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1. 인간안의 세계 정신. 서양 철학사에 우뚝 선 당대 최고의 철학자
헤겔 – 인간 안의 세계 정신
1. 서양 철학사에 우뚝 선 당대 최고의 철학자
“천박하고, 우둔하고, 역겹고, 메스껍고, 무식한 사기꾼인 헤겔은 전례없이 뻔뻔스럽고도 어리석은 실없는 소리들을 잔뜩 늘어놓았는데, 이것을 그의 상업적인 추종자들은 불멸의 진리인 양 나팔을 불어댔으며, 바보들은 그것을 진실인 줄로 알아 환호하며 받아들였다. 헤겔은 교육받은 한 세대 번체를 지적으로 파멸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지극히 명료하게 표현된 이 글은 어떤 사람이 순간적인 실수로 내뱉은 것은 아닐 것이다. 이 글은 분명 깊이 생각한 다음 발표한 것으로, 이 글을 쓴 사람은 다름 아닌 아르투르 쇼펜하우어였다. 쇼펜하우어는 일시적으로 치미는 분노에 못 이겨 이런 글을 쓴 게 아니었다. 그의 저작들은 헤겔에 맞서 꾸준히 새로운 공격을 퍼붓는다. 그는 헤겔을 “불쌍한 후원자”, “정신성을 가장한 괴물”, “속을 뒤집어 놓는 사람”이라고 표현하였다.
또한 그의 철학에 대해서는 “내용 없는 헛소리”, “무의미한 수다”, “철학적인 희극”, “지금까지는 그저 정신 병원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무의미하고 미친 듯한 언어들의 뒤범벅”이라고 한다. 그러나 바로 이 사람이, “그 이전의 어느 누구보다도 헛소리를 매끄럽게 번드르한 말로 지껄이는” 그가, “맥주집 주인 같은 모양을 한” 이 “모순투성이의 서생”이 30년이란 긴 세월 동안 독일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간주되어 왔다. 그렇지만 후세에는 헤겔에 대한 진실이 폭로될 것이라고 쇼펜하우어는 예언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헤겔이 너무 “지나치게 경멸스러운 짓”을 하고 있으며 따라서 “후세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될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후세 사람들은 헤겔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들은 얼마 동안은 그를 거의 잊고 있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의 사유는, 쇼펜하우어의 그 모든 예언에도 불구하고, 근대에서는 오직 칸트만이 그에 필적할 만한 중요성을 획득하게 된다. 헤겔에 관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저작이 저술되었고, 전 세계에 헤겔 학회가 결성되었으며, 온갖 부류의 헤겔 학도가 생겨나게 된다. 헤겔에게 경도되기를 거부하는 사람조차도 진지한 의미로 철학을 하려고 든다면 그와의 한판 승부를 회피할 수 없게 되었다. 더 나아가 헤겔은 그의 제자인 마르크스를 통해 우리의 현세계의 구체적인 사건에까지 관여하고 있다. 그의 사상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헤겔을 공격한 쇼펜하우어의 장광설은 잊혀졌다. 이 일은 후세 사람들이 제대로 파악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쇼펜하우어의 글에서 보이는 도가 지나친 분노의 표현은 대체로 개인적인 원한에 근거를 두고 있는 듯해 보이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대학교수로서 헤겔과 경쟁하려 했지만 참패를 당하고 만다. 그는 그의 사유가 다른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고 확신한 나머지, 이제 신출내기 철학 사강사인 주제에 자신의 강의들을 헤겔의 강의와 동일한 시간대로 옮겨 개설한다. 그런데 예상과는 반대로 학생들은 헤겔의 강의실로 몰려들 뿐 쇼펜하우어의 강의실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한 학기를 마친 후 쇼펜하우어는 그의 강의를 중단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의 청중이란 텅 빈 의자들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듯 학생들이 헤겔에게로 몰려들었다는 것은 물론 놀랄 만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의 강의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고, 헤겔 또한 학생들이 감동할 만한 달변가도 못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강의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어떤 힘이 있었다. 그에게는 강의를 듣는 학생을 휘어잡는 힘이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충실했던 한 학생은 우아한 필치로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기운 없이 다소 언짢은 듯 머리를 낮게 숙인 채 몸을 움츠리고 앉아서 그는 커다란 노트를 앞뒤로 넘기고 위아래로 훑으면서 계속 말을 하며 무엇인가를 찾았다. 끊임없는 헛기침과 잔기침은 말의 유연한 흐름을 계속 방해했고, 그래서 각 문장은 따로따로 떨어지거나 긴장된 어조로 갈라져 나왔으며 때로는 뒤죽박죽 섞이기도 했다. 모든 낱말과 모든 음절은 아주 힘들게 조각조각 발음되었는데 금속성의 음색을 띤 억센 슈바벤 지방 사투리는 마치 발음되는 하나하나의 낱말이 가장 중요한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기이한 중량감을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깊은 존경심을 불러일으켰고 그에게 경의감을 품도록 만들었다. 가슴 벅차게 사람을 사로잡는 진지함과 소박함에 이끌려 그 모든 마땅찮은 상황 속에서도 끈기있게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 해독해 낼 수 없어 보이는 것들의 밑바탕을 저 위압적인 정신이 기막힐 정도로 훌륭하게, 담대한 자기 확신감으로 편안하고도 순탄하게 문제를 파헤치고 연결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목소리는 차츰 커지고 눈은 모인 청중들 너머로 날카롭게 번득이며, 뿌리 깊은 확신의 섬광이 소리 없이 타오르며 빛을 발했다. 그러는 동안 그는 결코 미욱한 점이 없는 말로 영혼의 그 모든 고상함과 심오함을 헤집고 다녔다.”
베를린 대학 교수가 되기까지의 시련과 수련의 긴 세월
이처럼 일에 신들린 듯 몰두하는 자세는 그의 소년 시절부터 나타난다. 슈투트가르트 김나지움 학생인 헤겔은 일기를 썼다. 그는 순수하고도 진지한 성찰들을 때로는 독일어로, 때로는 라틴어로 일기에 적었는데, 신과 세계에 대한 조숙한 견해와 행복, 미신, 수학과 자연 과학, 세계 역사의 흐름, 심지어 ‘여성의 성적 특성’에 대해서까지 기록하고 있었다. 청년 헤겔이 여성들과 친밀한 교제를 빈번하게 가진 것은 물론 아니었다. 오히려 헤겔은 그의 동료 학우들에 대해 이렇게 분노하고 있다. “남자들은 쓸데없이 여자들과 산책 따위나 하면서 자기 자신을 망치고 터무니없이 시간을 허비한다.” 그러나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음악 연주회에 다녀와서는 이렇게 쓴다. “아름다운 여자를 바라보는 것은 상당한 즐거움을 준다.”
이러한 사소한 자유 분망한 태도를 제외하면 헤겔의 성격의 근본 특징은 헝크러짐이 없이 진지하다. 이러한 성격은 유명한 슈바벤의 신학교인 튀빙겐 기숙사에 들어가서도 그리 달라지지 않는다. 그곳에서 그는 같은 나이의 횔덜린과 다섯 살 아래의 조숙한 천재 소년 셸링과 친해진다. 그들은 모두 칸트와 프랑스 혁명에 열광했다. 헤겔은 이러한 그의 청춘 시절의 심취를 일생 동안 변함없이 충실히 지켰다. 스스로 철학자가 됨으로써 칸트의 철학에 충실했으며 프랑스 혁명 기념일에는 매년 조용히 혼자 포도주를 마시면서 그 혁명의 의미를 되새겼다. 그런데 이 세 사람 가운데 자기 내부의 열광을 가장 잘 숨긴 사람은 헤겔이었으며, 그래서 친구들은 그에게 “노인”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학업을 마친 후 헤겔은 맨 처음에 가정교사가 된다. 이 자리를 횔덜린이 소개해 주었다. 그러나 그후 그는 23세의 나이로 교수가 된 셸링의 추천으로 그 당시 철학자들의 메카로 통했던 예나에 사강사로 초빙되어 간다. 그 곳에서 그는 매우 이해하기 힘들고 심오한 의미로 가득 찬 강의를 한다. 급료가 워낙 박해 그는 정기적으로 바이마르의 문교장관이 괴테에게 보조금을 달라는 청원을 해야만 했다. 그는 예나에서 프랑스 혁명군이 진입하는 것을 보았다. 나폴레옹이 도시로 들어왔을 때, 헤겔은 “세계 정신”이 말을 탄 것을 보았다고 썼다. 그러나 그 세계 정신은 헤겔에게 관대하지 않았다. 그의 집은 약탈당했고, 전쟁의 혼란으로 봉급 지급이 중단되었다.
실직당한 철학자는 새로운 직장을 찾아야만 했다. 그는 밤베르크에서 편집인으로 활동했으나 곧 “신문 함선(Zeitungsgaleere)”에 싫증을 느끼고 뉘른베르크의 김나지움 교장으로 간다. 난해한 철학자인 그가 어떻게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일을 하며 견뎌냈는지에 대해서는 시인 클레멘스 브렌타노의 편지에서 상당한 흔적을 찾아낼 수 있다. “나는 뉘른베르크에서 김나지움의 교장인 존경할 만하지만 융통성 없는 헤겔을 보았다. 그는 영웅 서사집과 니벨룽겐의 노래를 낭독하면서 그것을 즐기기 위해 읽는 도중에 그리스어로 번역해서 낭송하곤 했다.”
마침내 헤겔은 46세 때 교수가 되는데, 처음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있다가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간다. 물론 베를린에 익숙해지기까지에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베를린이 하이델베르크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과 “지겹도록 많은 술집”이 있다는 점이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고, 꽤 비싼 생계비와 방세 때문에 걱정한다. 그러나 그는 곧 베를린에서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그는 특히 이 점을 본을 여행하는 동안 분명하게 깨닫는다. 본은 전혀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그 점에 대해 아내에게 이렇게 쓴다. “본은 울퉁불퉁하고 거리는 좁아터졌다오. 시의 근교나 경치 또는 식물원이 매우 아름답기는 하지만 말이오. 그러나 나는 베를린이 더 마음에 드오.” 사람들은 이에 대해 헤겔의 첫 번째 전기 작가가 쓴 그의 사교적 기질에 대한 글을 읽는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헤겔은 베를린의 부인들의 사교계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또한 반대로 부인들의 사교계는 곧 이 훌륭하고 재기 넘치는 교수를 좋아하게 되어 사랑으로 감싸고 돌보았다.”
(Wilhelm Weischedel, Die philosophische Hintertreppe. 34 große Philosophen in Alltag und Denken, dtv 1979.)
쇼펜하우어가 잊혀졌다는 건 뭔 개헛소리인지 ㄷㄷ
심리학자 카를 융 자서전에 이런 글이 있음 <헤겔은 난해하고 거만한 문체로 나를 겁먹게 해서 나는 노골적인 불신감으로 헤겔을 대했다. 헤겔은 마치 자신의 언어 구조 속에 갇혀 그 감옥에서 거드름을 피우는 몸짓으로 돌아다니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의 탐구가 가져다준 가장 큰 결실은 쇼펜하우어였다. 쇼펜하우어는 눈에 보이도록 여실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고통과 고난에 대해서 처음으로 이야기한 사람이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이것을 주목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 융을 누가 읽음? 사이비 종교학 하는 애들이나 읽는 유통기한 50년짜리 학자인데.
@ㅇㅇ(211.178) 헤겔도 사이비 철학이지 좆병신 장1애인 새끼야 전체주의 나치즘 빠는 개병신 애55미 창년 새끼야 ㅋ
@ㅇㅇ(211.178) 헤겔은 전체주의 나치즘의 기원이고 국가와 역사의 진보를 미화한 인간쓰레기다 - 칼 포퍼 -
자폐가 있으면 입원을 해라 개지랄떨지말고
포퍼가 비판한 부류 중 하나가 융 같은 정신분석 계통인데, 융 까니까 발광하면서 포퍼를 인용하는거는.. 뇌가 없노?
@ㅇㅇ(211.178) 가서 헤겔 많이 보세요 개병신 장애인 새끼야 ㅋㅋ
@ㅇㅇ(211.178) 누가 융 읽었다고 말한적있음? 난 그런말 한적도 없는데 병신 장애인 새끼가 ㅋ
@ㅇㅇ(211.178) 병신이 어디서 헤겔 철학 책 읽었다고 허세는 가득하네 개병신 좆장1애인 거지 백수새끼가 ㅋㅋ
@ㅇㅇ(211.178) 좆백수라 철학 읽을 시간 넘치노 ㅋㅋ
쇼펜하우어 말이 맞다 ㅇㅇ
협소한 철학사에서만 헤겔이 좀 더 먹어주고 그것도 20세기 이후엔 애매해졌는데, 쇼붕이는 생각보다 더 넓은 영역에서 큰 영향 끼침
헤겔 사생아 마르크스때문에 영향력도르도 안먹히는데 댓글에 쇼장연들 기습시위 뭐노
처참한 문해력으로 딴 소리만 하고 있는데 ㄹㅇ 어디서 몰려왔지?
처참한 문해력으로 딴 소리만 하고 있는데 ㄹㅇ 어디서 몰려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