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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설명에 앞서 먼저 선조성이라는 개념이 있다.
 다들 익숙하게 아는 방사능 동위 원소, 형성 시기를 알려주는 행성의 광선 등을 원화석이라 부르고, 그에 대한 진술을 선조성에 대한 진술이라 부른다.
 간편하게 하늘이 두쪽나도 변치않는 사실을 다룬다고 이해하자.

 각자 상상하는 수백개의 가능성을 합쳐놓은 것 보다 많은 일들이 우리 존재 이전에 있었다.
 그 선조적 사건들에 어떤 이유가 있고, 어떤 가치가 있고, 어떤 필연성이 있을까.
 영국의 첫 경험론자로도 불리는 로크는 제1성질과 제2성질을 설명하면서 본성질과 경험을 통한 인식을 나누었다.
 여기서 제2성질은 하얀 백지같은 인간의 마음에 관념을 새겨넣어줄 유일하고도 중요한 경험적 통로가 된다.

 버클리나 흄같은 철학자를 제쳐두고서, 칸트 이래로 많은 추종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감정적인 성질이건, 감각적인 성질이건 사물과의 관계를 통해 얻게된 인간은 자신과 관계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를 실체로 여기기 시작한다. 
 <외부와의 관계를 통해 사유를 한다.> 너무나 당연한 사고방식인데도 이 책 전체에서는 비판받아야 마땅한 철학의 계기가 된다.

 인간 의식과 세계와의 상관관계가 무언가를 형성하고, 수정하면서 실체를 만드는 ‘상관관계적 규정’은 무수히 많다.
 그 규정은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극단으로 치닫는 경우엔 인간의 의식[칸트가 말한 범주?]를 넘어선다면 그것을 사유하는 일은 불가능하고, 비합법적이라고까지 말한다.
 일종의 의식의 상관관계성을 절대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 상관관계가 정말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보여주는지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다.

 아무리 쩌는 브레인들이 모여 도출해낸 결과일지라도, 그 누구도 실제 있었던 일과 100%일치할거라고 확신할 수 없는 과학자들의 합의들, 그렇게 소위 객관성이란 것을 결정내버리는 상호주관적 결정들.
 하지만 칸트조차도 모순 없이 생각할 수 있는 두 가지, “절대,존재자는 있다” 와 “절대,존재자는 없다”의 사이에서 두 쪽 모두의 존재론적 증명의 필요성을 실격시켜버리지 않았던가. 칸트는 다시 한번 확고하게 말하고 있다. 인식 범주를 넘어서는 영역은 사유 불가능하다고.
 우리는 칸트라는 이름과 위엄 앞에서 그 불가지론을 따르고, 절대자 도달 이전에 인식의 한계를 깨닫는다.

 대신 인간의 의식 안에서 주체성들은 다양한 심급을 나타내게 된다.
 헤겔의 절대정신, 라이프니츠의 의지, 베르그손의 기억/의식, 니체와 들뢰즈의 생기론적 상관물 등등 인간의 의식 안에서 고안되는 여러 개념들.
 의식과 언어의 세계가 (언제나-지금도) 존재한다며 일종의 외계,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버린 철학자들, 존재자의 탈은폐를 가능하게 하는 하이데거의 존재라는 개념도 비판대상이 된다.
 겉보기엔 그럴듯해 보이는 고안물들, 상관관계적 규정이라는 것은 선조성, 원화석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를 메이야수는 묻고 있다.
그에 대해 메이야수는 상관관계자들이 실수를 범하고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원화석의 현시에 대해 상관관계자들은 어떤 판단을 내릴까?

 물질-화석은 소여에 선행하는 존재의 현재적 소여다. 다시 말해 원화석은 현시에 대한 존재자의 선행성을 나타낸다. ... 직접적인 층위에서 나는 소여의 본원의 특징을 망각하고, 대상 안에서 길을 잃는다.

 원화석에 대한 상관관계적 규정을 통해 대상의 본질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만다. 본의미를 도출해내기도 전에 은밀하게 꾸며진 규정을 내밀고서 눈을 가리는거 아니냐는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메이야수는 원화석 등을 내보이며 사유 이전에도 존재했던 존재의 현시(소여)를 보인다.
 그러면 선조성을 사유하면서 우리는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할까? 과학은 어느정도까지 선조성을 인식가능하게 해줄수 있을까?
 철학은 이 절대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런 선조성에 스팟라이트를 비추면서 취해야할 입장은 실증주의도, 불가지론이나 회의주의도 아니다.
 선조성이라는 절대성에 관해 우리에게 가능한 인식의 지평을 열어두지 않으면 과학도, 철학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 메이야수는 이런 선조성에 대한 실험 과학의 가능성을 파악하고자 한다.

 사실 상관관계적 규정을 상대적이라고 비판하는 메이야수에 한참 앞서 ‘절대성’을 세상에 내놨던 철학자가 있다.
 데카르트다. 모든 현상에 앞서 실존했고, 모든 진술을 그럴듯하게 설명 가능한 선조적 증인을 내세운 철학자.
 데카르트는 모든 것에 앞서 무언가가 있다는 테제로 일종의 형이상학적 선조성을 만들어낸 셈인데, 이는 데카르트가 그랬던 것처럼 ‘신은 모든 면에서 짱이야!’ 라고 외치면 끝일만큼 간단한 질문이 아니었다.
 
 신이라는 독단주의 결정체를 거부하고자 마음먹은 철학자들은 어떤 ‘사건x’가 우리의 존재 이전에 일어났다, 라는 테제에 사족을 붙여가면서 자기들끼리 누가 누가 옳나하고 규정싸움을 해댄다. 사실에 대해 사족을 붙인다, 모든 진술과 발견을 현재 입장에서 회귀적으로 해석하려 한다. 있는 그대로 현실을 보려하기엔 이미 그들은 이성 원리에 젖어 있다.

 메이야수는 강경해보이는 상대들의 반대편에서 어떤 논리로 다시 절대성을 주장하는가? 칸트주의가 보기와는 다르게 왜 완벽하지 않은지, 그 논리에 균열이 있진 않은지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칸트는 모순이라는 개념을 이용해 우리를 교란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왜냐하면 모순이 불가능한 세계만 존재하는 것 같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유 가능한 것만이 가능하다고 강력하게 확신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우연성이 세계의 사물이 다르게-존재할 수 있음에 대한 앎이라면, 사실성은 오로지 상관관계적 구조가 그처럼-존재해야하는 이유에 대한 무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세계엔 수많은 상수들이 있다고 치면, 그 수는 우리가 셀 수 없이 무한한 조합이 가능할 것이다. 메이야수의 (‘비판’에 대한)비판을 읽고나면 칸트주의자들은 자신들이 파악한 상수의 조합만을 내세우는 것처럼 보인다. 그 세계는 유한성을 특징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유한성은 정말 넘어서 사유할 수 없는 것일까.
 여기서 방점이 찍히는 포인트가 있다.
 1. 칸트주의자들이 인정하기 싫고, 사실 인정할 수도 없지만 은밀하게 의식하고 있는 것은 무얼까?
 2. 사실 그들은 이성 원리를 주장하다가 이성 원리에 실격 판정을 내린 것이다.

 첫 번째의 정답은 세계 자체일 것이다. 그들은 어떤 사실을 도출하기 위해 분명 어떤 세계와 관계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도 은밀히 자기들의 능력으론 알 수 없다고 한 세계의 실존을 인정했다. 20세기 철학의 주요 흐름, 분석 철학의 비트겐슈타인도 “세계의 논리적 형식은 세계의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세계는 보여질 수 있을 따름” 이라 하였다. 그러고보니 하이데거는 “학문”에 대해 말하면서 각 학문은 본질적인 장을 형성하, 그 너머를 말하진 않는다는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다.
 두 번째, 즉 이성 원리의 실격도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사유 가능성을 확신하다가, 사유 너머를 알 수 없다고 인정해버리는 꼴이 돼버렸다.
 
 상관관계적 규정들을 비판하면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 선조성에 대해 우리는 무지를 알 수 있을 뿐이지, 불가능성을 확언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 무지, 모든 상관물이 관계하는 즉자. 메이야수는 즉자의 계시를 사실성의 성질이라고 부른다. 그러고 보면 아까 던졌던 질문, 우리 이전에 일어났던 무한하다고 여겨지는 사건들, 그것들에 이유가 어디 있나?
 오직 이유, 이성의 부재만이 있다. 가치가 있을까? 그것들이 일어났어야만 하는 필연성이 어디에 있을까?
 결국 모든 것이 그렇게 존재할 만한 이유 없이 우연하게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오직 우연성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우리 개개인도 마찬가지다. 우리 자신에 대한 무화 가능성, 정말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다르게 존재할 수도 있었고,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던 그 무의 가능성을 완벽하게 인정할 수 없는 두려움만 없앤다면 있는 그대로의 사실, 우연성의 필연성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다만 그 두려움에 의해 1/100의 이유를 붙이는 순간 우리는 어떤 원환에 빠지고 만다.

 우리는 모순이 모든 논증의 최소한의 규범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순의] 원리는 자체적으로 자신의 절대적 불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증할 수 없다. 그것은 가능성의 규범이 아니라 사유 가능성의 규범을 표명한다. 

 모순에 관해 비-가언적이라는 것은, 사유 가능한 것으로서 비-가언적이라는 것이지, 가능한 것으로서의 비-가언적 의미는 아닌 것이다.
 메이야수는 이런 식으로 가능한 것의 실존을 사유 가능한 것만의 사유물에 대한 반박 근거로 삼는다.

 사유 가능한 것과 가능한 것의 비교를 삼는 내내 떠올라야 하는 철학자가 있다. 회의주의 끝판왕 데이비드 흄이다. 러셀이 말했듯 귀납의 역설, 99일 동안 모이를 받아먹던 닭이 100일째 도축되기 전까지도 모이를 기다리게 되는 역설.
 오늘까지 해가 떳다고 해서 내일도 해가 뜬다는 필연성이 있는가? 그런 필연성에 딴지를 거는 우연의 철학이 흄이다. 흄은 닭이 처할 수 있는 수 백개의 사유 가능한 것 사이에서 의심한다. 다만 메이야수는 ‘사유 가능한 것들’의 세계의 필연성 자체를 의심한다.

 즉 세계를 안정시키는 인과성이나 물리적 법칙에 대한 의심은 반증주의자인 칼 포퍼와 회의주의자인 흄도 의심하지 않았던 확고한 지점인데 반해, 메이야수는 비-형이상학적인 사변적 세계에 대한 인식을 통해 ‘가능한 것’까지의 우연성도 점치려 하는 것이다.
 그 인과적 필연성은 칸트같은 철학자에겐 의식과 세계를 존재하게 해주는 굳건한 약속같은 것이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인과적 필연성을 제거하는 것과 우리에게 나타나는 표상의 안정성이 양립 불가능하지 않다.
 법칙들의 인과적 필연성을 제거하면 정말로 모든 법칙들은 빈번하게 파괴될까? 그런 필연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어째서 세계 자체의 우연성을 사유할 때 모든 법칙이 단번에 무너질정도로 빈번한 혼란을 상상하는가? 사실 그 우연적 계기는 아직 한번도 오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칸트가 떠올릴법한 인과적 필연성은 주사위 던지기의 결과에 대해, 만일 수십개의 면을 가진 주사위가 항상 같은 면으로 떨어진다면, 그 우연성의 일말의 가능성을 믿기보다 그렇게 된 이유 (주사위 안에 납으로 된 구슬이 들어있다는 식)를 덧붙이는 식으로 도출된다.
 하지만 그러한 이유, 인과적인 필연성을 지운다고 해서 주사위가 그렇게 떨어졌던 사실까지 지워지진 않는다. 그리고 그 필연성에 따라 앞으로 있을 주사위 던지기의 결과가 정해진다고도 할 수 없다.
 이렇게 주사위 던지기 놀이-결과의 비유는 수조개의 면을 가진 주사위를 상상해보면 모든 필연성에 앞선 우연성을 사유하기 용이하게 해준다.
 개인적으로 들뢰즈가 말한 어두운 전조에서의 이념의 표출, 문제의 대두화 같은 내용들이 오버랩 되면서 이쯤부터 사변적 실재론에 대해 골몰하게 고민하게 됐던 것 같다. 들뢰즈도 주사위를 비유로 들면서 차이의 표출을 이야기했지만 같은 주사위 비유를 쓰는 메이야수 쪽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사유 가능한 것만을 믿는 이들은 그 주사위 면의 가능한 조합을 총체화해서 양을 종합해내려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한 개인이 어느정도까지 오만해질수 있는지, 알 수 없는 것 앞에서 어느정도까지 작은 먼지터럭처럼 보일 수 있는지 알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메이야수는 칸토르의 무한/집합론, 바디우의 “존재하는 한에서의 존재” 같은 개념을 실마리로 필연적 추론에 대한 반박이 가능하다고 한다.
 물리적 법칙까지도 하나의 가능성으로 여기는 절대적 우연성, 가능한 것의 탈총체화의 추정도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그 추정을 뒷받침하는 수학적 원리도 있다는 점이 우리에게 다시 형이상학적 물음을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그 물음에 이어 나오는 세계는 사변적 실재지, 형이상학적인 대답은 아니다. 인간적인 이성이 부재하는, 오직 수학적 가능성만 가지고 있는 세계이다.

 과학에서의 갈릴레오-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은 우리에게 수학화될 수 있는 것을 사유의 상관물로 환원될 수 없는 진짜 세계로 보여주었다. 사유를 넘어 진짜 세계와의 관계로의 지평을 넓혀주었던 과학에서의 사유의 역설이 여기에 있다. 과학이 관찰의 지평을 넓힌 동시에 사유는 자연을 상관물로서만 사유할 수 있는 편협한 영역이 돼버렸다. 철학이 과학에 자연에 관한 인식 자격을 위임할 때, 형이상학은 낡은 것이 되어버렸고, 동시에 절대자도 시효성이 지나도 한참지난 개념처럼 오해를 받았다. 하지만 메이야수가 말하는 사변적 실재가 형이상학으로 보이는가? 반대로 우리는 여기서 그 사변적 실재, 선조적인 것만이 형이상학적이지 않으면서 유일하게 떠올릴 수 있는 절대적인 것처럼 볼 수 있다.

 앞에서 메이야수는 과학이 철학에게서 절대자, 모든 것의 원천에 대한 사유를 지워버리는 역할을 하는가 물은적이 있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선조성을 가지는 모든 것에서 과학과 철학이 같은 자리에 나란히 서있는것같다.
 모든 실험에 선행하는 세계에 대한 실험적 인식이 어떻게 가능한가? 또 자연을 수학화하는 과학이 어떻게 가능한가? 메이야수는 실험방법적인 차원에서, 또 수학자의 차원에서의 정답을 말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다른 차원에서의 실마리 정도는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 표상에 대해, 존재에 대해 선험적인 이유나 필연성 같은 것, 인간적인 차원의 것을 싹 걷어내는 것부터 시작될 것이다. 즉자의 계시를 읽어내는 지점에서 과학과 철학은 서로 정확히 같진 않아도 반목하며 서로를 배척하게 되진 않을 것 같다.
 그것은 선조성을 사유한다는 것이고 일종의 절대자에 대한 사유를 시작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과학은 자신의 진정한 코페르니쿠스적인 면을 더 내보일 것이고, 철학은 협소한 프톨레마이오스적 인식에서 벗어나 사유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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