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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책은 예전에 한 번 읽은 적이 있다.

프랑스의 대문호이자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대표작이니, 접하기 어려운 책도 아니었다.

나는 좀처럼 같은 책을 두 번 읽지 않는다.

기계처럼 모든 문장을 기억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줄거리와 그때의 감상만 남아도 한 권의 책은 제 몫을 다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시 이 책을 펼친 이유는 얼마 전, 예전에 읽었던 책들을 대부분 정리한 일 때문이다.









본가를 정리한다는 연락을 받고 오랜만에 고향으로 내려갔다.

부모님은 쌓아 둔 책을 전부 가져가든지, 아니면 버리라고 했다.

내 방에 있던 책 대부분은 이미 내가 사는 집으로 옮겨 놓은 뒤였다. 남은 것이 얼마나 되겠냐는 생각으로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얼마 남지 않은 책들을 가방에 담고 있는데 가족이 창고를 가리켰다.

그제야 기억이 났다.

어릴 적 읽었던 책들이 그곳에 그대로 쌓여 있었다.

책등 위에는 먼지가 두껍게 내려앉아 있었다. 햇빛 한 번 들지 않았던 탓일까?

종이는 생각보다 멀쩡했다. 색만 조금 바랬을 뿐이었다.

책 한 권을 펼치자 오래 묵은 종이 냄새가 훅 밀려왔다.

먼지와 말라버린 종이 냄새가 매캐하다기 보다는 알싸했다.

무심코 몇 권을 펼쳐 보았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대부분은 시대에 뒤처진 책이었다.

나는 하루 종일 창고 바닥에 앉아 책을 읽었다.

헌책방에서도 값을 매기지 않을 책들.

조용히 쌓여가는 상자 속 책들을 보며 이것들을 모아온 때가 생각났다.







어린 시절의 나는 책 읽기를 좋아했다.

남들에게 자랑할 정도는 아니었다. 서너 권쯤 읽고 나면 한동안 손을 놓기도 하는, 평범한 독자였다.

집의 컴퓨터는 반쯤 고장 난 채였고, 서점 주인에게 이 책이 재미있냐고 물어볼 배짱도 없었다.

결국 표지와 소개글만 믿고 책을 골라야 했다.

물론 밖에 나가 뛰노는 일이 더 즐거웠고, 지뢰찾기 같은 단순한 게임이 책보다 더 즐거웠을 나이였다.

그 사이에서 독서는 특별한 취미가 아니었다.

심심하면 집어 드는 것들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아무 책이나 읽었다.

실망스러운 책도 있었고, 어린 나이인데 '이 정도는 나도 쓰겠다' 싶은 책도 있었다.

그래도 책 자체가 싫어진 적은 없었다.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부담도, 기대도 없었다.


사람들은 흔히 세상에 하찮은 일은 없다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살아 숨 쉬는 일조차 기적이라 말하면서도, 그 기적을 매일 의식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것이 나쁘다기보다는 훨씬 편하고 행복한 길이기 때문이다.

매일 세상의 정세를 걱정하고, 경제를 걱정하고, 병을 걱정하고,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의 말은 일가견이 있다.

다만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누구나 어렴풋이 문제를 알고 있지만 애써 무시하며 살아가는 법이다.

그렇게 살아가면 행복해진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불행하지도 않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흔히 말하는 명작 한 권을 읽게 되었다.

그 순간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 책을 덮은 뒤 나는 곧바로 그 작가의 전집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대학에 들어가기 직전의 일이었다.


대학교에 들어가자 내 평생 다 읽어도 모자랄 만큼의 책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작가를 읽으면 같은 나라의 작가들을 찾아 읽었고, 평론을 곁들이다 보니 어느새 현대문학까지 손이 뻗어 있었다.

꾸밈없이 말하자면, 어느 순간부터는 나보다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을 주변에서 찾기가 드문 지경에 이르렀다.

그 독서의 행렬 속에는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도 있었다.

솔직히 첫인상은 황당했다.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는 좀처럼 공감할 수 없었다.

금욕주의와 청교도 정신, 개인의 존재에 관한 문제의식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적어도 그때의 나에게 그 작품은 재미도, 공감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감히 그것을 허락조차 하지 않는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읽었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불문학의 대문호.

당시의 나는(지금도 그렇지만) 그런 수식어에 유난히 약한 사람이었다.

쉽게 이해되지 않는 문장들을 더듬어 읽다 보면 나 역시 거대한 예술의 흐름 어딘가를 함께 떠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 감각이 좋았다.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았다.

이해하려 애쓰는 시간마저도 독서의 일부라 믿었다.

그렇게 몇 년에 걸쳐 수백 권의 책을 읽어 내려갔다.








최근의 나는 독서를 피곤한 일로 여긴 지 오래다.

정확히는 독서가 즐겁지 않은 것이 아니라, 책을 읽기까지의 과정이 피곤해졌다.

작가는 누구인지, 어떤 문학상을 받았는지, 어떤 사조에 속하는지, 문학사적으로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까지 하나하나 따져 보게 되었다.

내게 재미없는 책이라도 대문호의 작품이라면 어떻게든 구해 읽었다.

그 과정에서 나름의 성취감도 있었고, 기쁨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서점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막상 도착하면 책 한 권쯤은 반드시 사 들고 나왔다.

그렇다면 무엇이 나를 망설이게 만드는 걸까.

그 질문은 잠들기 직전에도 문득 머리를 스치곤 했다.


이번에 본가의 책들을 대부분 처분했다.

몇 권쯤은 남겨 둘 만했지만, 대부분은 지금의 내게 재미나 가치도 없는 책들이었다.

무엇보다 둘 자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것들을 폐지 더미에 올려놓는 일만큼은 좀처럼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무렵 나는 다시 좁은 문을 펼쳤다.

희미한 문장 하나가 오래도록 마음 한편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한 문장은 이미 잊었다.

다만 좁은 길은 험할지라도, 그 끝에는 그 모든 고단함을 감당할 만한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문장은 오래된 고전과 문학을 끝없이 찾아 읽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닮아 있다.

예술은 때로 한 사람의 삶을 온전히 붙드는 일이 된다.

그들은 저마다 황홀경이라는 이름의 좁은 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간다.

사람들은 일이 되는 순간 무엇이든 피곤해진다고 말한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예술 역시 오래전부터 그런 것이 되었을 것이다.

기쁨보다 해석과 작품의 권위가 앞서고, 감동보다 이해가 먼저 요구되는 일.


그럼에도 책을 덮지는 못한다.

그 피로를 견디고도 끝내 손을 뻗게 만드는 기쁨이, 다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다.


이 글을 적게 된 문장이 있다.

다시 읽으며 가장 오래 마음에 머문 문장은 따로 있었다.

행복은 결과보다 그곳으로 향하는 과정에 있다는 말.





언젠가 읽기 위해 책장을 넘기는 시간보다 어떤 책을 읽을지 서성이며 고르는 시간이 더 행복하게 느껴지는 날이 다시금 찾아 올까?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