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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수 없는 모든 길 앞에서 새 바퀴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 아무것도 만질 수 없다 하더라도 목숨은 기어코 감미로운 것이다, 라고 나는 써야 하는가. 사랑이여, 이 문장은 그대가 써다오.”
어느 소설이 좋다. 라는 말은 쉽고 간단하게 가능하다. 그냥 툭툭 던지듯 말할 수도 있고, 뭐라고 마땅히 평할 말이 떨어졌을때 쓰기도 하고. 이 좋다는 말은 참 써먹을 구석이 많기도 많다.
<광장>, <죽음의 한 연구> 같은 소설들이 명작이라면, 이문열과 임철우 같은 이들이 쓴 대부분의 작품이 걸쳐들어간 수작과 평작 사이의 간극격의 작품들. 이런 작품들에게 자주 나는 좋다라는 말을 전하곤 한다. 사실은 수작과 명작도 크게 다를 바는 없다. 어떤 식으로 좋은지를 설명하는 것이지, 그 소설들엔 결국 좋다라는 평가를 붙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어느 소설이 옳다는 말, 그리고 그르다는 말은 쓰기가 어렵다. 주관성에 관한 이야기로 들어간다면 아무래도 그를 판단하기가 어렵다. 이 소설이 장르를 대표할 정도로 옳은 소설이냐. 이런 질문이 들어올때면 자연 한발짝 떨어져 관망하게 되는 것이다.
허나 일고가 만변한다 한들, 나는 어떤 것이 수필인지는 당당히 정의내릴 수는 있을 듯하다. 무릇 수필이라는 것은 제 말하고자 하는 바에 진실한 글을 일컫는다. 또한 그 진실한 정도가 적힌 수필의 깊이를 좌우한다.
그런 면에서 수필에 도저히 빠지지 못할 요소는 경험이다. 실제 자신이 경험한 바를 부풀려 쓴다 치더라도, 남아있는 본연의 경험. 그 덕에 수필은 청자연적인 동시에 사기그릇일 수 있는 것이다.
또 이런 면을 통해 나는 김훈이 수필가임을 주장하고자 한다. 그의 소설에서도 그러했고, 이 수필에서도 그러했듯이 김훈의 문체는 분명 과장된 면이 있다. 너무 많다 싶고 길다 싶은 미문들. 피로함이 덕지덕지 묻어나오는 그것들은 이어 읽기 쉽지가 않다. 다만 그렇다하여 김훈의 진실함이 가려지진 않을 뿐이다. 이 진실함은 현실에 대한 그의 태도, 그리고 현실 그 자체의 것이다.
김훈이 말하고자 하는 아름다움은 책 전체에 걸쳐있다. 그가 아름다움을 느끼는 대상은 무엇에 국한되지 않는다. 풍경을 보고, 정성담긴 음식을 보고, 보잘 것 없는 돌멩이를 보고, 과거 유산들의 고적함을 보고서도, 그는 언제나 저만의 아름다움을 찾고 느낀다. 그 사이에서 단연 가장 큰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이 사람을 이루고자 할진대 사람의 길은 사람을 멀리하지 않나니, 사람의 이치는 각기 사람에게 갖추어져 있어, 사람이 사람됨은 남에게서 말미암지 않느니라.’
어느 지역에 가서도 밥 한 끼를 얻어먹고, 차 한 잔을 얻어 마시고, 사람들은 조찰히 제 이야기를 건넨다. 그럴때마다 김훈은 미문을 조금 접어둔채 그대로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양도한다. 그는 제 미문보다 그네들이 살아온 저 일생이 더욱이 아름다울 수 밖에 없음을 아는 것이다. 허무 속에 피는 꽃이 얼마나 반짝이는지, 직접 칼의 노래로 증명했던 작자답다고 말할만한 대목이다.
아름다움은 산 굽이굽이마다 풍경이 다르듯 언젠가는 전통으로 전환된다. 미문을 적다가도 그는 삼국 유사 같은 고사 속으로 들어간다. 적혀있는 그들의 행복과 아픔을 가늠한다. 이때도 그는 미문을 제거한다. 아름다움을 아는 이로서 순수한 그 감정을 가리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옛날의 유적들을 살필때 김훈은 단호하다. 타협 없이 냉정하게, 가객이 싸움꾼들을 보고 조언 한 마디를 툭 던지는 것처럼 말을 한다. 비판할 점은 비판하는 것이 옳은 수필인지도 모른다.
“그 옛모습의 원형이라는 것은 오직 군더더기가 없고 단촐한 것이다. 그리고 결핍 속에서 우아한 것이다. 그것이 허소치가 말했던 법이다. “법이 있어야 아름다울 수 있고 아름다워야 신묘할 수 있다” 라고 그는 말했다. (중략…) 자꾸만 짓는다고 잘하는 일이 아니다.
이문열도 그렇고 김훈도 그렇고, 늦은 등단을 한 이들에게선 특유의, 젊음과 늚음이 혼재된 듯한 인상을 얻을 수 있다. 어휘는 늙었는데, 보는 시선과 하려는 표현은 젊디젊다. 글은 늙었는데, 담긴 마음은 젊다. 신기한 일이다. 그들 모두 전통을 사랑한다는 점도 그러하다.
익히 아는 지역이 나온다는 것은, 내 마음을 기쁘게 해주었다. 책 속의 생각지도 못한 익숙한 명사들은, 평소엔 그리 친하게 느껴지지도 않고, 만나서는 제대로 아는 척도 하지 않는 주제에, 꼭 동향 사람을 만난 듯한 반가움을 주기 마련이다. 이 수필집에선 구례와 화개가 그러했다.
아. 수필을 읽을때 화개에서 나고 자랐을 그 따뜻한 차 한 잔이 얼마나 고프던지. 종강 이후로 꼬박 며칠 간은 그리운 풍경과 맛을 보러가야만 하지 않을까. 삼촌께서 그 자리 그대로에서 반겨주실 터이니, 마음이 있다면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수필 내리막 즈음에 누군가의 안타까운 사연을 마주하고서, 그리던 고향이 아닌 고향도 결국은 그리던 풍경이라고, 그는 말한다. 최인훈이 회색인에서 말했던 문장과 놀랍도록 닮아있는 이것은, 어쩌면 우연은 아닐지도 모른다. 고향의 존재와 재생을 간절히 바라는 우리네 마음일지도 모른다.
말은 많기도 많았지만, 결국 이 수필은 아름다움에 관해 말하는 글이다. 표현 자체는 과정 섞여 보일지 몰라도, 그 곳에 담긴 마음만은 푸르디 푸른 사랑으로서 존재한다.
수필에 관해 감상을 적을때면, 분명 소설에 관해 이야기할때보다 빠르고 편하게 적히는데, 이 마무리를 하기가 쉽지 않다. 오늘 역시 매한가지다. 자전거라는 것이 그렇지 않나도 싶다. 한 번 타면 길을 멈추기가 어렵다. 내 경우는 걷기가 그러하다. 맛들이면 놓기가 어렵고, 한 번 가면 끝까지 가야만 한다.
다만 갈 수 없는 모든 길 앞에서 새바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모르겠다. 아무 것도 만질 수 없을 때에도 목숨이 기어코 감미로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모르는 일은 알 수 없고, 알 수 없는 일은 모르겠다. 살아서 아름다운 것이 기갈에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던가. 김훈이 그랬듯 나는 한 줌의 언어로 맞서 백전백패해야하는가. 서문에서 말했듯 어느 하나 확신에 차 답변하긴 어려운 말이다.
다만 창밖을 보면, 신록에 찬 유월날이 덥기도 덥지만, 늘상 놓여있던 산맥의 푸른결이 결대로 아름답다. 이렇게 자연은 저기 있고 나는 여기 있는데. 그렇다면 나와 그는 친해지면 그만일텐데. 그런데도 구태여 백전백패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 생각은 드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부질 없는 일일테지만, 그렇다하여도 저 청산은 언제나 아름다울 터이니, 어쨌거나 살아보는 일은 제법 즐거울 성도 싶잖는가.
어느 스물의 나날에 나는 여까지 겨우 적나니. 풍경이여,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고, 남은 문장은 언젠가의 그대가 써다오.
나에게는 김훈의 문장이 항상 슬프네 ㅎㅎ
어디서 기인한 슬픔인지는 잘 모르겠어도, 문장을 읽다보면 그런 감정을 느끼게하거나 그런 감정을 느낀듯한 구석이 있긴하더라
네~
나중에 수필도 읽어봐야겠네 - dc App
<라면을 끓이며> 라는 수필도 좋았음. 옆집 아저씨랑 토크하는 느낌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