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의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후속 조치다

520c

-어두운 것들을 보는 데 익숙해져야만 하오. 일단 익숙해지고 나면, 그곳 사람들보다도 월등하게 잘 보게도 될 것이며, 각각의 상들이 도대체 무엇이며 또 어떤 것들의 상들인지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인데, 이는 여러분이 아름다운 것들과 올바른 것들 그리고 좋은 것들과 관련해서 참된 것을 이미 보았기 때문이오.


521c

-밤과도 같은 낮에서 진짜 낮으로 향하는 '혼의 전환'이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철학이라고 우리가 말하게 될 실재로 향한 등정일 것 같으이.-


등정을 함에 있어서 자질은 무엇보다


523a-b

-감각들의 경우에, 어떤 것들은 감각에 의해 판단된 것들로도 충분하기 떄문에, 탐구하는 데에 '지성에 의한 이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지만, 어떤 것들은 이것으로 하여금 탐구를 하도록 전면적으로 권유하네. 감각이 아무것도 건전한 것으로 되게 하지 않기 때문이지.-


525c

-말하자면 무역상이나 소매상들처럼 사고 파는 걸 위해서가 아니라, 전쟁을 위해서 그리고 또 '생성'에서 진리와 존재로 혼 자체를 향하게 함에 있어서 그 '방향 전환'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말일세.-


수의 본성을 파악하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문구는 아래라고 생각된다.


525b

-전사로서는 전열 배치를 위해 이것들을 배워야 하겠지만, 철학자로서는 '생성'에서 벗어나서 존재를 포착해야만 되기 때문이겠는데...-


위 인용문에서 나온 '생성'은 아래처럼 doxa를 뜻하는 것.


526b

-그것은 언제나 있는 것에 대한 앎을 위한 것이지, 어느 땐가 생성되었다가 소멸하는 것에 대한 앎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걸세.


또 여러 학문을 논의한다. 기하학,천문학도 나오고 시학(비록 긍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화성학 등.


간략하게 정리하면

1, 2, 3과 같은 수의 본성을 탐구하며 추상적 사유의 기초를 다지고, 기하학으로 도형의 이데아, 즉 doxa가 아닌 것을 인식하는 훈련, 천문학으로 별을 가시적으로 보는 것을 넘어서 배후에 있는 질서를 파악한다. 그리고 화성학으로 조화의 본질을 탐구한다.


여정 끝에 변증술은


532b-c

-그러나 결박에서 풀려남도, 그림자들에서 상들 및 불빛으로 향한 방향 전환도, 지하 동굴로부터 태양의 광명으로 향한 오름도, 그리고 거기에 이르러서도 아직은 동물들과 식물들 및 햇빛은 바로 볼 수 없으나, 이들 실물들이 물에 비친 신적인 투영들과 그림자들을, 태양과 대비시켜 판단할진대, 그 자체가 그런 유의 또 다른 상인 불빛에 의해 투영된 상들의 그림자들은 이미 아닌 것들을 볼 수 있음도, 말하자면 앞서 우리가 다루었던 학술들이 하는 이 모든 일은 혼의 최선의 부분으로 하여금 결박에서 풀려나 실재들 가운에서도 최선의 것의 관상으로 이끌어 올리는 힘을 갖고 있네. 마치 그때 몸에 있어서 가장 명확한 기관이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영역에 있어서 가장 밝은 것의 관찰로 인도되었듯이 말일세.-


변증술은 도대체 지금까지 말한 여러 학문과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532b-c

-그러나 그 밖의 모든 학술은 인간들의 의견과 욕망들이나 산출과 조립, 또는 일단 산출되었거나 조립된 것들의 간수 등을 모두가 지향하네. 하지만 실재의 어떤 면을 파악하게 된다고 우리가 말했던 나머지 것들, 즉 기하학이나 이에 잇따른 것들은 실재에 관해서 꿈을 꾸고 있지. 그것들이 그걸 깬 상태로 볼 수는 없음을 우리는 알 걸세. 그것들이 가정들을 이용은 하되, 이것들을 그대로 둔 채, 이것들에 대한 '설명을 해 주지' 못 하는 한은 말일세. 어떤 것에 있어서 출발점이 알지 못하는 것이고, 그 결론과 중간항들도 알지 못하는 것으로 짜여졌을 경우에, 이런 일치가 도대체 무슨 수로 지식이 되겠는가.-


예를 들어보자

기하학을 하면 사각형이나 대각선을 그린다. 즉 어디서 어디까지의 선분을 통해서 논의한다. 하지만 진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바닥에 그려진 사각형이 아니라 사각형 그 자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각적 대상에 기대어 사유하고 있다. 이 말은 여전히 감각의 세계에 의존하여 지성에 의해서 알 수 있는 대상을 향한 걸음이 무뎌진다는 말이다.


자 이제 논의 순서를 정리해본다. 나는 개인적으로 파이돈 편을 가져와 접목시키는 해석을 좋아한다. (일자에서 벗어난 다자로서의 사유는 <파이돈>독회편 참고.)


먼저 수학의 한계다. 1, 2, 3, 4, 5...고립된 다자의 상태다.

533c에서 플라톤이 수학을 '꿈꾸는 학문'이라고 비판한 이유는 수학이 다루는 가설들이 뿌리 없는 다자의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기하학자가 세운 수많은 점, 선, 면은 각각 독립된 출발점 노릇을 한다.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한 채 각자의 영역에서만 일관성을 유지하며. 여러가지 그 자체를 던지고 있다.

이를 일자와 다자의 관계로 보면, 수학은 선의 이데아를 보지 못한 채 수많은 다자의 출발점에서 시작해 아래로 내려가는 사유다. 뿌리를 모르는 상태에서 잔가지의 일관성만 따지고 있으니 플라톤의 눈에는 그것이 참된 앎이 아니라 정교한 꿈처럼 보였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변증술의 전반부로 다자에서 일자로 한단게 상승하는 걸 보게된다. 변증술은 우선 이 파편화된 다자를 디딤돌 삼아 하나로 묶어주는 일자인 선의 이데아를 향해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서 감각 세계의 다자는 지성을 자극하는 촉매가 된다.


524e

-만약에 하나가 그 자체로 시각에 의해서 충분히 보이거나 또는 그 밖의 다른 감각에 의해서 파악된다면, 그것은 존재로 이끄는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네. 우리가 손가락의 경우에 말했듯이 말일세. 그러나 만일에 그것에 대해 어떤 대립되는 것이 언제나 동시에 보이게 되어, 그 어떤 것도 꼭 하나랄 것도, 그렇다고 그것과 대립되는 것이랄 것도 없어 보인다면, 이를 결정해 주는 게 이제 필요하게 될 것이네. 그리고 이 경우에 혼은 당혹해 하면서 자기 안에서 사고 작용을 가동케 하여 탐구를 하지 않을 수 없게끔 될 것이며, 하나 자체가 도대체 무엇인지도 묻지 않을 수 없게 될 걸세. 또한 이렇게 해서 하나에 대한 공부는 실재의 고찰로 이끌어 주며 그쪽으로 방향을 바꾸도록 하기에 적합한 것들 중의 하나로 될 걸세.-

-그러나 실은 시각도 하나와 관련해서 이런 점을 적지 않게 갖고는 있습니다. 동일한 것이 동시에 하나이면서도 수에 있어서 무한함을 우리가 보기 때문입니다.-



지성은 이 혼란을 해결하기 위하여 도대체 하나는 하나 자체로서 무엇인가?를 물으며 동굴을 탈출한다.

모든 존재의 근원인 '일자'에 도달하는 것


자 이제 변증술의 완성을 이야기 할 수 있게 된다. 다시 일자에서 참된 다자로 벗어나는 사유다. 플라톤의 변증술은 일자의 독점적 관조에 머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예전에 이 관조, 황홀경에 대해서 <박코스의 여신도들>로 분석한 글을 본 적이 있는데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안 난다. 대략적인 내용은 보면 안 될 걸 봐서 머리가 잘리는 펜테우스, 이때 광란을 목격하기 위해 '상승'하고 목이 베인 채 '하강'하는 것을 플라톤의 변증법으로 해석했다.)

진짜 핵심은 마침내 도달한 일자로부터 다시 ‘다자의 세계’로 나아가는 사유의 하강에 있다.

일자를 경험하기 전의 다자는 혼란스럽고 파편화된 그림자들의 집합에 불과했지만 일자(선의 이데아)의 빛을 확보한 철학자가 다시 다자의 세계로 내려올 때, 그 다자는 더 이상 고립된 가설이나 혼란스러운 감각이 아니다. 일자라는 하나의 원리 아래 서열화되고, 유기적으로 맞물린 이성을 갖춘 참된 다자(이데아들의 체계)로 재구성된 것이다.

플로티누스가 생각난다면 재밌고 즐겁고 영혼의 치유를 무료로 해주는 엔네아데스를 보자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건 '보는'이다. 이전 대화편에 끄적이며 말한 것. '보다'는 지식의 체계와 근원에 있어서 중요한 단어다.


537c

-이들 교과 상호간의 친근성 및 실재의 본성에 대한 '포괄적인 봄'을 갖도록 해야만 되네.-



여기서 포괄적이라는 것은 분산되어 있던 예비 학문들과 이데아들의 상호 연관성을 한눈에 꿰뚫어 보는 능력이다.

즉, 일자라는 중심축을 잡고서 비로소 다자들의 관계망을 완벽하게 조망하며 사유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결국 플라톤에게 '일자에서 다자로 나아가는 사유'가 갖는 최종적인 의미는 실천적인 영역과 진실된 '지식'을 위한 '봄'의 능력으로 귀결된다.

일자에만 고여 있는 철학자는 동굴 밖의 태양만 바라보는 은둔자에 불과하다. 그에 반해 일자로부터 벗어나 다자의 세계를 보고, 또한 동굴 안으로 내려올 수 있는 철학자는 동굴 속의 수많은 가짜 상들(예컨대 명예, 권력, 궤변 등)이 도대체 어떤 참된 실재(일자)를 모방한 것인지 분별해내며 실천한다.


파르메니데스의 일자는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었기에 (우리 눈앞의 현실에 뻔히 너도 있고, 나도 있고, 프나도 있다. 이렇게 多가 있지 않던가.) 플라톤은 저 높이 올라가는, 상승하는 사유를 하고 또 다시 아래로 하강해 현실 세계에 접목시켜 설명이 되는지 따져 본다.


소은 박홍규 선생님의 말씀대로 형이상학, 철학은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학문이다. 어느 것 하나 빼먹고 논의한 다음 현실 세계에 가져다 끼워 맞추는 건 철학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