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들- [기형의 그림자]
진실은 사실들의 뿌리이며, 몸통이다. 사실들은 진실에서 분기한 가지들이며, 곁가지다.
가지가 모양이 각각 다르고 뻗은 자리가 저마다 있듯 사실의 사태도 저마다 틀리며, 경험으로
사실을 습득하는 시공간도 제각각이다. 우리 인간에게는 자기를 애달프게 하는 심연이 있다.
수평선 너머 서서히 잠겨 드는 황혼, 거먼 하늘에 빛나는 별들과 별자리들, 손길이 차마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한 우리의 동경은 마치 뿌리를 향한 노스텔지아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사실이라는
가지를 아무리 많이 모아 쪼개고 다듬어 엮어 배로 만들어서 항해에 나선다 해도 이타케로
가는 오디세우스처럼 결코 귀향할 수 없으니, 진실이란 가지가 무성하나 몸통은 희미한 나무이기
때문이다. 다만 사실들이 가리키는 방향, 그 지점에 아이들을 잉태한 '어머니'가 있음을 짐작할
뿐이다.
생애 대부분은 호흡에 낭비된다. 곧 자신이 살아있음을 아는 영지, 살아 가겠다는 격정, 폭풍
한 가운데서 단 하나의 생명줄을 단단히 그러쥔 손에 대한 무서운 집중은 드물게 찾아 온다.
그러기 전에 일상에 갇힌 사람들은 호흡을 낭비한다. 과호흡의 시간 속에서 사람들은 '쓸모'
에 대한 곧 '잉여'에 대해서만은 예리한 감각을 어쩔 수 없이 갖게 된다. 그렇다. 호흡이 남는
것이다. 작용은 있되 반작용이 되지 않는 무음의 세계, 반향없는 세계가 곧 일상이다.
일상에서 얻은 경험적 사실만을 시재로 하고자 한다면, 시인은 먼저 이미지나 인상을 갖지 않고
그러한 일상 흐름 밖에서 관찰자로 머무른다. 동인 시집 [기형의 그림자]는 대체로 관찰자의 시점
에서 쓴 시들을 모았다. 관찰은 사물, 사물들의 관계, 사태, 상태, 양상을 인과성에 따라 파악해야
한다. 그러니 관찰자로 변신한 시인은 인과적이고, 서술적인 시 형식을 따를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이것을 '술어=주어' 형식이라고 한다면 주어는 술어의 사태, 상태에 따라 귀속되는 주체로서
식별된다. 말하자면 주어는 술어의 잔여이다.
바람이 빨라진다
숲이 비어간다
낯익은 멧새들이 몇 마리 안 남았다
휘어진 나이테를 쓸어본다 -25p
여기서 '인과적' 표현에는 시각에 따른 시간성이 강조돼 있다. 동인집에서 인용한 시는 앞 행에서 그 다음
행과 행으로 인과적으로 계속 이어진다. 여기서 주체는 술어에 종속된 그 무엇이다. 동인집은 이러한 경험적
사실만을 강조한, 그렇게 쓰여진 시들을 모았다. 그렇다면 대체로 이러한 시들을 쓰려면 빈곤에 시달리거나,
협소한 창작의 길에서 고통받지 않는가. 왜냐하면 일상이란 자신의 호흡도 의식하지 못할 만큼 무던한 감각의
연속이고, 반향 없는 세계이기에 그야말로 고통이 아닌가!
나는 신념과 긍지 모두를
밝아오는 새벽에
파리 낚시줄을 던지기 위해
산허리를 오르는
올곧은 젊은이들에게 남겨준다.
나도 이렇게 앉아서 쓰는 일로 인해
부서져 버릴 때까지는
그러한 금속으로 만들어졌기에
-예이츠 [탑]에서 발췌, 윤정묵 역-
예이츠는 경험한 사실을 썻을가 아니면 일부 사실에 상상력을 붙였을가. 아니면 순전히 일상을 일탈한 상상력으로
지은건가. '진실'이라는 모호한 구심점에서 돋아나 흩어지는 무수한 가지들을 상상해보라. 가지가 뻗어나가는 분기점에는
진실함이라는 수액이 끝없이 흘러 들어오고 있다. 가지들은 생명수에 공통하여 자라나 나뉘고 나뉜다. 그래서 가지
들은 제각각 형태가 다르나 지향함은 같다. 왜냐하면 지향하지 못한 가지들은 진실함에서 지양되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생명이 끊겨 말라 죽었다.
산허리를 오르는
올곧은 젊은이들에게 남겨준다.
산이나 언덕, 경사지를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면 힘이 든다. 'Uphill battle'이란 표현이 오래전부터 관용적으로 쓰이고 있듯
힘듦, 노고에 대한 관념이라 해도 된다. 그렇지만 단순히 힘듦을 체험한다고 해서 예이츠가 자기 뒤를 젊은이들에게 넘기지
않는다. 힘든 일은 세상 곳곳에 널려 있지 않은가.
위대한 모든 사상은 낮고 천한 그룹에 들어갈 운명을 지닌다. 신이라는
더없이 높은 단어가 모든 매도의 문구에 들어가는 것처럼, 가장 고귀한
단어는 선술집을 어슬렁 거리지 않으면 안 된다. 가장 맑고 깨끗하고 위
대한, 가장 호기롭고 신비한 것은 이 피하기 힘든 타락을 선고 받고 있다.
(중략)
하수(河水)는 역사의 모든 장엄한 경치의 포괄적 상속자이다.
-앙리 프레드릭 아미엘 [아미엘 일기] 817p. 이희영 역-
성스러운 시원에서 출발하는 어떤 것도 아래로 순행할수록 점점 타락해 본원과는 다르게 변질돼 더러워진다. 그러니
"산허리를 오르는" 일, 물줄기를 따르지 않고 역행한다는 건, 강줄기를 따라, 지류를 거슬러, 계곡를 지나 마침내 모든 것의
시원에 이르는 여정이다. 이런 젊은이들에게 페트라르카는 앞서 말했다.
그대는 미덕의 길을 감에 단지 몇몇 동무만을 가지리니,
숭고한 영혼인 그대가 그대의 영광된 위업을
포기하지 말기를 나는 간절히 빈다오.
-페트라르카 [칸초니에레] 7. 이상엽 역-
그러니 예이츠가 말한 젊은이들은 페트라르카의 헌사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다.
예이츠가 쓴 싯구를 예로 들어서 시에는 일상 속 경험 너머로 나아갈 수 있는, 확장할 수 있는
세계가 있음을 알았다. 설령 저 싯구가 다분히 예이츠의 개인적 체험에 의존했다 해도 독자는
여려 개의 가지들을 모든 뒤에 시인의 진의에 다가설 수 있으며, 가지들이 예이츠가 생몰헸던 시기,
지역을 초월해 있음도 알 수 있다. 또한 시인은 경험적 사실에만 의존하지 않고 다양한 가지들을
유심히 관찰해 오로지 상상력으로만 또 다른 가지들을 창조해낼 가능성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나는 동인 시집 [기형의 그림자]의 취지, 곧 오로지 일상 경험 안에서 사실들을 사유하여 시재를 뽑거나
짜낸다는 발상과 결과가 못마땅하다. 특히나 서정 시인들이 '술어=주어' 형식으로 시를 씀은 앞서 말했듯
오감 중에서 시각에 대체로 의존하게 되어 사물을 시간에 따른 변화, 즉 인과성만을 포착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이런 시들은 인과성을 서술해야만이 주체를 드러낼 수 있으므로 시어는 늘어지고 주체는 계속해서
인과성에 귀속된 처지이므로 시인의 서정은 협소하게 난 길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끌려가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독갤에서 라파포트를 다 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