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우주라는 가설이 구상된 것은 이미 한참 전의 일이었으며, 이 우주는 지정 가능한 모든 형태들만큼이나 모든 중심을 상실했다; 그러나 바로크의 고유성은 시선점으로서의 꼭지점을 방출하는 투사를 통해 이 우주에 통일성을 다시 부여하는 것이다.


세계가 바닥의 극장, 공상 또는 환영, 라이프니츠가 말한 것처럼 아를르캥의 옷처럼 다루어진 것도 오래된 일이다; 그러나 바로크의 고유성은 환영 안으로 떨어지는 것이나 환영 밖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환영 자체 안에서 어떤 것을 실재화하는 것, 또는 그것의 방들과 조각들에 집합적 통일성을 다시 부여하는 정신적 현존을 환영에 소통시키는 것이다.


홈부르크의 공자(公子), 그리고 클라이스트의 모든 등장인물은 낭만주의적 영웅이라기보다는 바로크적 영웅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미세 지각들의 마비에 시달리며, 환영 안에, 실신 안에, 마비 안에 현존을 실재화하기를, 혹은 환영을 현존으로 변환하기를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펜테질레아-테레사? 이 바로크 영웅들은, 현존을 가장하는 것이 환각이 아니라, 환각적인 것이 바로 현존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발터 벤야민이 알레고리가 실패한 상징, 추상적 인격화가 아니라 상징과는 전혀 다른 형태화의 역량이라는 점을 보여주었을 때, 그는 바로크의 이해에 있어 결정적인 진보를 가져다주었다 상징은 영원과 순간을 거의 세계의 중심에서 결합하지만, 알레고리는 시간의 질서에 따라 자연과 역사를 발견하며, 이제 중심 없는 세계 안에서 자연을 역사로 만들고 역사를 자연으로 변형한다.


─질 들뢰즈, 주름 中




벤야민과 들뢰즈를 번갈아 덧칠해가며 읽을 때마다 바로크의 이미지를 사이버펑크로 치환하곤 함


선대가 이미 모든 걸 이룩했다는 감각, 미래가 소비된 시대 속에서, 압박감마저 희석된 나머지 자연화된 체념


늙어버린 채 태어난 아이에겐 자기 이해와 감각의 과잉은 구별되지 않게 마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