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기서 나 자신에 관해 알고 있는 좋은 점을 떠벌리는 데 거리낌이 없다면 나는 어리석은 바보가 될 것이고, 마찬가지로 내가 잘 알고 있는 결함을 세상 사람들이 다 알게 한다면 그것 역시 바보짓일 것이다. 선한 의지라고 하더라도 자신에 관한 진실을 털어놓는 사람은 없다. 히포의 경건한 주교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제네바의 루소, 특히 동시대인들보다 더 기만을 일삼고 자연과 동떨어진 사람인데도 자신을 진실과 자연의 사람이라고 칭했던 후자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매우 교만한 사람으로 좋은 특성이나 아름다운 행동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기보다는 자신을 비판하기 위해 가장 파렴치한 것을 발명한 장본인이다. 그가 자신을 비방했던 것은, 나와 동향 사람인 가련한 그림 형제와 같은 사람들을 진실처럼 보이는 그럴듯한 허상으로 비하하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실제로 저질렀던 범죄를 감추기 위한 거짓 고백일까? 잘 알려진 것처럼, 우리에 관해 떠도는 수치스러운 이야기들은 그것이 사실일 때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들지만, 그것이 그저 날조된 것이라면 우리의 마음은 큰 상처를 입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루소가 무고하게 누명을 쓰고 쫓겨난 하녀 때문에 그의 명예와 업적의 대가를 치르도록 만든 리본을 훔치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그는 도둑질에 재능이 없으며 은거지에 숨은 곰처럼 너무 어리석고 굼뜬 사람이었다. 그는 다른 범죄로 책임을 져야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도둑질은 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자신의 아이들을 보육원으로 보내지 않았다. 마드무아젤 르바세르의 아이들을 보냈을 뿐이다. 30년 전에 독일의 저명한 심리학자 중 한 분이 내게 《고백록》의 한 구절을 가리키며 루소가 그 아이들의 아버지일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추론할 수 있다고 했다. 허영심 많고 불평꾼인 루소는 자식을 아끼는 아버지가 아니라는 의심을 받는 것보다 차라리 야만적인 아버지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택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을 비방했던 루소는 우리의 유전적 결함, 즉 우리는 늘 실제의 모습과 다르게 세상에 보이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고수했다. 그러므로 그의 자화상은 기만이다. 훌륭하게 그려진 그림이지만 멋진 속임수인 거다."


─하인리히 하이네, 고백록 中



고백록의 표제 하에 고백이라는 장르 자체의 불가능을 교묘하게 논증하며, 동시에 자기 자신도 인식론적 조건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을 아이러니로 재-기술하기


슐레겔, 키르케고르, 니체 등이 종교적 귀의건, 광기건 간에 결국 도취로 기울어지고, 로티마저 잔혹함의 최소와 자유민주주의라는 비-아이러니적 앵커에 기댄 것과 대조적임


도취와 해부가 서로를 강화/악화하는 공모 관계의 의인화



개인적으로 갤주가 좀 흥미로운 비교대상이라 생각함


갤주도 하이네 못지않게 아이러니와 자기인식의 메커니즘을 꿰뚫고 있었지만, 결국 자연인 기미타케에겐 기착지가 있었고, 또 도취의 대상도 있었음


<태양과 철>이나 <XX독본>들을 보면 스스로의 자기인식이 얼마나 예리한 동시에 무력한지, 너무 잘 드러남


지젝의 물신적 부인("나는 이걸 너무 잘 알고 있어. 그렇지만/그렇기에..")


혹은 아감벤의 멜랑콜리(소유한 적 없고 현존한 적도 없는 대상을 상실했다고 선언하고 그 부재를 극화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지는 관계성)


허구임을 알면서도, 또 허구임을 알기에 아름다우며, 그 아름다움에 헌신이 절실해지는 나선형 구조



그 결과가 도내 S급 도M마조다운 복부페깅 공개수치플이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