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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서며
‘윤리형이상학 정초’에서 윤리의 기틀, 그것들에 관한 개념들을 접했다. 아름다운 말들이었고,
예지세계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통해 도덕법칙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도 대략적으로 감각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곳에서의 설득으로는 도덕적으로 행동할 동기가, 납득이 이루어지질 않았다.
때문에 칸트 철학에 도전하는 길을 밟게 되었다.
순수이성비판을 완독한 26년 5월에는 고비가 찾아왔다. 이론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라 여겨졌던
나의 희망들이 칸트가 지은 법정에서 처참히 무너졌고, 그 끝자락에서 그가 실천을 말할 때에, 나는 그것을 도무지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허무하고 무기력했다. 그러나 궁금했다. 납득이 필요했다.
나는 왜 이론의 끝에서 실천을 말하는지, 실천을 이해시킬, 그런 이론을 다른 곳에서 찾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흘려보낸 한 달의 시간 속에서 내게 남아있던 건, 해설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삶뿐이었다.
‘아,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음에도 행위하고 있는 나 자신이 있구나.’, ‘도대체 실천이란 뭐지?’
별안간 그런 생각이 드니, 공허하고 의욕 없던 눈 앞에, 책장에 꽂혀있던 실천이성비판이 들어왔다.
실천이성비판을 읽고, 그가 말하는 도덕과, 내가 느끼는 실천에 대한 감각들을 글로 남겨보고자 한다.
2. 주요 개념
용어에 관한 이해가 필요할 경우에는 ‘윤리형이상학 정초’, ‘형이상학 서설’을,
자유의 가능성에 관한 이해가 필요한 경우에는 ‘순수이성비판2’ 제2절의 초월적 이념들의 셋째 상충을,
초월철학에 관한 이해가 필요한 경우에는 ‘순수이성비판1’을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3. 요약
가. 자유의 가능성
‘순수이성비판2’ 제2절의 초월적 이념들의 셋째 상충에서 자유가 등장한다.
자연 법칙에 따르는 것 외의 인과성이 없다면, 불가피하게 어떤 앞선 상태를 전제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무한한 인과 연쇄는 어떻게 시작되는가? 칸트는 그것을 자발성, 자유라고 설명하였다.
나. 경향성과 자율
우리 인간이 자연 인과성에 의해서만 행동하는, 경향성의 동물이었다면, 자연적 본능을 거스르는 행동을
할 수 없다고 보았으며, 실제로는 자연 인과와는 다른 관점에서 스스로 행위할 수 있기에, 이성에게 자유가 있고,
이러한 자유를 바탕으로 스스로 도덕법칙을 입법하고 이에 복종하는 자율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설명하였다.
다. 자유와 도덕법칙의 상호 관계
‘나’에서 살펴보았듯 인간이 그저 본능과 경향성에 따라 움직이는 자동기계였다면 도덕법칙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자유는 도덕법칙의 존재 근거로 설명되었다. 반대로, 도덕법칙은, 자연법칙을 거스를 수 있게 해주는 자율을
의식하게 해주는, 자유의 인식 근거가 되는 것이다.
라. 선 : 악 ≠ 쾌 : 불쾌
경향성의 세계만이 전부라면 쾌는 곧 선이오, 불쾌는 곧 악이라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순수이성비판에서
분리된 감성세계와 예지세계, 그리고 윤리형이상학 정초에서 설명된 경향성과 자율, 이를 이해한다면 쾌와 불쾌가
선과 악을 규정하는 것이 아닌, 도덕법칙이 선을 규정한다는 사실을 감각할 수 있다.
즉, 손해와 불쾌를 가져오는 행위라도 선일 수 있으며, 도리어 쾌와 불쾌는 도덕의 부산물인 것이다.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은, 감성세계의 쾌를 포기하라는 것이 아닌, 그것들이 동기의 주객이 되어 가언명령이 되어서는,
그러니까 쾌락을 얻기 위해 도덕이 수단이 되어서는 안됨을 이야기 했다.)
마. 선악의 개념은 도덕법칙에 앞서지 않는다.
‘라’를 통해 선악의 개념이 도덕법칙의 기초에 놓여있는 것이 아닌, 도덕법칙에 의해서 선악이 규정됨을 알 수 있다.
먼저 선을 알고 도덕을 만드는 것이 아닌, 도덕법칙에 의해 무엇이 선인지 안다는 것이다.
바. 당위는 어떻게 자유가 되었는가?
‘라’에서 보았듯, 그리고 순수이성비판1에서 보았듯, 칸트는 질료를 부정하지 않았다.
때문에 실천에서의 이성은 욕구 능력과 관계하고, 실천이란 늘 결과를 위한 수단으로서 행위(준칙)를 의도하게 됨을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인간이 그저 경향성의 동물일 수 없음은 ‘가’와 ‘나’에서 그 가능성이 제시되었다.
또한 ‘다’에서 이야기한 자율을 감각하였다면, 쾌와 불쾌의 표상 없이도, 순전히 ‘형식’을 통해 규정될 수 있는
의지가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순수이성비판에서의 전개 방식(감성 →지성→이성)과는 상반되는
실천이성(이성→지성→감성)의 영역에서는 이를 이론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개념을 채워줄 감성적 직관이 없기 때문에)
이와 관련하여 칸트는 순수이성비판1의 체계에서 보여준 이성의 작동 방식(지성과 감성을 잇기 위해 시간의 도식을 가져옴)과
동일한 구조(유사한 기능)인 자연 법칙의 유형(보편성)을 가져와, 이론적 증명 대신, 이성의 도덕법칙(자유)을 행동(자연세계)에 적용한다.
(이성은 감성과 직접 소통할 수 없으므로, 자연 세계의 인과 형식을 끌고 옴) 이러한 판단 과정에서 보편적인 법칙 수립을
감각하게 되는 것이다. (가령 거짓말이 자연 법칙이 된다면 자연계가 유지될 수 있는가? 시스템이 붕괴된다.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사. 덕과 행복, 최고선
‘라’에서 예고되었듯, 칸트는 정언명령을 통해, 도덕적인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을 정의롭게 보아 최고선을 말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덕과 행복의 일치가 보장되지 않기에, 끝에서 그는 영혼의 불멸과 신 존재를 요청한다.
이론이성에서 인식할 수 없고, 증명할 수 없다 밝힌 것들에게, 실천이성으로서 요청할 것을 제시하였다.
4. 느낀점
가. 증명에서 의식으로
파스칼의 팡세를 읽었을 때, 논리와 증명 밖의 세상이 있다는 것을 감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회에 물든 탓에, 어떠한 일이 닥칠 때에면 마치 법전이나 백과를 펼치려는 일종의 버릇은 쉽사리 떼어낼 수가 없었다.
도덕법칙도 내겐 그러했다. 목적 그 자체로 따랐던 도덕은 사장된지 오래였다. 나는 도덕이 기망이란 생각에 잠겼다.
미디어에 노출되는 덕과 행복 사이의 모순을 목격할 때에면 의심은 배가되었다. 그래서 도덕에게 증명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실천이성비판을 읽으며, 다시금 어린 시절에 간직했던 도덕으로, 존경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란 믿음이 떠오른다.
나. 당위에 대한 편견
이 모든 시작은 지인의 지인이 뱉은 “의무를 자유라고 하는 정신 나간 놈이 있다.” 는 한 문장 때문이었다.
도대체 그 누가 당위에서 자유를 연상할 수 있을까? 때문에, 나는 그 정신 나간 철학자를 만나보고 싶어졌다.
그를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자, 엄격한 시간 관리자로만 생각하였다. 그러나, 시간강사 시절, 생존형 사교가였다는 점을,
노령의 나이에 정교수가 되어 철학적 과업에 비로소 몰두하게 되었다는 점을, 그리고 그가 저술한 비판들이
인간을 기계로 만들고자 한 철학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다. 자유를 구출하다
그는 순수이성비판2 (아카넷) 신 존재의 물리신학적 증명의 불가능성에 대하여 에서 세계건축가가 제시될 수는 있어도,
세계창조자가 제시될 수는 없다 밝혔다. 이성의 한계를 통해, 인과로 설명할 수 없는 자유를 끄집어낸 그의 철학 체계가
감탄스럽다. 누군가는 ‘문 앞의 살인자’ 논쟁을 가져와 그를 비판하지만, 나는 그가 지침서가 아닌 원칙을 세운 것이란 점을
느꼈다. 원칙에 예외를 허용하면 우리에게는 경향성의 세계만이 남고, 세워진 인간 존엄성은 형장의 이슬이 될테니 말이다.
(도덕이라는, 되돌아갈 수 있는 어머니의 품이 있어야만 우리는 비로소 존엄을 지킬 수 있다.)
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심과 호기심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지금의 감상에 불과하다. 칸트 철학이 정답이라 여겼을 것이었다면, 나는 스피노자 철학에서
이미 멈췄을 것이다. 당장에, 세계를 둘로 나눠버린 칸트의 철학을, 헤겔이 앞으로 어떻게 봉합해나아갈지가 궁금하다.
(개인적으로 철학을 해체와 조립을 통한 이해라고 생각하는데, 대립물을 동일물로, 동일물의 모순을 운동으로 설명하는
헤겔 철학에 대한 기대감이 매우 크다.)
마. 법철학
토마스 홉스, 존 로크를 건너뛴 탓에 국가, 법, 권리, 처벌에 대한 개념이 아예 없는데, 칸트 철학의 자유를 보며
한 가지 궁금증에 빠지게 되었다. 칸트가 세운 자유가 비판자들의 논리로 무너진다면, 그들은 응보주의가 아닌
교화주의를 지지하는 것인지 말이다. (물론, 이분법이 아니기에 다른 주장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이 되지만)
아, 이제 무언가 피부에 닿는 철학이 시작될 것 같은 기분이다. 앞으로 배울 현대 철학은 자유를, 인간을 어떻게 설명할까!
바. 시간
칸트 철학 이후에 시간을 보는 방식이 조금 달라진 것 같다. 시간이 직관이라면, 시간의 단위가 사회적 합의라면
인간에게 존재하는 것은 현재뿐이라는 것을 감각할 수 있다. 나는 탄생과 죽음이라는 이어진 하나의 줄을, 버릇에 의해
무한히 분할하고, 그 때문에 현재의 무게를 업신 여기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흐른다는 느낌에서,
시간이 지속된다는 감각이 올라온다. 그리고 이러한 설명이 실천에 중요성을 더한다는 인상을 준다.
사. 의지
실천이성비판을 읽다가 그러한 생각에 잠겼다. (다소간 쇼펜하우어 철학과 섞여진, 개인적인 느낌으로)
칸트는 이성이 선의지를 낳고, 의지가 도덕법칙을 따른다 설명했다. 반면, 쇼펜하우어는 의지라는 게
물자체로 맹목적이고, 이념을 거쳐 의지의 객관화가 될 때, 무생물의 자연력(힘)과 인간의 동기(욕망)로 나뉜다 설명했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어떤 일을 결심할 때, 갖가지 동기를 가져와 의지력을 강화하고자 한다.
그러나 도통 강력한 동기가 구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행에 실패할 때가 잦은데, 그것이 어쩌면 자연력인 힘으로서의 의지가,
감성세계의 동기로 점철되어 훼손되는 게 아닌지 말이다. (행위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행위가 수단이 되므로)
그래서 동기로도 충당되지 않는 일들은 당위로서, 실천하는 것이 묘책이 아닌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당위가 자유인 것처럼, 그냥 하는 게 본연의 의지가 아닌지 싶다.
5. 나서며
니체와 푸코 앞에 쓰러져 괴로워하던 사람이 힘겹게 일어났다. 나는 얼마나 뒤쳐져 있는 상태인 걸까.
앞으로 배우게 될 현대 철학에 얼마나 더 상처 받게 될까? 감사히도 칸트 철학에서 잠시나마 이렇게 휴식을 거쳐간다.
형이 이러면 난 또 ssal수밖에 없어.... 하 조타 - dc App
순이비2 마지막 70p 도망친 거 이렇게라도 만회하려고ㅠㅠ - dc App
많이 어려웠음? 순수이성비판보단 그래도 쉽나?
텍스트로는 순이비2 > 순이비1 > 실이비 순서로 어려웠는데(순이비1 같은 문장 야랄 매우 적음), 이해에서는 순이비2 > 실이비 >= 순이비1 순서로 어려웠음 실이비 먼저 읽어보고 '왜?'가 안 지워지면 그 때 순이비 읽는 것도 괜찮을 거 같음 - dc App
리스펙합니다 - dc App
과찬이십니다,,, 다양한 책 소개 기대하겠습니다,, (펠라스고이족, 포모문학, 이문구... 렛츠기릿) - dc App
훌륭하십니다
글이 너무 거칠어요. 군데군데 오류가 있는데 아마 본인이 리뷰 작성하면서 명제들을 엮는 논리를 직관으로 메워서 그런걸 거에요. 칸트가 분리해놓은 경험,자연적 차원과 초월론,실천적 차원을 본인 맘대로(심리대로) 연결하지 마세요. 혹시 지도교수가 있다면 물어보고 혼나시고 없으면 ai한테 물어보세요.
왜 글이 거칠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한 설명을 길게 늘어뜨려 놓았었는데, 지도교수 부분을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니, 전공자라는 기대감을 가지게 돼셔서, 좋은 취지로 댓글 달아주신 것이라 생각하여 글을 좀 수정했습니다. 수백 페이지를 적은 분량으로 축약하다보니 칸트 철학에서 요구하는 엄밀한 논리 대신에 직관으로 메워지는 부분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AI도 편향적인지라, 객관을 요구해도 쉽지 않네요. 혹시 전공자이시면 제가 이해한 자연의 초월과 실천으로의 이행 논리의 취약점의 언급 및 보완을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시청각 자료들을 찾아보았는데, 영상은 짧고, 전달해야 하는 내용은 무겁다보니 순이비1에 해당하는 내용만 언급하는 게 대부분이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