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의 명예 학위 수여 반대 서한,
더 타임스 (런던). 1992년 5월 9일 토요일
편집장님께,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5월 16일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씨의 명예 학위 수여 여부를 두고 투표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수년간 데리다 씨의 유별난 행보에 학술적, 직업적 관심을 기울여온 철학자 및 여러 학자로서, 저희는 다음의 내용이 이 사안을 둘러싸고 벌어진 대중의 논쟁에 꼭 필요한 빛을 비춰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데리다 씨는 자신을 철학자라 칭하며, 그의 저술들 역시 철학이라는 학문의 글이 갖추어야 할 특징들을 어느 정도 띠고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의 저술이 미친 영향력은 예를 들어 영화학이나 불문학, 영문학 등 전적으로 철학 외적인 분야의 학과들에만 국한되어 왔습니다.
철학자들의 눈에, 특히 전 세계 유수의 철학과에서 활동하는 학자들의 눈에 데리다 씨의 저술은 철학계에서 통용되는 '명료성'과 '엄밀성'의 기준에 도무지 미치지 못합니다.
만약 어떤 (가령) 물리학자의 연구가 주로 타 학문 분야의 종사자들에게만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면, 저희는 그것만으로도 해당 물리학자가 명예 학위를 받을 만한 적합한 후보인지 의구심을 품기에 충분한 근거가 된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데리다의 이력은 열기로 가득했던 1960년대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의 저술들은 여전히 그 시대적 기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저술의 적지 않은 부분은 교묘한 농담과 말장난(‘논리적 남근주의(logical phallusies)’ 따위)으로 이루어져 있는 듯합니다. 저희가 보기에 데리다 씨는 다다이스트나 구체시인(concrete poets)들이 쓰던 눈속임이나 기믹 같은 것들을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경력을 쌓아온 것에 가깝습니다.
물론 이런 측면에서 그가 상당한 독창성을 보여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말씀드리건대, 저희는 그러한 독창성이 그를 명예 학위의 적합한 후보로 만들어준다는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많은 프랑스 철학자들은 데리다 씨를 보며 그저 무언의 당혹감만을 느낄 뿐입니다. 현대 프랑스 철학이 한낱 조롱거리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된 데에는 그의 익살맞은 기행(antics)이 크게 일조했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보기에 데리다의 방대한 저술들은 정상적인 학문적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기괴하게 일그러뜨렸습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독자가 아주 쉽게 확인할 수 있듯이(이를 확인하는 데는 책의 아무 페이지나 펼쳐봐도 충분합니다), 그의 저서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문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기꺼이 의심을 거두고 데리다 씨를 믿어보려 했고, 해석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이 있는 언어 이면에는 필시 심오하고도 미묘한 사상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 주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 언어를 뚫고 들어가 보려는 노력을 기울여보면, 적어도 저희에게는 아주 분명해집니다. 설령 그 안에 일관된 주장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거짓이거나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 말입니다.
저희가 보기에 이성, 진리, 학문의 가치를 향한 반쯤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의 공격에 불과한 것들을 기반으로 쌓아 올린 학문적 지위는, 결코 명문 대학이 명예 학위를 수여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고 저희는 주장합니다.
진심을 담아,
배리 스미스 (Barry Smith, <모니스트(The Monist)> 편집장)
한스 알베르트 (Hans Albert, 만하임 대학교)
데이비드 암스트롱 (David Armstrong, 시드니)
루스 바칸 마커스 (Ruth Barcan Marcus, 예일)
키스 캠벨 (Keith Campbell, 시드니)
리처드 글라우저 (Richard Glauser, 뇌샤텔)
루돌프 할러 (Rudolf Haller, 그라츠)
마시모 무냐이 (Massimo Mugnai, 피렌체)
케빈 멀리건 (Kevin Mulligan, 제네바)
로렌조 페냐 (Lorenzo Peña, 마드리드)
윌러드 반 오먼 콰인 (Willard van Orman Quine, 하버드)
볼프강 뢰트 (Wolfgang Röd, 인스브루크)
카를 슈만 (Karl Schuhmann, 위트레흐트)
다니엘 슐테스 (Daniel Schulthess, 뇌샤텔)
피터 사이먼스 (Peter Simons, 잘츠부르크)
르네 톰 (René Thom, 뷔르쉬르이베트)
댈러스 윌러드 (Dallas Willard, 로스앤젤레스)
얀 볼렌스키 (Jan Wolenski, 크라쿠프)
국제 철학 아카데미(Internationale Akademie für Philosophie), Obergass 75, 9494S Schaan, 리히텐슈타인.
데리다의 명예 학위 수여 반대 서한 재조명
에릭 슐리서
오늘 나는 객원 강연을 하면서, 경제 철학자로서 내가 겪었던 어떤 결정적인 인식 변화의 경험을 언급했다. 당시 나는 데리다의 주제들을 차용하여(그리고 이를 혁신적으로 활용하여) 수리경제학의 철학을 설명하고 명확히 묘사해 낸 한 저명한 수리경제학자를 만났다. 그는 그 과정을 통해 이론가로서 수리경제학자가 살아가는 일종의 '생활세계(life-world)'가 과연 어떤 것인지를 내게 피부로 느끼게 해주었다. 아직 종신교수직을 받기 전이었던 시절에 겪은 이 만남은, '데리다는 헛소리다'라고 믿었던 내 확신을 재고하게 만들었고, 데리다의 저술에 대한 나의 지식이라는 것이 기껏해야 아주 간접적인 수준이었다는 사실(너그럽게 표현해서 그렇다는 것이다)을 깨닫게 해주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데리다에 대한) 타인들의 인식론적 권위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는 내 지적 자아 이해 중 과연 얼마만큼이 나의 의식적인 개입 없이 타인으로부터 그저 물려받은 것인지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강연을 준비하면서, 나는 케임브리지 대학이 데리다에게 명예 학위를 수여하려는 결정에 항의했던 그 유명한 서한을 다시 찾아보았다.
이 서한에 서명한 사람들 대부분이 내가 대학원을 졸업할 무렵 읽었던 데리다의 분량보다 더 많이 읽었을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는 점이 종종 지적되곤 한다. 하지만 서명자들 역시 서로의 저술을 제대로 읽어보았을 가능성이 지극히 낮다는 점은 잘 언급되지 않는다. (물론 예외는 있다! [콰인과 바칸 마커스가 서로의 연구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쯤은 내게 굳이 상기시킬 필요 없다.]) 이들은 영미 분석 철학자, 19세기와 20세기 철학을 다루는 영미권의 '분석적' 철학사가, 유럽 및 영미권의 후설 학파, 유럽의 '오스트리아 학파' 철학자, 유럽 분석 철학자, 그리고 나로서는 딱히 뭐라 규정해야 할지 모를 몇몇 학자들이 뒤섞인 다채로운 혼합체였다.
게다가 '유럽적(European)'이라는 단어의 사용은 어떤 의미에서는 시대착오적인데, 왜냐하면 1990년대 초만 하더라도 (요즘 ERC 연구비 지원서나 학술지 순위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술관료적인 형태의) 공유된 철학적 공간이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침 배리 스미스 본인의 증언에 따르면,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유럽 철학의 미래가 당시 걸려 있던 주요 쟁점 중 하나였다고 한다. 스미스는 정치적 마르크스주의가 붕괴한 후, 마르크스주의 이전의 다른 (지역적) "전통들"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데리다 스타일의 "허무주의"를 껴안게 될까 봐 우려했다. 스미스의 서한은 데리다에게 명예 학위가 수여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해체주의(Deconstruction)가 유럽 철학을 장악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철학계의 정치판에서 보자면 이는 스미스의 승리인 셈이다.
이 서한에서 눈에 띄는 점은 이들이 암묵적으로 정상과학(normal science)의 규범에 호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리학에 빗댄 비유가 그 증거다). "유수 학과들"에서 차출된 학과 전문가들이 "통용되는 기준"에 따라 학문적 가치를 결정한다는 식이다. (누구에게 통용된다는 말인가? 뭐, 당연하게도 "명문" 대학 유수 학과의 구성원들에게다.) 백번 양보해서 이 서한이 반박할 여지 없는 진리만을 담고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이러한 논리가 가진 자기 위주적이고 자기 강화적이며 보수적인 본질은 이제 명백해졌다. 유수 철학과 밖에서 인정받은 "영향력" 따위는 전혀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데카르트, 로크, 흄, 소로, 니체 같은 이들 역시 이러한 "가치"의 규범에 비추어 본다면 분명 함량 미달이었을 거라는 내러티브를 만들어내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직업 철학자들이 (일자리, 지위, 시간, 임용, 연구비 등을 두고 다투는) 제로섬 형태의 제도적 환경에서 활동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들에게 인식론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저런 발언을 던지는 데 필요한 증거를 수집할 유인이 애초에 존재하는지조차 전혀 불분명하다.
설령 "철학자들의 눈에" "명료성과 엄밀성"이 학문적 품질의 진정한 시금석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치더라도 (그리고 나의 이런 의구심은 차치하더라도), 사실 서명자 중 적어도 일부 학자들의 방법론이 주의 깊고 세심한 검증을 받기 시작한 것은 메타 철학(meta-philosophy)이 부상한 아주 최근의 일이라는 점은 다소 재미있는 지점이다. 명료성과 엄밀성을 끔찍이 아끼는 이들이라 할지라도, 그 "명료성과 엄밀성"을 가뿐히 능가할 수 있는 다른 기준들(진리, 생산성, 사회적/도덕적 효용 등)이 존재한다는 것쯤은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서한의 또 다른 두드러진 특징은 철학에 대한 기여로서 "다다이스트나 구체시인들"의 성취를 완전히 경멸하고 있다는 점이다. (허무주의가 아니라면 대체 무슨 철학이냐고? 뭐, 물론 내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이런 시도들을 삶의 실험적 예술에 대한 기여로 보는 편이 더 유용할 수 있다.) 분명 철학은 진지한 과업이다. 자, 우리가 굳이 지젝(그에 비하면 차라리 데리다가 고결하게 느껴질 지경이다)의 지지자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그러한 배타적인 태도로 인해 때로는 조커(광대)의 태도야말로 유일하게 도덕적으로 책임감 있는 자세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도무지 알아차릴 수 없는 꽉 막힌 위치에 놓이게 됨을 깨달을 수 있다. 무고한 피로 사방이 붉게 더럽혀진 우리의 이 타락한 세계에서는 어쩌면 늘 그럴지도 모른다. 물론, 탐구해 볼 가치가 있는 더 진지한 태도들도 틀림없이 존재한다. 내 말이 무조건 옳다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지만, 광대의 철학을 선험적으로 배제해버리는 것은, 글쎄, 그 자체로 하나의 철학적 오류다.
여담이지만, 서명자들은 놓치고 있는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다. 그것은 소크라테스 이후로 모든 진짜 (그리고 가짜) 철학은 언제나 "조롱"받을 위험을 무릅쓰고 있으며, 철인왕(philosopher-kings)이 부재하는 한 그러한 조롱은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명료성과 엄밀성의 기준을 수호하기 위해 쓰여진 서한에서 (비록 간접적으로나마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긴 하지만) 동일한 데리다의 저술을 두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깎아내리면서도—여기에는 "모든 독자"가 동의한다는 보편적 합의가 전제되어 있다—동시에 그 저술이 어찌저찌 "반쯤 알아들을 수 있고", 나아가 "거짓이거나 사소하다"고 묘사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꽤나 기묘한 일이다. (물론 나는 당신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다면—어쨌든 당신은 잘 훈련받은 학자니까—우아한 개념적 구분을 동원하여 이 세 가지 명제를 모순 없는 일관된 3원소로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의심의 여지 없이, 이 편집장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내가 지적한 삐걱거리는 불협화음들은 다채로운 직업 철학자 그룹 사이에서 급하게 합의를 도출해 내려는 조급함과 편집의 개입이 빚어낸 결과물일 것이다. 어찌 됐든 이 편지는 논쟁적 기능을 훌륭히 수행해 냈고, 나 역시 데리다의 철학적 정치가 이런 종류의 거친 반발을 자초했다는 주장에는 열려 있다. 그러나 내가 학생 시절 이 편지와 여기에 들어간 노력을 찬양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고 (나아가 다른 철학자들을 배척해야 할 때 이와 비슷한 주장들이 동원되는 것을 들어왔던) 한에서, 나는 이 서한이 데리다나 명예 학위 수여의 정치 역학에 대해 무언가를 말해주기보다는 서명자들 자신들이 대체 어떤 좁은 울타리에 얽매여 있는지를 훨씬 더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우사미 렌코 상 갑자기 나오시면
ㅋㅋㅋㅋㅋㅋ
암스트롱 콰인 말고는 모르것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