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시장'이 그처럼 대규모로, 또 연례행사로, 그것도 초복 더위가 극성스러운 한여름에 무역회관 상설 전시장을 빌려 열리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최근에서야 비로소 알았다. 그날은 마침 토요일 오후였다. 아마도 그때 나는 일거리 수주를 미리감치 뜸들이기 위해서라기보다도 동업계의 이런저런 정보를 주워들을 겸 평소의 안면 닦아놓기를 챙겨두려고 국내 도급액 순위가 간신히 50위 안쪽에 드는 한 종합건설회사 건축부장과 함께 점심으로 냉면에다 수육 한 접시를 나눠먹고 난 후 귀사 도중이었을 것이다. 폭염이 보닛 위에서 지글지글 끓고 있었고,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나의 알맞은 만복감을 재롱둥이 어르듯 살살 쓰다듬고 있었지 싶다. 길바닥은 주말 오후답게 차량 행렬로 빼곡해서 후끈후끈 달아오르는 지열에다 한증 중의 구슬땀을 뚝뚝뚝 떨구고 있는 듯했다.
내가 아예 핸드 브레이크를 올려놓고 느티나무 가로수의 짙푸른 녹음에다 무연한 시선을 맡기고 있는데, 누가 보아도 그 용도를 상설 대형 전시장으로 쓸 수밖에 없을 것 같은 평평한 민짜 건물의 이마에 '제33회 서울 도서전(1994년)'이라고 고딕체 글자를 박은 현수막이 내걸려 있었다. 나는 몸부림치듯이 내 차 소나타 Ⅱ를 차량 행렬로부터 빼내 녹음이 울을 치고 있는 널찍한 주차장 한쪽 구석에다 쑤셔박았다.
둘째딸애에게 아가사 크리스티류의 추리소설 책을 두어 권쯤 사주기 위해서 내가 그 '책잔치'를 둘러볼 마음이 생겼다면 나의 부성(父性)이 아직도 미적지근한 채로나마 가슴 한복판에서 암류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곧장 아비의 성의를 전달할 절차가, 예컨대 소포로 부친다든지 전화로 불러내서 용돈과 함께 책 꾸러미를 손에 쥐여주며 나눠야 할 감정의 여울 따위가 끔찍할 정도로 귀찮게 여겨져서 나는 서둘러 둘째딸애의 찬찬한 눈매를 내 뇌리에서 지워버렸다. (…)
'도서전'은 성시였다. 주말 오후여서 엄마와 함께 온 초등학생들로 시끌벅적했고, 여름방학을 앞둔 때여서인지 중고등학생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붐볐다. 책도 바야흐로 종이 위에 새겨진 글자를 읽는 데서 화면 속의 날아가는 음성언어를 보고 듣는 것으로 바뀌어가고 있는지 몇몇 출판사들의 책 선전장은 아예 가전제품 판매장처럼 떠들썩했다.
나는 우선 건축에 관한 서적을 전문으로 펴내는 출판사를 찾았으나 쉬이 눈에 띄지 않았다. 아무래도 '책시장'을 선도하는 주종 상품은 단연 베스트셀러류의 소설책과 논픽션물인 듯싶었다. 이른바 화제작이라는 소설책들의 울긋불긋한 표지만 일별하면서 나는 그야말로 '책 껍데기 구경꾼'으로 한동안 여기저기를 발길 닿는 대로 어슬렁거렸다. 이윽고 나는 한 가게에서 '은밀한 성풍속, 풍자와 해학의 세계: 한국의 춘화'를 특집으로 다룬 미술 잡지를 한 권 샀다. 그 특집이 우리의 같잖은 간행물 심의 규정상, 또 그 방면의 권위자 부재와 소장자의 원화 공개 기피근성 때문에 보나마나 수박 겉핥기에 그치고 있을 것임을 나는 좀 알고 있는 편이었다. 하나같이 그 대가리의 크기를 터무니없이 부풀려놓고 그 털북숭이 기둥을 소나무 밑동처럼 억세게 곧추세워놓은 일본 춘화의 진지한 과장법이 꽤나 재미있어서 나는 도쿄의 간다(神田) 거리 한 서점에서 '우끼요에' 화집을 한목에 세 권이나 사온 바도 있다. 벌써 10년 안팎 저쪽의 내 동정이고, 그 화집들을 지금도 내 사무실 책꽂이에 점잖게 꽂아두고 가끔씩 펼쳐보며 그때마다 나는 계집의 게슴츠레한 눈매마저 힘차게 우겨넣은 풍속화 특유의 그 활달한 필력에 매료당하곤 한다.
그 미술 잡지를 집어넣은 비닐봉지를 한 손에 들고 내가 다음 가게로 발걸음을 떼어놓았을 때였다. 허리띠도 없는 카키색 반바지에 쑥색의 가는 가로줄 무늬가 새겨진 반팔 티셔츠 차림의 중년 여자 하나가 책가게의 상호를 두리번거리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한쪽 손에도 이미 책이 들어 있을 제법 불룩한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저마다 시선을 책가게 전시대 쪽에만 두고 서로 엇갈려 움직이게 되어 있는 만큼 그녀의 맨살 팔뚝이 순간적으로 내 맨팔뚝에 스쳤다.
그녀가 무심히 말하고 비켜섰다.
"아, 미안합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여자여서 나는 그녀의 시선을 짓궂게 붙들었다. 그녀의 놀란 눈길을 잠시 풀어놓는 인사가 바로 내 오른쪽 옆구리에서 튀어나왔다.
"안녕하세요?"
단발머리에 청바지와 흰색 티셔츠를 입은 그녀의 딸이었다. 딸애는 그새 얼굴이 활짝 폈고, 키도 제 엄마보다 약간 크다 싶게 자라 있었다.
그제서야 그녀가 거의 한숨에 가까운 탄성을 읊조렸다.
"아, 아람이 아빠…" 이을 말을 찾느라고 그녀의 풀기가 한풀 더 꺾였다. "다들 잘 지내시지요?"
"예, 뭐 그럭저럭… 저쪽에서 얼핏 보이길래 나미 엄마가 아닌가 싶더니만 아직 내 눈썰미가 그런대로 쓸 만하군요."
"쭉 절 보고 있었어요?" 그녀가 자신의 두두룩한 아랫배 쪽을 건성으로 훑고 나서 덧붙였다. "옷도 집에서 껴입은 채로 나왔는데…"
나는 내 등 너머를 눈짓하고 비닐봉지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아니요. 바로 저 가게에서 이 책을 사고 나오는데 나미 엄마가 눈에 잡혔어요."
"서울 바닥에서 살면 이렇게 만날 수도 있군요… 보람이도 잘 크지요? 그 순둥이가 정말 보고 싶어요."
보람이는 내 둘째딸애다. 이제는 내가 할 말을 찾아야 했다. 내 머리 속에는 숱한 짐작들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 그녀로서는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닐 터였다. 그러나 좀 유감스럽게도 나로서는 그녀의 궁금증을 들어줄 마음의 여유가 터럭만큼도 없었다. 그때까지 나눈 우리의 뻔한 안부인사 몇 마디를 새겨볼 때, 그녀는 나의 최근 형편 곧 내 집안 사정을 까맣게 모르고 있는 듯했다. 그녀와 나는 이른바 결손 가족의 무배우자들로서 같은 신세였다. 그녀가 이혼녀라면 나는 홀아비로서 말이다.
그녀가 아이라인도 그려 붙이지 않은 희미한 눈썹을 치켜올리며 꼭 이것만은 알아야겠다는 듯이 내게 물었다.
"그이를 요즘 더러 만나세요?"
김원우 선집 제5권
<가시버시의 민낯> (a.k.a. 모노가미의 새 얼굴)
읽어야겠지?
근처 도서관에는 아예 없네 궁금한데
사실 이 개작판은 저번 달에 갓 나온 신간이라.. 원제로 검색하면 96년도에 나온 초판을 찾을 수는 있음
나도 저 때 쯤 도서전 다녔는데 당시 도서전은 지나다가 들르는 곳이었는데 어쩌다가 요즘은 이렇게 가기 힘든 곳이 되었는지. 물론 그 때도 저 소설처럼 아는 사람 우연히 만날 정도로 한적한 곳은 아니었음.
[모노가미의 새 얼굴] 과거 솔 출판사 판으로 읽었는데, 진짜 골때리는 작품이었음. 남주는 신혼 때부터 월급봉투 부인에게 죄다 갖다 바치는 게 억울하다고 바람 피웠던 도덕성 마비된 인간이고, 부인은 도박하러 다니고, 1990 년대 중반 경제발전의 마지막 호황기에 평범한 회사원들이 중산층이라고 믿으며 막나가는 삶을 살아가며 이를 정당화하는 막장 드라마임
김원우 - 모노가미의 새 얼굴 이문열 - 오디세이아 서울 박완서 -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양귀자 - 모순 (특히 청담동 이모) => 1988년 서울올림픽 성공 후 한국은 나라 전체가 갓 졸부된 느낌이었고, 이를 다루는 세태 소설이 1980년대말~1990년대 중반까지 잇달아 나왔음. 대단한 걸작은 없지만, 막장 상황을 다루기에 읽는 재미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