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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밀란 쿤데라는 체코에서 태어났다. 1963년 이래 사회주의 운동을 지지했으나 전체주의와 이념의 폭력성에 회의를 느끼고 『농담』을 발표한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이 좌절된 이래 억압을 받고 1975년 프랑스로 도피한다. 그의 소설 배경에는 1960년대 체코와 1970년대 유럽의 혼란이 기저에 깔려있다.
술집에서 일하는 테레자는 외과 의사 토마시와 우연히 만난다. 토마시는 이 만남에서 운명을 느끼는 한 편 계속해서 바람을 피운다. 이때 소련의 침공으로 체코에 혼란이 생겨 토마시와 테레자는 스위스로 도피한다. 테레자는 스위스로 넘어가면 토마시의 바람기가 사라질 것을 기대했지만, 토마시는 계속해서 바람을 피웠고 테레자는 다시 프라하로 돌아간다. 테레자가 떠난 것을 본 토마시는 방황하다가 결국 테레자를 따라서 프라하로 다시 돌아간다.
하지만 토마시는 프라하로 돌아온 뒤에도 외도를 멈추지 못했고, 테레자와 토마시 사이에 계속해서 갈등이 생긴다. 한편, 토마시는 공산주의자들의 책임에 관해 글을 하나 투고하는데 이로 인해 그는 의사직을 그만둬야 했다. 토마시와 테레자는 시골 마을로 떠난다.
그러는 한편, 화가이자 토마시의 정부 중 하나인 사비나는 제네바로 넘어가 프란츠를 만난다. 학자인 프란츠가 사비나에게 끌린 것은 그들의 삶의 방식이 서로 반대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프란츠는 부인에게 자신의 외도 사실을 고백하게 된다. 프란츠는 사비나와 같이 살 것을 기대했지만, 이런 상황을 지켜본 사비나는 제네바를 떠난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삶이 반복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긍정할 수 있느냐'에 대한 철학적 실험이다. 삶이 반복된다면 삶은 영원하다. 영원한 것은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인생은 우리가 아는 한 한 번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무거운 것과 반대로 '가볍다'고 할 수 있겠다. 쿤데라는 이러한 무게의 렌즈로 세계를 포착해 낸다.
등장인물들을 가벼움과 무거움으로 분류해보자. 어떤 사람이 가볍다면 그 사람은 절대적인 가치를 믿지 않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무겁다면 그 사람은 어떤 것의 절대적인 가치를 믿는 사람이다. 사비나는 '가벼운' 사람이다. 그녀는 끊임없이 주변을 배반하면서, '키치'를 혐오하는 사람이다. 테레자와 프란츠는 '무거운' 사람이다. 테레자는 몸과 영혼을 구분하는 사람이고 (통상 '영혼'은 불멸한 것으로 취급되어 왔다), 프란츠는 마음 속의 견고한 준칙을 지켜나가려고 하는 사람이다. 토마시는 가벼운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은 무거운 사람이다. '가벼움'을 무거운 짐으로 짊어지고 있는 사람이다. 결혼을 했음에도 계속해서 여자를 만나온 것을 보면 한없이 가벼워 보이지만, 마음 속으로는 항상 "es muss sein" (그래야만 한다)을 가지고 산 토마시였다.
하지만 '가벼운' 사비나 역시 '무거움'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사비나의 '무거움'은 배반이다. 그녀는 주변 인물들을 배신해왔고, 프란츠 역시 그 중 하나였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미 멀리 와 버린 이상 돌이킬 수는 없다! 배반은 더 이상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라 그녀의 운명이다. 이것을 가벼움 속의 무거움이라고 할 수 있겠다.
테레자는 '가벼움'에 흔들리는 사람이다. 앞서 토마시는 가벼워 보이지만 무거운 사람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겉으로 보이는 것은 '가벼움'이다. 이것이 두 사람의 사랑에 간극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는데도 상대방에게 하나의 지옥을 선사"한 이유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화해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자신의 무게의 속성을 바꾸어야 한다. 토마시는 시골 마을로 떠남을 결심함으로써 자신의 "es muss sein"을 배신하여 테레자와 함께하려고 한다. 무거운 짐으로서의 '가벼움'을 버린 것이다. 이로써 화해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가벼움'은 그의 절대적인 가치였다. 절대적인 가치를 믿지 않는 사람은 가벼운 사람이다. 토마시는 아이러니하게도 '가벼움'을 버려서 가벼운 사람이 된 것이다.
등장인물들의 최후 역시 아이러니하다. 토마시와 테레자는 차 사고로 인해 죽는다. 그들 사이의 무거운 사랑의 드라마가 사고 한 번으로 끝나버린 것이다. 토마시와 전처 사이의 아들 시몽은 아버지에게 "그는 지상에서 하느님의 왕국을 원했다."라는 묘비명을 남긴다. 이 점이 바로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삶은 가볍게 끝났지만, 묘비명은 영원히 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연한 죽음이라는 가벼움이 낳은 것이 토마시가 의도하지도 않았던 (그는 무신론자에 더 가까웠다) 무거운 묘비명이라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프란츠의 죽음에 관해서도 말하고 싶다. 프란츠는 부인을 배신하고 안경 쓴 여학생과 살았다. 어느 날 그는 캄보디아에 지식인들과 대장정을 갔다가 강도를 만나 습격당해 병원으로 후송되어 부인 곁에서 목숨을 잃게 된다. 무거움을 추구해왔던 인물인 프란츠가 사비나의 영향을 받아 부인을 배신했다. 하지만 결국 부인 곁에서 목숨을 잃게 되었다. 프란츠는 가벼운 삶을 동경했다. 그렇기에 부인을 떠나 여학생과 같이 산 것이다. 하지만 결국 무거움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부분들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어떤 물건을 저울에 잴 때 그 물건은 가볍거나 무겁다. 가벼우면서 무거울 수는 없다. 그러나 인생에 관해서는 다르게 말할 수 있다. 인생은 가벼우면서 무거울 수 있다. 사람의 목숨 그 자체는 가볍지만 묘비명은 무겁다. 가벼움을 쫓아 떠나버려도 무거움은 다시 돌아온다. 이러한 모든 것을 통틀어서 우리는 인생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아이러니를 포착해 낼 수 있는 것은 문학의 언어뿐이다. 명료하고 논리적인 언어로는 이런 가벼움과 무거움의 혼재를 포착해 낼 수 없다. 쿤데라는 이 책에서 우리에게 계속 말을 건다. 언뜻 훑어보면 이 책은 철학책처럼 보일 수도 있다. 쿤데라는 철학의 언어 속의 문학의 언어로 우리에게 아이러니를 전달한다. 아이러니한 서술 방식으로 아이러니를 전달하는 것이다.
또 이런 것도 있다. 실제 세계의 인생은 가볍지만 소설책의 인생은 무겁다. 왜냐하면 소설책은 반복해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설이라는 매체 또한 인생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가벼움과 무거움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복합적인 것은 우리에게 지적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이러한 복합성으로 가득 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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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책이라 이번 기회에 한 번 써봤는데 글쓰기가 되게 어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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