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영어로 한번 읽고, 한국어로 다시 읽는데
잘 쓰여진 책은 다르다는걸 느낀다.
소설의 글자에 의미없이 쓰여진 내용이 없는 듯
1. 처음 읽을 때는 영원회귀 나오길래 그런갑다했음
파르메니데스의 극단적 이분법으로 무거운 것, 가벼운 것을
논할 때도 그냥 그러려니 했다.
다시 읽을 때 영원회귀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짐이라는 표현
파르메니데스의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 둘 중에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 것이냐라는 기묘한 물음 속에
이 책을 집었던 근본적인 궁금증
"존재가 가볍게 취급되는 것이 참을 수 없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참을 수 없는 근본적인 존재가 가벼운건가?"
쿤데라는 선명하게도 무겁고 가벼운 것에 대해 논하고 있다.
2. 흥미롭게도 안나 카레니나 - 카레닌이 나오는데
카레닌은 안나를 죽일듯이 증오하는 배신당한 피해자이나
안나의 출산하며 죽어가는 과정을 보고 그를 용서하게 된다.
작품의 초반에서 자신의 가족을 죽인 히틀러의 사진을 보고
화해(reconciliation) 한다는 그의 표현
또한 토마스가 테레사에게 Compassion(연민)을 느끼는 것은
카레닌이 안나의 관계와 같다.
분명하게 그는 하나의 세계의 봉합을 속삭이고있다
1부 밖에 안봤지만 괜히 사람들이 사랑한 명작이 아니구나싶음.
무심하게도 넘어갔던 소리 속에 불필요한 이야기가 없었구나.
이 재밌는걸 니들만 보고있었다고?
아는만큼 볼 수 있는 거였군
근데 이런 거 보면 진짜 쿤데라 할아버지 책 배경지식이랑 언어능력 많이 필요하구나 느끼게 되넹...
아직은 다 못읽었는데 첫 장을 읽어보면 히틀러와의 기묘한 화해를 작가가 하게 되는데 그 안에는 사그라들 것들에 대한 연민에서 오는 감정 같음.
그니까 영원회귀를 먼저 서두에 깔아둔 것도 니체 역시 근본적인 삶의 무의미에 속에서 삶의 긍정을 이야기한것처럼 쿤데라도 본질적으로 삶이 무의미하다는걸 전제로 두고 무의미한 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냐를 논한 것 같음.
나는 기본적으로 존재가 무의미하다는걸 동의하지만 존재가 죽음이라는 무의미에 의해 수확되는 부조리에 맞닿아 있음에도,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발버둥을 사랑이라는 행위로 새기려고 한다고 봄. 사랑은 곧, 존재가 무의미한 세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납득시키는 모든 것임.
@사변 스포될까봐 뭐라고 말하기가 어렵긴 한데 개인의 본질이라고 하는 건 뭘까를 좀 많이 생각했던 거 같아
@콘래드스프 그러니 사랑은 존재의 형식인거지. 작품 내에서 계속해서 사랑을 이야기하고 세계의 상처가 봉합되는 과정 속에서 연민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를 꾸준히 제시하는게 아닐까싶다. 아직 다 읽지는 않았지만
서로 끌어당기거나 밀어내는 두쌍의 연인 이야기를 대조하고 반복시키면서 무의미해지지 않게 하는
많은 소설가들이 사랑에 위대한 지위를 부여하며 찬양하는데 쿤데라의 특이한 점은 오히려 사랑에 대한 어떤 모멸적인 시선인듯
나는 근데 사랑의 그러한 특성도 한편으로는 당연한 것 같음. 존재가 삶의 위안을 위해 기대는 사랑은 어쩌면 해체되는 자신이라는 필연에서 나타나는 것이니 비단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레닌그라드 공방에서 바빌로프 식물산업연구소에서 씨앗과 감자로 굶주림을 채울 수 있던 과학자들이 아사를 선택한 사건을 생각한다면 진정으로 자신의 죽음, 소멸, 무의미를 납득할 수 있던건 그들이 사랑한 것들이겠지.
사랑은 파괴적이며 악하기도 한 것 같아. 그저 존재가 자신의 삶을 반추할 의미를 새기는 것이니 지독하리만치 무언가를 강요되는거고 때로는 너무나 고유한 욕심이라서 어떤 것을 배척해야되니.
@사변 써준 댓글들이 좋기도한데 또 어떻게보면 너무 낭만적인 성향이 짙어서 쿤데라적인 무언가와는 너무나도 다른 이야기들 같기도하다 쿤데라가 사랑에 대해 가진 시각은 일단 기본적으로 사랑의 무쓸모함을 진리로 박아놓는건데 그럼에도불구하고 그게 무쓸모함을 알지못하고 목숨을 내던지는 이를테면 님이 말한 식물연구소의 과학자들과 같은 그런 자들의 알지못함에 대한 연민인듯함
@정은띠니 나도 기본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함. 사랑의 무쓸모함을 진리처럼 넣어두는건 이해함. 나 역시도 그런건 강렬한 환상이라고 생각하거든
@정은띠니 근데 나는 쿤데라가 사랑에 대한 시각이 완전히 무쓸모하다라고 못박는건 아닌거 같음. 왜냐면 배신당한 유언들에 나온 마지막 에세이 글인데
@정은띠니 아 죽은 이에게 불복하는 것은 너무 쉽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이따금 죽은 이의 뜻을 따르는건 두려움이나 속박때문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죽음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임종의 순간을 맞이한 어느 시골 노인이 아들에게 창문 앞 늙은 배나무를 쓰러뜨리지 말라고 부탁했다면, 그 배나무는 아들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버지를 추억하는 한은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사변 이는 영혼의 영생에 대한 종교적 신념으로 행하는 그런 대단한 일이 아니다. 그저 내가 사랑하는 망자는 나에게는 영원히 죽지 않을 뿐인 것이다. 나는 그를 사랑했었노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게 아니라,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을 과거 시제로 말하려하지 않는 것은 곧 그 망자가 현존한다는 뜻이다.
@사변 아마 인간의 종교적 차원이 바로 여기있을 것이다. 사실 망자의 마지막 의사에 대한 복종은 신비적이다. 모든 합리적, 실재적 성찰을 초월한다 그 늙은 촌부는 배나무가 쓰러졌는지 아닌지 자신의 무덤 속에서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그를 사랑하는 아들은 그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사변 그렇더라도 내가 사랑하는 이를 절대 죽은 사람으로 여길 수가 없다면, 그의 현존은 어떻게 나타나게 되는가? 내가 잘 살고 충실하게 지킬 그의 의사를 통해서다.
@사변 나는 촌부의 아들이 살아있는 한 창문 앞에 서 있을 늙은 배나무를 생각한다.
적어도 나의 입장에서의 사랑은 영원하고, 현존하기를 희망하는 어떤 인간의 태도를 만드는 대상 그 자체거든 그리고 그런 환상은 결국 실재를 초월해서 작용하는거라고 봄. 그런면에서 사랑 그 자체가 무쓸모라기보단
@정은띠니 "곧 사라지고 말 덧없는 것을 비난할 수 있을까? 석양으로 오렌지 빛을 띤 구름은 모든 것을 향수의 매력으로 빛나게 한다, 단두대조차도" 사랑의 근본적인 문제는 덧없는 것에 기인해서 생기는거라 사랑 그 자체의 쓸모는 결국 덧 없는 것에 종속되는게 아닐까싶다.
@사변 멋진 글인데 그게 쿤데라의 독특하면서도 독보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함. 참존가 이후에 썼던 불멸에서 그처럼 영생하는 잔인한 불멸의 테마를 중점적으로 다루는데. 마치 언뜻 사랑이 갖고있는 클리셰처럼 죽은 뒤에도 망자를 사랑하고 추억하고 이것이 어떤 대단한 힘이 있는 것처럼 낭만적으로 우리는 배나무를 좋게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무시무시하며 위협적이고 역겨운 것인지 쿤데라는 그리 아름다운 언어로 쓰고있는것 아닌가? 오히려 사랑과 같이 인간이 존재를 무겁게 여기고 싶어하는 충동들이 존재의 가벼움을 지우고 배나무와 같은 상징을 통해 망자의 이름을 영원처럼 박아넣고 또 거기서 오는 다양한 아름답고 슬프고 휘황찬란한 감정들 쿤데라는 그것을 경계한듯함. 그것을 키치라고 이름붙이고.
@정은띠니 내가 쿤데라를 꼭 읽어야겠다는 것도 그런 이유긴함. 이 사람이 공산주의 집회에 가서 자유를 억압하는 또 다른 심판자가 된 것에 환멸을 느끼고 정체성을 해체시키는데 부단히 노력했다는 전기적 일생을 생각해봤을 때, 쿤데라는 사랑의 파멸적 광기를 제대로 마주했던 사람 중에 하나겠지.
@사변 하여간 쿤데라에 대한 해석들은 또 사람마다 해석하기 나름이고 재밌는글 잘 봤습니다 굿
@정은띠니 키치를 아직 챕터가 안넘어가서 제대로 모르겠으나 사회 구성원, 전체주의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으로서 개인을 옭아매는 '사랑' 의 정열적 광기를 계속 꼬집는 사람인 것 같아서 현대인은 무조건 읽어야되는 인문서적이 아닌가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