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소피스테스》 편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등장함. 이하 박종현 선생님의 번역 발췌.
“이제야 그가 사태들(ta onta), 곧 현재 또는 과거 또는 미래의 것들에 대해 밝히고 있기 때문이겠으며, 그는 명사로써 뭔가를 지칭할 뿐만 아니라 뭔가를 완성했는데, 이는 동사들을 명사들과 엮음으로써 하는 것일세. 이 때문에 이걸 우리는 '진술한다(legein)'고 말하지, 명사로써 '지칭한다(onomazein)'고만 말하지는 않거니와, 특히 이 '엮음(plegma)'에 대해 '진술(logos)'이라는 명칭으로 일컬었네” - 소피스테스 262d
단어와 단어의 결합은 문장이 되며 말을 형성함. 말을 한다는 것은 우리의 사고를 구현하는 행위이며 이를 기록하고 전달할 수단으로 가공하는 것임. 말을 한다는 것은 내가 내 생각을 내 안의 그릇에서 세상으로 내보내는 것이라는 의미가 있음. 그렇기에 헬라스어 ‘로고스(λόγος)‘에는 이성, 원칙, 설명, 말, 논리, 논변, 논의, 논거, 근거, 논술 등의 뜻이 담겨있음. 말을 한다는 것은 내 안의 그릇에 고여 있던 생각을 세상 밖으로 던지는 행위임. ‘로고스(λόγος)’에 이성과 말, 그리고 ‘논거’와 ‘설명’이라는 뜻이 동시에 담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음. 말을 하는 것은 곧 나의 선언을 통해 나만의 척도를 세우는 일이며 나의 원칙을 제작하는 행위일 것임.
하지만 혼자서 말을 한다는 것은 매우 공허할 것임. 우주에 일자가 존재하는 것을 인식해주는 타자가 없다면 일자 자신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을까? 내 말을 누군가가 읽거나 듣는다면 내 선언이 인식된 것, 그 사람의 우주에 새겨진 것이므로 내 존재, 내 자아가 더욱 선명해지는 것임. 따라서 우리가 대화를 하는 것은 단지 소통하기 위함을 넘어서 나의 세상을 넓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임. 소크라테스가 《테아이테토스》 편에서 자신은 앎의 산파라고 주장했음. 자신은 직접 앎을 만들지 못하지만, 대화를 통해서 남의 앎을 세상에 내보이는 것을 도와줄 수 있다는 의미임. 여러분의 글이 다른 사람의 사상에 불씨를 틔워줄 수 있음.
만약 나 혼자서만 생각할 경우 그것은 그냥 죽어있는 생각일 뿐임. 왜냐하면 세상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으니까. 그것이 좋은 의견이다 허접한 의견이다 라는 반응이 있어야 나의 사고가 달라질 수 있을 것이고, 설령 반응이 없어도 소극적인 누군가는 그걸 읽고 전과 달라질 수도 있음. 아무리 허접한 글이라도 누군가의 마음에 와닿는 것이 가능하단 것임. 그렇다면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계속 글을 써야지. 계속 쓰면서 나는 나의 선언을 던지고 남들은 그걸 읽으며 비웃을 수도 지지할 수도 침묵할 수도 있음. 어쨌든 내가 짧은 한 순간 누군가의 사고를 멈추고 생각할 시간을 줬다는 것에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어. 그러니까 일단 글로 쓰고 말하는 문화가 생겨야 한다고 생각함. 탐구의 시작은 대화인 것 같기 때문임. 만약 님들의 글을 아무 논리 없이 비웃는 사람이 있어서 망설여진다면 그들은 역사 속에서 ‘필로소포스(지혜를 사랑하는 자, 철학자)‘라는 타이틀도 얻지 못한 소피스테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 쿨하게 무시하고 넘어가기를 권하겠음. 왜냐하면 그럴듯한 설명 없는 의견은 그릇된 의견일 것이고 이는 생각할 가치도 없기 때문임.
요약
1. 글을 쓴다는 것: 단어들을 엮어 로고스를 만드는 행위이며, 내 삶의 원칙을 외부 세계에 던지는 주체적인 선언임.
2. 소통한다는 것: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처럼 서로의 영혼에 불씨를 틔워 지성(noesis)의 영토를 함께 넓혀나가는 참여의 과정임.
3. 망설이지 말아야 할 이유: 근거 없는 비난은 실체 없는 소피스테스의 망상일 뿐이니,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선언을 던지며 삶을 쥐어 나가야 함.
ㄹㅇ 오늘부터 내 감상에 반박하는 새기들은 죄다 소피스트로 간주하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