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한문에 능통하더라도 일상에서 우리말을 쓰는 한, 우리말로 생각하는 것보다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황이나 이이 또한 당시의 조선어로 사유하고 나서 다시 그것을 한문으로 번역해 철학적 주제의 글을 썼을 것이다. 그리고 글을 읽는 다른 이들 또한 그 글을 다시 당시 조선의 말로 번역해 이해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글을 번역한 결과가 처음 그들의 생각과 똑같을 수 있을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았을 듯하다. - P. 11

우리 학문 현장에서 번역을 경시하는 것은 지적 사대주의나 원전 숭배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번역 자체가 만족스럽지 못했다는 데 있다. 만족스럽지 않은 번역은 원전텍스트의 함의를 전달하는 본래의 목적을 충족시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번역의 또 다른 기능인 창조적 사유를 방해하거나 왜곡한다. 그릇된 번역에 기초한 연구가 그릇된 결과물을 내놓을 것임은 불 보듯 뻔한 노릇이기 떄문이다. P. 17

유교를 국겨로 채택해 500년간 유지되던 '지속의' 왕국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 또 왜 우리는 우리 손으로 근대를 이룩하지 못했는가. 이 원인을 만약 유교 자체의 전근대성에서 찾고 유교 망국론을 외친다면 나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유교 망국론은 심성적 공감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논리적 담론으로 보기는 어렵기 떄문이다. 그러나 전통 시기의 유교 자체에 내재되어 있던 긍정적 가치를 근대의 언어로 번역하는 데 실패한 것이 망국을 초래한 원인의 하나라고 진단한다면 나 또한 동의할 것이다. - P. 61

요컨대 이을호 역 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광복 이후 간행된 최고의 번역서로 평가받을 만하다.

첫쨰, 원문의 함의를 충분히 전달하면서도 원문에 얽매이지 않고 과감하게 우리의 일상 언어로 바꾸어 번역했다.
둘째, 자연스러운 대화체를 사용함으로써 마치 공자의 육성을 직접 듣는 것처럼 생동감 있게 번역했다.
셋쨰, 원문의 함의를 충분히 이해하고 번역했기 때문에 군더더기 없는 간결하고 명료한 번역이 되었음은 물론이고 원문과의 대칭적 구조까지 살리는 절묘한 번역이 가능했다.
넷쨰, 한과 당의 고주와 송대의 신주, 그리고 우리 주석을 망라해 참고한 뒤에 우리말로 번역하고 주석과 평설에 그런 내용을 자세하게 소개함으로써 보다 깊이 있고 학술적 가치가 높은 번역을 추구했다.
다섯째, 난해하거나 모호한 부분에 대해 탁월한 감각으로 명쾌하게 번역했다. - P. 80

현대 한국의 학문이 전반적으로 서구화, 근대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 학계에서 근대적 방법으로 축적된 동양 철학 연구 성과를 외면해온 가장 중요한 요인은 무엇보다 언어학적, 문화적 편견에 있다. 즉 파란 눈의 서양인이 과연 신비로운 한문으로 된 동양 철학의 고전을 어떻게 읽고 이해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 작용한 것이다. 이는 학문적인 논의를 떠나 일상적인 경험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점이다 ... 이러한 막연한 인상은 조금 속되게 표현하면 아마도 '너희가 어찌 고전을 아느냐' 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분명한 착각이다. 제임스 레그의 사서와 오경 번역을 구태여 거론하지 않더라도 서구 학계에서의 동양 철학 고전의 번역과 그 역사적 축적은 가히 놀라울 정도이다. - P. 249

<사서>나 <성학집요>가 조선 유학자들에게 많이 읽힌 이유, 오늘날 그것들이 읽히지 않는 이유, 그리고 이런 유교 고전에 비해 루소의 이나 로크의 이 더 많이 읽히는 이유는 단순하다. 전자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반면 후자는 많이 필요하기 떄문이다. 모두가 다 읽는 것은 아니라 해도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라고 묻는다면 누구든 후자의 고전들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이다. '읽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서 성립한다. - P. 259

여기서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보자. 우리가 조선 시대로 돌아가 퇴계나 율곡 선생에게 "선생님의 철학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두 사람의 대답은 어떠할까? 아마도 그네들은 당혹스러워하며 우리에게 도리어 "네가 말하는 '철학'이란 게 도대체 무엇이냐?"하고 되묻지 않을까? 우리가 '동양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묻고자 할 떄 사실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과연 동아시아와 한국의 전통에 서양인들이 말하는 그런 '철학'이 있었는가? 만약 없었다면, 우리가 지금 '동양 철학'이라 부르는 그것은 도대체 무엇이었는가? 이것은 우리가 이제까지 말한 '번역'이전의 문제이다. - P. 261-262

20세기 초에 중국 베이징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하여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최초로 를 저술한 세계적 학자 훵여우란(풍우란, 펑유란)은 이렇게 말한다. "철학이란 본래 서양의 말이다. 중국 철학사를 강론할 때 중요한 작업의 하나는 중국 역사상의 각종 학문 가운데 소위 서양의 철학이라는 것으로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을 골라 서술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20세기 초반에 동양 철학의 성격과 특성이 결정되었다. 말하자면, 동아시아의 전통 학문이 어떤것이었느냐는 중요하지 않고, 그것이 서양의 '철학'과 얼마나 비슷한가가 철학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기준이었다. - P. 269

우리가 전통 동아시아 고전을 읽는 것은 그것을 서양 철학과 비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과 지혜를 풍부하기 위해서이다. 그런 의미에서 동양 철학이란 전통 고전에서 우리 삶에 필요한 지혜를 이끌어내려는 활동일 뿐이다. 더 나아가 우리 삶으로 고전을 읽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일 수 있다. 그러한 읽기의 결과는 진리의 발견일 수도 있고, 생활에 필요한 지혜나 지침의 깨우침일 수도 있다. 고전에서 오늘의 삶에 필요한 지혜를 이끌어내는 것, 우리의 질문에 대한 답을 고전에서 찾는 것,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고전을 고전답게 살리는 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떄, 우리는 고전 번역을 '의미의 옮김'이라는 소극적 과정으로 이해하기보다 오히려 우리 자신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고전에 새기는 작업으로 이해하고 싶다. 그러하기에 고전의 번역은 의미의 옮김이면서 또한 의미의 창출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철학적 고뇌가 역사적으로 반복되듯이 우리의 삶은 늘 비슷한 문제를 겪는 중첩성을 갖기 떄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번역은 의미의 옮김이라기보다 차라리 우리의 삶의 미래로 통하는, 그래서 과거와 만나는 것, '고전에 우리 미래의 삶과 의미를 새기는 작업'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 P.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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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란 무엇인가?
'제국주의'에 관하여 서술하는 것만으로도 여러 편의 연구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생략한다. 그것을 탐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떄문이다. 일반적으로는 18세기와 2차 대전을 전후로 서양 열강이 강력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통해 다른 나라를 강제적으로 압박하여 착취하여 억압하는 것을 제국주의라 칭하므로, 이 기준을 삼고 이어나가도록 한다.

21세기.
지금, 현대를 사는 현대인과 한국인들에게는 제국주의라는 말이 와닿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과 반세기전만 해도 우리나라는 일제에 의해 지배당했고 그러한 사고방식과 문화적 유산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부정하는가? 무작정 일본을 반대하는 것 같은가? 전혀 아니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자기 스스로 생각해볼 여지가 충분히 있다. 평소에 쓰는 단어와 어휘, 그리고 말에서 일본에서 비롯된 표현이 얼마나 되는가? 혹은 일본말은 얼마나 자주 쓰는가? 물론 이러한 제국주의적 정복은 일본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사회적인 힘으로 여전히 서양 문화에 영향을 받아 많은 부분이 서구화되어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 이 정도인데, 과연 생각하는 방식은 제국주의적 사고에 뒤집혀있지 않은가?

이것을 나는 신제국주의라 부른다.
그렇다면 한국은 여전히 강대국의 피해자인가? 전혀 아니다. 오히려 한국이야말로 신제국주의에 가장 앞서서 타 문화를 정복하고 민족주의를 위시한 위협을 주고 있다. 한국인들은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식민과 권위에 반발한 약소민족이었으며, 해방 후 이어진 냉전 시기에는 소련과 미국에 의해 국권이 분리되고 분단의 아픔을 겪었으며, 다른 약소민족과 국가들이 처했던 아픔에 공감하며 수평적 연대를 지향하기도 한 국민이다. 그러나 급격한 산업화와 경제개발로 인해 발달한 경제력은 그러한 과거의 아픔을 잊고 사회진화론, 반공주의, 근대화론과 결합해 수직적 차별과 배제를 일삼아 현대 사회에 차별로 자리잡고 있다. 동남아인과 서양인을 생각해보라. 과연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아무 색안경을 끼지 않은 채로 사람을 차별없이 대우할 수 있겠는가? 여전히 한국은 수직적인 지배자적 욕망을 성찰하지 못하고, 모든 문화적 역량과 유산에 자기들을 뽐내고 자랑하기 마련이다. K-컬쳐, 세계 최초, 민주화 등. 내가볼 때 이러한 자랑은 여전히 속에 남아있는 상처를 극복하기 위함의 동기라고 분석한다.

즉 번역에 대한 태도, 다시 말해 철학에 임하는 태도 역시 제국주의자들이나 마찬가지란 것이다.
원전을 읽고 분석하며 연구하는 행위 - 이러한 학술적 태도는 분명 칭찬받아 마땅하겠지만 이것이 철학함인가? 이것은 학문이다. 철학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그렇다면 번역은 어떠한가? 그러한 원문을 '충실히' 반영하겠답시고 변명을 늘어놓지만 정작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고 그런 학문적 용도의 사용을 제외하고서는 모두에게 고립되어 읽혀지지도 않는 글을 쓰고 자빠진다. 번역에 대한 태도가 무엇이 문제인가? 한국인이라면 좋든 싫든 한글을 사용하며 한국어로 사고한다. 이것은 민족적 특성을 떠나 모든 국가의 국민이 공유하는 특성이다. 그렇다면 보편적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쓰이는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이 지당한 일일텐데, 어째서 한자를 비롯해 쓰여지지도 않은 문자로 번역하고, 원문에 충실하다는 변명을 늘어놓는 것인가? 당신이 철학자라면 그런 원문을 어떻게 번역하겠는가? 원문을 그대로 두자는 것도 번역자의 자세가 아니며 철학함을 하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사전적 의미에서 번역하는 것과 앞뒤도 맞지 않는 다의적인 표현이 가득한 한자로 번역하는 행위는 초등학생도 할 짓거리다. 외국어를 또 외국어로 옮기는 파렴치한 짓거리니, 이런 짓은 그만할때가 되었다. 이런 번역자들은 형편없는 신제국주의적 꼭두각시 노름을 할 뿐이다.

물론 인정한다. 서양과 동양, 너희와 우리라는 분별은 갈등을 조장할 뿐이라는 사실을, 그러나 분명히 나라마다 특성이 다르고 그러한 차이에서 나타나는 문화적 특성과 개성을 어째서 존중하지 않고 서구적으로 일반화하는가?하나의 획일된 번역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생각만이 존재한다는 소리이자 선언이다. 사람들에게 읽지 못하게 하며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어놓고, 번역자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강요하며 제 생각을 강요하는 짓거리가 제국주의자들이나 마찬가지이니, 어떻게 신제국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참고할만할 책 - 왜 읽을 수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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