니카이도 레이토의 발언 참조). 이러한 지적도 수긍할 만하지만, 한편으로 간과되기 쉬운 점은 『재앙의 거리』가 다름 아닌 퀸 자신의 손으로 『Y의 비극』을 직접 변주해 낸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두 작품은 얼핏 보면 전혀 다른 작풍을 띠는 듯하지만, 플롯의 기본적인 성격을 비교해 보면 그 유사성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난다. 요약해 보자. (1) 아내에게 핍박받는 유약한 남편이 아내의 살해를 계획한다. (2) 남편은 몇 차례에 걸친 단계적 범행 계획을 세우고, 이를 문서로 기록한다. 『Y의 비극』에서는 요크 해터의 탐정 소설 '줄거리'가, 『재앙의 거리』에서는 여동생에게 보낸 세 통의 편지가 이에 해당한다. (3) 남편은 아내 살해를 단념하지만, 범행 계획이 적힌 문서는 파기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데드 스톡(Dead Stock)이 되고 만다. (4) 일정 기간이 지난 후, 제3자가 범행 계획이 적힌 문서를 입수하여 그 각본대로 범행을 실행에 옮긴다.


『Y의 비극』과 『재앙의 거리』의 공통점은 이처럼 개요 수준에만 머물지 않는다. 가령, 두 작품 모두 범행에 독극물이 사용되며, 범인은 혐의를 벗기 위해 스스로 독을 마신다. 또한 피해자가 다른 사람을 노린 범행에 휘말려 실수로 살해당한 것처럼 사건을 위장하는 것이 스토리 전개상 주요 모티프가 된다는 점에서도 궤를 같이한다. 나아가 범행을 계획했던 남편 자신은 어느 작품에서든 완전히 무력화되어 불가피한 침묵을 강요받는다. 『Y의 비극』의 요크 해터는 이미 죽어 있고, 『재앙의 거리』의 짐 하이트는 아내 노라의 범행을 감싸기 위해 침묵을 지키다 결국 요크처럼 자1살하고 만다. 등등, 등등.


이러한 수많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재앙의 거리』는 『Y의 비극』과 완전히 단절된 작품인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기존에는 이러한 단절의 인상을 퀸이 '추리의 한 문제'에서 '소설'로 작풍의 전환을 꾀했기 때문이라고 보았으나, 이 해석은 너무나도 피상적이며 두 작품 사이에 가로놓인 '구조'적 변질의 양상을 간과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이 변질은 플롯을 구성하는 제반 요소들을 수직적으로 배치할 것인가, 수평적으로 배치할 것인가 하는 선택의 차이와 관련이 있다. 알기 쉬운 예를 들자면, 『Y의 비극』에서는 계획범과 실행범의 관계가 '조부-손자'라는 혈연의 상하 관계에 의존하는 반면, 『재앙의 거리』에서는 그것이 '부부'라는 동등한 수평적 관계로 바뀌어 있다. 그로 인해 태생을 같이하는 '각본 살인' 플롯이 전자에서는 '조종'이라는 지배-복종 관계를 구성하는 데 반해, 후자에서는 두 사람 사이의 상대적인 커뮤니케이션의 비대칭성(전이/역전이)을 부각하는 결과를 낳았다. 바꿔 말해, 『재앙의 거리』라는 작품에서는 사건 전체를 조망하는 초월적인 시점(메타 레벨)이 등장하지 않는다.


같은 맥락은 탐정 엘러리의 역할에도 적용된다. 『재앙의 거리』의 엘러리에게는 어떤 면에서 드루리 레인의 존재가 뚜렷하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는 '엘러리 스미스'라는 '가명'을 쓰고 저주받은 하이트 가문을 드나든다. 엘러리와 연인 사이가 되는 막내딸 패트리샤 라이트가, 페이션스 샘과 똑같이 '팻'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것은 필시 우연이 아닐 것이다(패트리샤가 퀸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고 고백하는 대목은 필연적으로 복면을 쓴 바너비 로스의 유령을 소환해 내고 만다). 하지만 레인의 주박이 느껴지는 한편으로, 엘러리는 레인처럼 특권적인 메타 레벨의 높은 곳에서 사건을 투시하는 것을 거부한다.


퀸이 작중에서 탐정이 차지하는 입장의 결정적인 차이를 의식하고 있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Y의 비극』의 클라이맥스에서 레인이 직접 독이 든 우유를 바꿔치기해 재키 해터를 살해하는 장면과, 『재앙의 거리』 중 '엘러리 스미스, 증인석으로'라는 제목이 붙은 법정 신을 비교해 보면 그 사실은 명백해진다. 앞서 말했듯, 전자에서 레인은 '신의 대리인'으로서 구제 불가능한 죄인을 벌하는 동시에 침묵을 택함으로써 작중에서 불가침의 지위를 지키려 한다. 그런데 후자에서는 엘러리가 직접 배심원들을 향해 "저라면 할 수 있었을 겁니다"라며 폭탄 발언을 던지는 것이다.
"잘 들으십시오, 제가 홀 문으로 살그머니 들어가 부엌을 몇 걸음 만에 가로질러, 뒷문에 있는 짐이나 로라 모르게 식기실에 들어가 칵테일 중 하나에 비소를 넣고 다시 똑같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데는 단 10초면 충분합니다……."


여기서 엘러리의 증언(있었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은 『Y의 비극』 클라이맥스에서 레인이 보인 행동을 그대로 덧그린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것은 검찰 측을 교란하기 위한 법정 전술 중 하나에 불과하며, 그마저도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이는 법정에서 펼쳐지는 언어 커뮤니케이션의 일회적인 세부 사항 속에서, 엘러리의 증언이 행방불명(데드) 상태가 되어버림을 의미한다. 그러한 장면을 그려냄으로써 퀸은 드루리 레인의 침묵이 체현하는 '부정신학(否定神学)'의 함정에 대해 스스로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초기 작풍에 비해 『재앙의 거리』는 논리적인 플롯이 이완되었다는 지적이 종종 나온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이완'일까? 우리는 오히려 이 작품 속에서 부정신학적 사고에 대한 퀸의 저항을 찾아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거기에는 탐정 소설을 시스템의 전체성이라는 주박에서 해방시켜, 미시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일회성을 향해 새롭게 열어젖히는 회로의 가능성이 은밀하게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젠장 또 아즈마 히로키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