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신문이라는 말도 점점 낯설어지며, 그 자리를 뉴스라는 말이 대신한다. 사람들은 뉴스 기사가 조금만 길어져도 100자, 때로는 50자로 요약해달라는 말을 서슴없이 댓글로 단다. 이 때문에 주간 단위로 발행하는 공들인 기획 기사가 0.1초짜리 뒤로가기 버튼 클릭과 동시에 묻히는 아픔을 맛보는 기자도 많을 것이다. 그런 한편, 교양이나 인문학을 표방하는 재미있는 방속을 선호하는 사람들의 열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학자들도 많다. 누구나 쉽게 지식에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의 변화는, 사람들이 접하기 쉬운 글과 교양과 학문 사이의 관계가 황금비를 이루게 하기는커녕 관계의 간극을 벌이고 실마리도 잡을 수 없게 뒤엉키게만 하는 것 같다.
나는 출판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했지만 이 문제에 대해 견해를 내놓을 만한 주제는 못 된다. 그러나 오랜 시간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이들, 특히 인문학 연구자들의 문장을 많이 다루었고, 이를 오류가 없고 되도록이면 독자층에게 가장 적합한 평태로 전달해야 하는 책임을 지며 살아왔다. 그렇기에 어떤 글에 대한 사회적 책임이 일차적으로 글쓴이와 그 글을 편지하는 사람에게 있다고 믿는다. 그 때문에 나는 안 읽는 독자들을 먼저 탓하고 싶지는 않다. 그 대신 글쓰기가 직업인 사람들, 자신이 쓴 글에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의 문장을 한번 돌아보고 싶다. 글이 길고 조금만 어려워도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는 현상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질책해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글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읽지 않는, 공부를 하지 않는 네 탓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익숙한 말 아닌가? 이런 잔소리를 꾹꾹 참으며 중고등학생 시절을 넘어온 사람들은 어른이 되어서까지 참고 견뎌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그러느니 지식도 얻을 수 있다고 하고 5초에 한 번씩 빵빵 웃음도 터지게 한다는 텔레비전 교양 프로그램으로 몰려간다. 어떤 이들은 그런 프로그램을 얄팍하다고 한탄하고 경멸하기까지 하며 여전히 공부 안하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돌리고 싶어 하지만, 나는 그들이 일반인들의 지식욕, 지에 대한 열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고 본다. 그러한 열망은 결코 작지 않다. P. 18-20
누구나 다 일반인 대상의 문장을 고민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있고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은 분명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모르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고, 이런 이들이 위에서 본 어려운 문장에 다가가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P. 23
그런데 철학과 지금 내가 사는 안정된 삶은 양립이 불가능한가? 철학은 정말 나를 못 견디게 하는 반갑지 않은 손님인가? 철학을 공부하면 기득권에 가까워 보이는 저것들, "삶을 지배하는 모든 의 정의다. 세력, 편견과 돈과 인기 모리배와 법의 권위"로부터 배척당하게 되는가?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 뒤로 철학이 무섭고 불안한 것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 이는 '철학'이라는 말이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키는 일반적인 인식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어렵고 힘들지만 보람을 찾을 수 있는 어떤 공부. 많은 철학 입문서를 볼 때 독자의 방점은 보람에 찍히는 게 아니라 거의 늘 어렵고 힘들지만에 찍힌다. 철학을 안내하겠다는 어떤 이들은 곧잘 외면하고 싶겠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자꾸 철학에 대해 겁을 준다. 실제로 철학은 우리가 살다 보면 외면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찾으려고 하는 학문이다. 사람은 왜 태어나고 죽는가? 사람은 왜 무리 지어 생활하는가? 왜 남성의 삶과 여성의 삶은 다른가? 생각과 공부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현재 어떤 경향을 보이는가? 이런 문제들이 반드시 대면하기 싫은 문제이며 삶에 환란을 가져오는 문제라고는 할 수 없다.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런 문제와 어떻게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지를 함께 고민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철학 아닌가? 수많은 저자가 이런 문제들 속으로 사람들을 초대한답시고 한 말이, 사실상 배고픈 소크라테스로 살지 않으면 배부른 돼지가 된다는 식의 겁 주기와 다름없었다는 점은 큰 문제다. P. 83-84
공부가 직업이 아닌 사람들에게 생소한 개념을 필자 스스로도 소화하지 못하면서 문장 안에 그대로 가져오는 글쓰기 습관. 이것이 내가 그동안 부족하나마 여러 인문교양서를 읽으면서, 또는 읽으려고 애쓰면서 생각하게 된, '인문학이 사람들에게서 점점 멀어지는 이유다.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상당히 많이 발간된 철학 안내서, 사상가 입문서나 해설서 같은 책이 인문교양서의 주류 자리에서 완전히 밀려난 것은 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중요성에 대해서는 아직도 수많은 사람이 이야기하고 또 공감도 하는데 말이다. P. 99
나는 누구나 지식욕을 갖고 있고 그 지식욕을 충족시키기를 원하는 경향이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오는 전달력 좋은 스타 강사나 스타 필자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인문학적 교양을 얻고자 할 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제시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많은 대학 교수가 연구자들이 이를 대학 전공 수업 중 'OO학 입문 ' 정도로 생각하거나 혹은 그 정도는 떼고 와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전제 하에 쓴 글들을 대중적인 글로 생각한다면, 넓고 얕은 지식을 표방하는 필자들은 'OO학 입문'보다 한 단계 낮은 수준으로 내려가서 시작한다. 그들은 무엇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하는지 아는 감이 발달했다. P. 101
'철학'이라는 단어를 보자. 철학이 지에 대한 사랑을 뜻하는 그리스어 '필로소피아'에서 왔다는 설명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이 필로소피아를 철학으로 번역한 사람이 누구이먀, 왜 철학이라고 번역했는가, 그리고-이게 가장 중요할 수도 있는데- 왜 한국에서 철학이라는 말을 별다른 의심 없이 철학이라고 받아들였는가에 관해 쉽게 접근해 찾아볼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다. 필로소피아가 어떻게 철학이 되었는지를 추적하려면 현재로서는 학술 논문 제공 사이트에 가입해서 논문을 뒤지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다루는 논문조차 몇 편 안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한국에서 철학이라는 말의 기원을 찾아볼 수 있는 대중적인 자료가 없다는 뜻이다. 철학이라는 말에서 느겨지는 무게만큼이나, 이 말을 만든 사람이나 만든 과정을 찾으려면 '남의 나라 말로 된 문헌'을 뒤지는 게 빠르다는 사실에서 느끼는 공허감은 굉장히 컸다. 누가 만들었는지, 어떻게 수용되었는지 알고 싶지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자료가 없다. 일본어를 읽을 수 있으니 인터넷에 공개된 논문이나 해외 서적을 읽어서 의문을 풀수야 있겠지만, 이런 의문이 왜 사회적으로 의미를 갖지 못하는지, 내가 지금 사용하는, 한국어이되 실은 한국어가 아니었던 '한국어'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지 계속해서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고, 지금까지도 그렇다. P. 110-111
'철학'이라는 말만 듣고 '밝을 철' 자와 '배울 학' 자를 합친 이 말이 왜 'philosophy'의 번역어인가를 곧장 생각할 수 있는가? ... 한자 하나하나를 뜯어보았을 때, 이들을 합하면 왜 이것이 서양의 그 단어에 대응하는지 쉽게 알 수 없다. 이것이 "한글로 썼을 때 그 뜻을 알 수 없거나 알기 힘드는 (한자) 말" "입으로 말했을 때 그 뜻을 알아듣기 힘드는 한자말"과 과연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마치 전래된 고유어처럼 쓰이고 있다고는 하나 한자 조합을 보면 수수께끼같다고 생각되는 말이 한두 개가 아니다. P. 114
그런데 일본에서 들어온 말 가운데 가장 강고하며 고치자는 어떤 사회적인 움직임도 거의 보이지 않는 말들이 바로 인문사회계 학술 용어 같다. 이 말 가운데 일부는 소위 개화가 되면서 들어왔다. '대한제국 관보에 수용된 일본어 어휘의 편제별 분류'에는 다음과 같은 용어들이 등장한다.
사고, 사상, 관념, 인식, 비평, 토론, 문예, 논리, 공화, 문학, 주의, 과학, 명제, 의미, 진보
대체로 추상적인 개념어이며 사전적 정의를 살펴보아도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운 말들도 많다. 고치려 해도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는 말들이 대부분이다. P. 123-124
앞에서 제기한 문제들은 우리가 사용하는 여러 인문사회계 학술 용어에 대해서 생각해볼 문제를 제시한다. 그중 번역자로서 가장 신경 쓰이는 문제가 바로 '중역'이다. 중역은 오늘날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번역 방식이다. ... 인문사회계 학술 용어 쪽으로 옮기면 매우 고통스럽고 가혹한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원어에서 직접 번역하지 않고 어떤 언어로 번역된 것을 매개로 다시 번역함을 중역이라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이 원칙을 곧이곧대로 적용했을 때, 실제로 중역이 아니라고 할만한 학술 용어가 매우 드물다. 당장 '학술'이라는 말부터가 문제다. 이 말은 '백학연환'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에서 만들어졌고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이런 용어가 '중역'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P. 133-134
'고등학생도 읽을 수 있다'는 말이 필자에게는 무엇을 의미할까? 이는 단순히 '쉽게 썼다'고 생각하고 지나갈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대체로 고등학생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지식수준이 어느 정도이고, 어떤 용어나 단어, 문장 수준을 구사하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고등학생도 읽을 수 있다'는 말은 '나는 고등학생들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다'는 말과 동의어다. P. 143-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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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그릇이다. 어떠한 것을 담는가? 바로 자신이 생각하고, 바깥 대상과 교류하며, 또 거기서 느낀 바를 담는 삶의 그릇이자 하나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글을 쓴다는 것은 그릇을 빚는 행위요 저 스스로 그러한 그릇을 주고 파는 행위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문학, 시, 작문, 인문학을 비롯한 모든 글 쓰는 행위에 해당된다. 글을 쓰고 읽히게 함든, 그 뜻이 어디에 있든 간에, 글쓴이가 생각하는 바를 전달하기 위함이다. 만일 그러한 생각하는 바를 전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라면, 글쓰기가 아니라 공허한 외침이요 메아리일 뿐이다. 즉, 소통을 하고자 하기에 글을 쓰는 것이다. 혹자는 반문할 수 있다. 생각을 정리하는 목적의 글이라면 소통이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그러한 목적 역시도 스스로 잘 알고 있는 내용을 되새김하며 또 나중의 나를 위하여 지금 느끼는 감정과 그러한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기에, 이 역시 소통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릇의 비유에 따르면 곧 그릇을 빚는 행위 역시 그릇이라는 목적을 활용함에 있는 것이지, 그릇 자체에 있지 않다.
그런데 요즈음의 도기장이들은 그릇을 유용하고 또 쓰기 쉽게 빚거나 깎기는커녕 엉망진창이다. 제 스스로 흙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흙과 물의 비중을 어느정도로 맞추는지 또 얼마나 센 불에서 구워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그릇의 모양에만 집착해 알 수 없고 괴이하며 또 흉측한 모양을 만들어낸 뒤에 해석을 강요하기만 한다.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러한 것은 그릇도 아니며 예술도 아니요 또 자기표현도 아닌 그냥 낭비다. 그러한 것은 그릇을 빚는 자기에 심취된 것이지, 읽는 사람에게 배려하는 행위가 아니요 자기 스스로도 속이는 비참한 짓이라 할 수 있다. 쓰잘데기도 없는 그릇을 들이밀면 그것을 써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화를 내지 않으면 양반이다. 그것은 예의가 아니다. 오히려 제가 전달하는 의도와 생각을 스스로 굽히고 오해하게 만드는 일이니, 가장 미련한 짓이 아닐 수 없다. 그릇의 용도에서 벗어나는 것은 도기장이가 가장 피해야 할 짓이라는 것은 부정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 본다.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그릇이 나쁜 그릇인가? 아니다. 오히려 좋은 그릇이다. 제 생각을 담아 잘 전달되는 글이 어째서 나쁜 글이 될 수가 있는가. 즉 어려운 글을 쓰는 것은 제 스스로 그릇 빚는 법도 모르는 법이요, 다가가는 법도 모르는 것이다. 또 반문할 수 있다. 주제에 따라 어려운 글을 쓰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 않나? 이것 역시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려운 글을 쓰는데 있어 글쓴이가 목표한 목적이 있다는 셈인데, 그런 명확한 기준을 가진 사람이 굳이 누구도 헤아릴 수 없고 또 감히 추측할만한 글을 쓴다고는 내 기준으로는 납득할 수 없다. 이런 부류는 실어증에 걸린 환자들과도 같아서 무언가 말은 하고 또 글을 쓰지만 다른 사람들이 알아먹고 이해할 수가 없다. 확실한 것은 이 사람이 한글과 한국말로 된 문장을 쓰고 있다는 사실 뿐이다. 이러한 것은 무엇인가? 글쓴이와 읽는 자로 하여금 단절되고 분열되게 한다.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서 제 글이 어려운 이유는 수준낮은 너희 때문이라고 망상하며 자위할 뿐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미친병이 아닐 수가 없다. 제 스스로 출처도 모르는 흙을 주어와, 제가 만든 진흙이자 빚은 토기인 마냥 흉내내는 것은 이제 그만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되었지 않나? 한국 인문학과 철학이 죽은 이유는 학문에 어려움이 있어서가 아니다. 너희가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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