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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블리비언>에 대한 감상문을 쓰고자 하면서, 두 가지의 다른 방향성 사이에서 고민을 했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이하부터 DFW; David Foster Wallace로 칭함)라는 좋아하는 작가의 글이라는 관점에서 주로 이야기를 해야 할지, 아니면 각 단편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해야 할지. 양쪽을 병행하기에는 전자의 방향성이 너무나 또렷하며, 각 단편이 다루는 내용들이 서로 응집하지도 않는다. (다루는 방식은 유사하지만.) 그러니 후자, 즉 각 단편들에 대한 이야기는 앞에서 짧게 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미스터 스퀴시>, <굿 올드 네온>, <오블리비언>, <더 서퍼링 채널>. 이 넷은 미국적인 문제라는 비슷한 맥락에서 쓰인 글이다. 사람의 진짜 속내를 파악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얼마나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 속내와 속내를 파악하는 것 자체가 어떻게 돈이 되는가, 따위의 이야기들. 뒤에서 길게 얘기하겠지만, 이 주제들이야말로 더없이 DFW스러운 주제라고 생각한다. 이 네 단편은 나중에 이야기하겠다. 나머지는 느낌이 다르다.

<영혼은 대장간이 아니다>는 주제를 말하긴 힘들지만, 읽고 있으면 참 이 사람이 글을 화려하게 쓴다는 걸 느낄 수 있는 단편이었다. 존슨 선생님이 칠판에 저들을 죽여 라는 말을 쓰며 아이들이 점차 공포에 질리는 광경이나, 화자가 망상에 잠겨 떠올리는 시몬스 씨의 팔이 갈려나가고 마조리 시몬스가 입가에 립스틱이 떡칠된 섬뜩할 정도로 푸른 시체로 변하는 장면들이 특히 인상적이다. 글에서 묘사를 그리 즐기지 않는 편인데도 묘사만으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 글이다. 덕분에 <오블리비언>이 번역되기 전에 한 차례 읽었을 때에도 이 단편이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 같다.

좀 더 세부적인 이야기를 하면, 이 글은 글이 쓰인 방식을 내부에서 주인공의 망상으로 은연 중에 전달하는 글이다. 주인공이자 화자가 창문에 자연스럽게 생긴 ‘칸’들을 통해 만화 같은 망상을 하고 있는데,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난 순간은 만화 칸 속에 있지 않고 칸과 칸 사이에 있어 사건의 전과 후만을 볼 수 있다. 화자가 글을 이어나가는 방식과 그의 관심이 현실에 주어진 방식 역시 비슷하다. 존슨 선생님이 언제부터 그렇게 변했는지, 아이들이 어떻게 도망쳤는지 따위의 사건들을 그는 본 적이 없다. 그저 나중에 함께 있던 아이들로부터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사건들이 주의의 주변부에서 진행된 후 망상의 시작과 끝 사이에 현실이 어떻게 변해갔는지 그 장면들은 알고 있다. 아마 <오블리비언>이라는 단편집의 제목의 주제-의식과 무의식-와 관련된 게 아닌가 싶다. 

<화상 입은 아이들의 현현>은 그런 묘사를 극도로 밀어붙인 초단편이다. 아이에게 실수로 끓는 물을 끼얹은 어머니와 그 사고에 대처하려고 하지만 결국 치명적인 실수를 해 아이를 잃고 마는 부부를 냉담하게 묘사한다. 마지막의 묘한 에피파니; 현현까지 보고 나면 그 기묘한 분위기로부터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 <안티크라이스트> 첫 슬로우모션 씬을 보는 느낌이 든다. 약간은 레이먼드 카버가 이런 식으로 글을 썼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감정을 배제한 채 잔인한 세계를 그리는 식 말이다.

<또 하나의 선구자>는 일종의 메타 소설이다. 설화를 간접적으로 들어 이를 옮기는 글을 쓰면서도, 동시에 이 설화가 다양한 형태로 전래되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존 바스의 <키메라>, 그 중에서도 <벨레로포니아드>가 이와 비슷한 느낌이 아니었나 싶다. 이야기가 그 자신의 메타적 구조를 이야기하고, 그 구조로 인해 이렇게 되어야 할 것이란 당위성을 얘기하는 글. 재미는 있지만, 속된 말로는 가장 겉멋이 강하게 들어간 글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용의주도하게도 글 내부에서 이 탓을 화자의 겉멋으로 돌리지만 말이다. 이런 능숙한 대처는 ‘다른 세계의 언어적 표현-특히 관용적 표현 따위-을 어떻게 우리 말에서 표현해야 하느냐’ 하는 질문에 ‘나는 그저 번역자로서 들려진 설화를 기록했을 뿐이다’ 하는 능청스러운 대처로 글을 시작한 톨킨의 <반지의 제왕>을 연상시킨다.)

<철학과 자연의 거울>은 의도한 바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글이다. 내게 울리는 게 딱히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영혼은 대장간이 아니다>와 마찬가지로 패러디 대상이 된 글과 연관이 있는 글이겠거니 싶지만, 최소한 전자는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읽어본 적이 있으면서도 주제를 파악하지 못했으니 후자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게 있겠던가.


그럼 이제 나머지 단편들을 통해 DFW로 돌아오자. DFW스러운 글은 어떤 글일까? 물론 그 특징적인 문체를 무시하고 DFW스럽다를 정의할 순 없겠지만, 나는 그보다도 진실성이 으뜸이라고 생각한다. 라이오넬 트릴링이 진실성Authenticity로 표현한 진실성이다. 자연법을 통해 신과 접촉하며 어딘가에 있을 도덕적 진실과 접촉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 진실함의 근원을 찾고 이러한 솔직함으로부터 도덕성을 찾는 진실성이다. 자신이 느낀 것을 있는 그대로 옮겨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문장이 늘어지고 표현이 길어지고 묘사가 갑작스럽게 세밀해진다. 시니컬한 비꼼을 말만 번드르르하게 완곡어법을 사용할 순 없다고 생각하기에 자신이 추하다고 느낀 것을 추하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그렇게 추함을 느끼는 자신이, 이런 추함을 느끼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욱 더 추하다고 생각이 들어, 그것을 그대로 글로 옮기면서도 다시 또 더한 우울함을 느끼는 것이다.

나는 DFW만큼이나 J.M.쿳시를 좋아한다. 이 두 작가는 내가 특별히 가장 좋아하는 작가이며, 둘 사이에는 진실에 대한 집착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진실을 고백함으로서 자신이 손해만을 볼 것이 분명하더라도 왜 고백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 특히 글로 쓰인 고백은 말로 하는 고백보다도 더 묵직하다. 언제든 수정될 수 있는 것이기에 그럼에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하는 글이기에 말로 하는 고백과는 달리 고백의 대상이 특별하지 않다. 말 그대로 자신이, 자신이 진실을 고백한다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다.

비단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화자-보통 쿳시의 진실 고백의 강박을 이야기할 때 주로 나오는-를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페테르부르크의 대가>와 같은 간접적인 글을 통해서도 이런 생각이 드러난다. 도스토옙스키를 주인공으로 삼아 자신의 글쓰기의 진정성에 대한 고민이 드러나는데, 왜 자신이 글을 쓰기 위해 현실을 다루는 방식을 고백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 후폭풍이 즐겁지도 않고 반갑지도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래야 하는가? 하는 질문들이다. 이것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글은 <서머타임>인 것 같다. 삶에서 언제나 실패를 겪는 이렇게나 추한 자신으로부터 저들은 무엇을 보고 있고, 나는 그런 추함을 왜 구태여 드러내고 있을까? 아니면 사실 이것에 추함 너머의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

하지만 쿳시의 진실에 대한 강박이 다소 유럽적인, 다른 말로는 기품 있는 방식인 반면, DFW의 그것은 미국적이고 경박한 강박이다. 일차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허망함이다. 쿳시가 진실을 탐구하고 폭로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과는 달리 DFW는 그런 진실에 결코 닿을 수 없다고 얘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블리비언>(단편)의 마지막 대화는 이를 날카로운 얼음송곳처럼 보여준다. 부부의 잠자리 문제-성적인 게 아니라, 코골이 따위의 ‘진짜’ 잠자리 문제-의 진실 추구와 갈등의 해결이 연결되어 있고, 엎치락뒤치락 하는 사건 사이로 드디어 진실이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빰!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가 현실 속의 꿈에 불과했다는 걸 알려주고 있다. 현실과 꿈 사이에 구조의 유사성이 있다는 것 또한 명백하다. 하지만 그녀-그가 아니라 그녀!-가 명백한 괴리감을 느낄 정도로, 차이점 역시 거대하다.

이차적으로 드러나는 건 공격성이다. <오블리비언>(단편)에서 상대방에 대한 진실을 공격적으로 탐구하는 것도 통하는 바가 있지만, 더 중요한 건 자신이다. 자신이 얼마나 자극적으로 기만적이고 자기혐오적이고 냉소적인지를 어떻게든 효과적으로, 독자가 무시할 수 없게끔 표현한다. 그렇게 주변이 바라보는 방식에 따라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절망적으로 보이는지, 동시에 그러면서도 이런 고백을 하는 자신이 자기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덜 기만적이라고 여겨지겠지, 하는 예상 반박을 대비하며 나는 이것으로부터도 또 위안을 느끼고 있다는 둥 철저하고 공격적으로 자신의 추함을 드러낸다. 자신의 뛰어난 학식과 사고를 숨기지 않아 누구나 이 사람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하면서도 동시에 언제나 자신이 속물이라는 둥, 위악어법을 사용하곤 하는 식이다. 온갖 힙스터들이 그를 워너비로 삼는 게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그를 워너비로 삼는 것 자체가, 자신 역시 그런 추한 사람이라는 것을 은연 중에 드러내는 상징이나 다름 없다.

그 뛰어난 학식과 사고를 따라가고 있으면, 그가 느끼는 냉소를 공감할 수 있다. 정말,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따금 우리 주위의 많은 것들은 머저리 같고 덜떨어져 보이고 심지어 저들이 이를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이 더욱 그 속성을 강화하고 있다. <미스터 스퀴시>에서 보여주는 자본주의의 우스운 꼬락서니를 보아라. 자신들이 팔아먹을 것이 실제로 팔릴지를 확인하기 위해 사람들을 이용하는 서비스를 판매하는 기업과, 그 기업이 자신의 서비스를 확인하기 위해 그 사람들을 판단하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감시의 연속을 보아라. 사실 이는 자본주의보다는 근대의 통제와 관련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차처하자. 요는 진실을 알아내고자 하는 과정이 다시 그 진실을 숨기고 있기에 계속되는 의미 없는 피드백이다. 그러면서도 진실을 바라는 의도 자체는 계속 드러나 아련한 울림이다.

<굿 올드 네온>은 이 부정적이고 불길한 고리를 자신에게서 찾는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자신이 잘 보이고 싶어 하는 동기를 불순하다고 느낀다면, 그는 그 불순함을 영원히 떨쳐낼 수 없다. 왜냐면 그 가치 평가의 주체가 바로 자신인 탓이다. 자신이 어떻게 동기를 불순한 이득으로부터 밀어내려고 해봐도, 썰물처럼 그대로 다시 돌아오고 만다. 동기론적 윤리학의 역설과 어느 정도 맞닿는 면이 있다. 자신은, ‘남에게 자신의 ‘남을 속여서라도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속성을 고백하는 것’으로부터, 사실은 자신이 그렇지 않고 진실된 사람이라는 것을 어필하고자 하는 ‘남을 속여서라도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건 자신이다. 대체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짧은 감상문에서도 한 차례 언급한 적이 있지만, 이 글은 아마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DFW의 유서가 되어버린 셈이다. 그는 이 단편을 쓰고 4년 후에 자살했고, 단편 내에서 밝혔듯 누구보다도 밝아 보였던 선배의 자살이라는 사건 속에 자기 나름대로 내용물을 채워 넣었다. 그 내용물이 과연 어디에서 왔을까? 그가 생각한 그 선배가 자살해야 했던 내면적 이유는 바로 자신이 생각한 자신이 자살해야 할 내면적 이유와 같을 것이란 점을 무시할 수 없다. 화자는 DFW만큼이나 매력적인 인물이고, 그가 언젠가 죽을 것이란 파멸성 때문에 더 매력적이다. 이 파멸적인 자기혐오에 매혹된 힙스터들 역시 많을 것이고, 개인적으론 감상적인 수많은 이들을 자살로 이끈 <젊은 베르터의 슬픔>만큼이나 이 글이 수많은 냉소적이고 외로운 속물 힙스터들을 자살로 몰아넣으리라 생각한다.

특히 DFW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무한한 재미>를 읽어본 독자라면 더 그 절망감을 공감할 수 있다. 모든 것이 흥미 위주로 돌아가고, 모든 진지한 것들, 삶, 죽음, 자기 자신, 그리고 그 외의 모든 것들이 이렇게 소비될 수밖에 없다면, 그리고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또한 소비의 대상이 될 뿐인 현대에서라면 대체 이 진지한 것들에 대한 대답은 어떻게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청년 시절 에세이에서도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이 시대엔 더 이상 그런 주제에 검열이 필요 없다. 그저 비웃을 뿐이다.” <무한한 재미>의 주인공의 아버지 제임스는 이에 대한 해답과, 그 진지함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도출될 수밖에 없었던 주위에 대한 혐오, 그리고 그 혐오의 주체인 자신에 대한 혐오를 이기지 못했다. 이 자기순환적 혐오의 루프를 깰 방법은 없었기에 그 안으로 숨어든다. 자기 두개골 안으로 말이다.

비록 DFW가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그런 현실을 그대로, 과할 정도로 자세하게 보여줌으로서 독자가 자신과 비슷한 불안감을 느끼게끔” 하는 것으로부터 찾았다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다른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지 못한다고 여기던 것 같다. 미완성 유작 <창백한 왕>의 미완은 그 주제에 대해 다시 한 번 해답을 내리려던 시도였기에 더 씁쓸하다. 그는 <또 하나의 선구자>에서 파멸적인 질문을 던진 샤먼처럼 우리에게 “불길한 자의식”을 던져주고 자신 역시 그 악독함에 잡아먹혀버린 것이다. 한 번 숨쉬기를 의식하고 나면 숨 쉬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한 번 의식되는 대상으로서의 자신을 의식하고 나면 살아 있는 주체로서의 자신이 아니라 관찰되는 자신으로서의 자신을 언제고 생각하고 있어야만 한다.

아마 의무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청소년기의 특징 중 이와 비슷한 묘사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상상적 청중>이라는 둥, <개인적 우화>라는 둥. 그리고 이 생각을 했다면 틀림없이 ‘사고의 귀결로 냉소적인 게 아니라 그냥 자기중심적인 미성숙한 사람인데. 너무 유아적이군.’ 하는 생각 역시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 유아성乳兒性/唯我性이 바로 현대의 특징이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유명인이라는 상징과 그 작동 방식을 보아라, 그리고 그 조악한 모조품인 SNS의 과시욕을 보아라. <더 서퍼링 채널>이 그런 점을 잘 보여준다. 이 유명해지고 싶은 아내와 쪼그라드는 남편, 그리고 그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기자들을 보아라. 우울함 없이 명랑하고 약간은 냉소적으로 그려지는 사람들을…

관심은 꼭 마르크스주의자가 돈을 바라보는 것처럼 비춰진다. 근대에 유산자와 무산자가 있다면, 지금은 유명자와 무명자가 있다. (물론 전자가 남아 있지 않다고는 안 했지만.) “각자의 삶의 주관적인 중심성과 그 객관적인 보잘것없음에 대한 인식 사이의 갈등. (...) 이것이야말로 미국인들의 정신을 특징짓는 단 하나의 갈등”이라는 말이 20세기 미국의 (벤자민 프랭클린이 대표하는) 자수성가, 아메리칸 드림과 어떻게 조응하는지 생각해보자. 그리고 이런 꿈을 부여받은 이들이 현실의 실패와 어떻게 대면했는지 역시. “삶의 가장 고무적인 소원은 언젠가 자신이 어딘가에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거기에 모여 있는 수많은 사람을 뚫고 필립 스폴딩을 만질 수 있을 정도로 그와 가까운 곳에 서 있을 때 속으로 느낀 감정을 느끼도록 만드는 것임을 깨달았다”는 내면의 고백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녀는 그 계급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한다. 돈이 무산자에게서 유산자로만 흐르지, 그 역은 없는 것처럼 관심 역시 그렇기에.

이 점에 있어서 또 생각해볼 점은 <더 서퍼링 채널>의 주제인 예술이다. 예술이 적극적으로 자본주의의 맹아를 따라가고, 심지어 이를 조장하게끔 만든 현대 미술을 생각해보자. 키워드는 yBa; Young British Artists의 <Sensation>전시, 콜렉터 찰스 사치, <예술가의 똥> 등이다. 하지만 이 주제에 대해 더 얘기하는 건 너무 길어지니 생략하고, 대신 이를 더 잘 다룬 <창백한 왕> 유작을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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