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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 밀란 쿤데라 저 김병욱 역, 밀란 쿤데라 전집 07, 민음사, 9788937484070
시선이라는 칼, 불멸이라는 감옥
밀란 쿤데라의 『불멸』을 읽고
작가 밀란 쿤데라는 체코에서 태어나 프랑스로 이주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농담』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밀란 쿤데라는 삶의 무게와 존재의 의미에 관한 질문을 문학이라는 매체를 통해 탐구하면서, 스스로가 소설 속으로 개입해 진술을 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그의 작품에선 철학적인 사유와 자전적인 성격이 드러난다.
『불멸』은 쉽게 독해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이 작품의 서술 구조가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괴테와 베티나에 관한 이야기, 아녜스와 로라에 관한 이야기, 아베나리우스와 쿤데라의 대화. 각각의 이야기가 파편적으로 서술되기 때문에 줄거리 요약이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줄거리 요약은 생략한다. 이것은 나의 능력의 한계 탓이기도 하지만, 직접 읽었을 때의 경험을 방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1. 불멸과 소멸
사람이라면 자기 자신이 우스꽝스러워지는 것을 꺼려할 것이다. 그러나 불멸 앞에 선 죽은 사람에게는 그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각인되는 것을 마음대로 정할 수 없다. 작중에서는 정의되지 않은 용어이지만, 이 글에서는 불멸의 반대말로서 '소멸'이라는 것을 정의하자. 소멸은 불멸과 반대의 뜻을 가진다. 감정적으로 과장되지도 않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각인되지도 않는 것이다. 아녜스의 아버지는 '소멸'할 권리를 사진을 찢음으로써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각인되지 않을 권리를 주창한 것이다.
이러한 아버지의 영향을 짙게 받은 '아녜스'는 소멸을 지향한다. 아녜스는 사람들이 자신을 마음대로 규정짓는 것을 꺼려한다.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규정되는 것은 '자아'를 나르는 일, 또는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일이다. 그러나 존재한다는 것과 '자아'를 나르는 것은 다른 이야기이다. '자아'를 나르는 일과는 달리, 존재는 타인의 시선 밖에서도 그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괴테와 베티나의 '사랑' 이야기는 불멸과 소멸의 대립이다. 베티나에게 있어서 괴테는 불멸을 향한 도구일 뿐이다. 괴테는 아녜스와 같다. 자기 작품과는 달리 자기 자신에 관한 것이 불멸로 남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괴테는 아녜스와는 달리 소멸에 실패한다. 괴테는 이제 타인의 것으로서 불멸하고, 아녜스는 소멸하여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써 '존재'한다.
아녜스는 소멸을 선택한 것인가? 차 사고로 사망했다면 그것은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닌가?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아녜스가 그것을 원했다고 말하고 싶다. 원했다는 것은 그것을 선택했다는 것과 결과적으로 다른 바가 없다. 아녜스가 남긴 마지막 말, "거기에는 얼굴이 없습니다." 거기는 현재 살고 있는 이 세상과 다른 곳을, 얼굴은 '자아'를 나름의 결과물이 아닐까. 아녜스의 최후의 말에서 그녀가 원하는 바가 드러난다. 물론 그녀의 죽음은 우연이다. 그러나 그녀가 그런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면 언젠간 벌어질 일이라는 점에서 필연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부분은 쿤데라도 지적하는 바이다.)
2. 호모 센티멘탈리스와 키치
아녜스와 로라는 많은 부분에서 다르다. 아녜스는 괴테와, 로라는 베티나와 비슷하다.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로라의 불멸은 로라의 지인들에게만 한정되는 것이지만, 베티나의 불멸은 역사에 남는 것이라는 점이다. 괴테와 아녜스의 차이점도 바로 이 부분에서 발생한다. 괴테는 불멸하고, 아녜스가 소멸한 이유이다.
로라는 불멸을 원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감정을 과시하는 성향을 가진다. 더 나아가서, 그녀에게 감정은 가치로 정립된다. 쿤데라는 이런 사람을 호모 센티멘탈리스라고 부른다. 감정을 하나의 가치로 정립한 사람은 감정을 느끼고 싶어하며, 더 나아가 그것을 전시하려고 한다. 감정을 느끼고 싶어하는 그 순간부터 감정은 우리 몸 속에서 솟아른 것이 아니게 된다. 호모 센티멘탈리스에게 있어서 감정은 모방이라고 쿤데라는 말한다. 이러한 감정의 모방을 히스테리라고 부른다. 나는 이 점에 관해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등장하는 키치 개념과의 유사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키치 역시 감정을 전시한다. 사회적 압력으로써 그 감정을 느끼지 않는 사람에게 모방해서라도 감정을 전시하도록 압력을 넣는다.
인간의 감정은 내적인 것이지만 히스테리는 외적으로 강제된 것이다. 앞서 말한 바에 따르면, 히스테리로 인해서 내적인 감정이 히스테리에 의해 억압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을 억누른다는 점에서 부조리하다고 볼 수 있다.
3. 경계선의 모호함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가 놀랄 만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쿤데라 본인이 이 소설 속 세계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아베나리우스와 쿤데라의 대화는 이 소설 속 세계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쿤데라가 이 소설 속 세계에 있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부분 역시 존재한다. 폴과 로라와는 달리 아녜스와는 접점이 없지만 쿤데라와 아베나리우스는 그녀를 아주 잘 아는 듯 대화를 나누는 것이 그런 부분이다. 이것은 소설 속 세계와 현실 세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나는 이것이 소설이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소설 속 세계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님을 전달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모호한 경계를 통해 소설과 현실 (정확한 표현으로는 쿤데라가 살고 있는 그 시간)의 혼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아녜스와 쿤데라의 관계에 대한 의문은 소설 세계의 인과성에 대한 물음으로 나타난다. 나는 이 부분이 세계의 일종의 간극을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간극이란 사람은 마땅히 필요한 어떤 것을 찾아내려고 하지만 실제 세계에선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떠한 간극인가 예를 한 번 들어보자. 우리는 어떤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서 그에 걸맞는, 거대한 이유를 찾아내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소한 이유만으로도 아주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이것은 일종의 서사와 반서사 간의 간극이다. 쿤데라는 서사 속에서 반서사를 실험한다.
우리는 불멸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아녜스처럼 거부할 것인가, 로라처럼 추구할 것인가. 우리에게 감정이란 것은 자연스러운 것일까, 외부로부터 강제된 것일까.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세계는 어떠한 간극이 존재하는가. 이런 질문들에 관해서 우리 혼자서는 답하기가 어렵다. 쿤데라는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치열한 사유를 이 책에 담아낸다. 그렇기에 이 책은 뇌에 쥐가 날 듯이 어려운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오랫동안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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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발 존나게 어려웠다. 글 내용 중에 개소리 있어도 이해좀
쿤데라의 소설을 읽다보면 기이한데가 있음 결국 그 서정이란 것을 공격하고자 쓴 글인데 그렇게 까기위해서 서정을 전시하는 내용 자체가 또 제법 서정적이여서 감흥이 일곤함 아녜스는 죽었지만 그녀의 어떤 손짓은 불멸로 남고 쿤데라는 그러한 불멸하는 아녜스의 손짓을 혐오하고 역겹다고 쓰면서도 또 계속해서 그에 대하여 생각하고 간직하고 싶어하는, 그 존재의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의 미묘함이 항상 소설에 있음 아녜스는 죽어가면서 완전히 잊혀지기를 바라면서도 또 자기를 기억해달라는 꽃말을 지닌 물망초처럼 피고싶다고도하고
양질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