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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김지영'의 리뷰를 쓰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한창 이슈가 되었을 때 가볍게 읽어 보고는, 그다지 진지하게 대할 가치가 없는 소설이라 판단하고 책을 덮었다. 근본적인 인상에 있어서는 지금에 와서도 달라진 것이 없다. '김지영'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정치적 팸플릿에 가깝고, 소설로 읽어야만 한다면 리얼리즘 소설의 가장 나쁜 예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정치적 팸플릿으로서 이 영양가 없는 소설은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의 성공을 거뒀다. 진지하게 대할 가치가 없다는 판단은 오판에 불과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좋으나 싫으나 '김지영'은 늘 한국 여성주의 운동에서 논란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고, 이제는 영화화가 되어 극장에 걸렸다.
한때 여성주의 운동에 동조했으나 여러 실망을 경험하며 돌아선 20대 남성의 입장에서, '김지영'을 얼마나 중립적으로 대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여성주의에 대한 내 입장은 확실히 일반적인 20대 남성의 입장과는 크게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여성주의자를 자처하거나 최소한 여성주의를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남성들과 입장을 공유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이 리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헤겔이 말하는 것처럼,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정확히 인식되어 있지 않다. 20대 남성들에게는 '김지영'이 바로 그런 대상이다. 나는 이 리뷰가 보다 나은 인식을 바라는 20대 남성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나는 이 소설을 소설로 읽지는 않을 생각이다. '김지영'에 대한 신비평적인 접근은 시도하는 것 자체로 어리석게 느껴진다. 인상비평 수준의 말들을 남길 수는 있겠으나, 애시당초 정통적인 의미에서의 '문학'을 하는 것은 전혀 작가의 의도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김지영'의 의의는 그런 '문학적인' 기교들을 딱 써먹을 만큼만 써먹고, 기교의 빈자리를 전형적인 민중주의적 프로파간다로 과감하게 채워내는데 있다.
예를 들어 성차별에 관한 통계를 직접적으로 인용하는 부분이 그렇다. 어지간한 리얼리즘 소설이라 해도 소설에서 직접적으로 통계를 인용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프로파간다라는 것이 날것으로 드러나는 프로파간다는 역으로 그 효과를 상실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김지영'은 그렇게 한다. 그것은 그 자체가 프로파간다라는 사실을 숨기려 하지조차 않는다.
그런 점에서 '김지영'을 올바르게 평가하는 방법은 그것을 전적으로 정치적인 것으로 읽고, 그 정치적 영향력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따져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이런 관점에 반대하는 사람은 여성주의자든 비여성주의자든 어느 쪽에서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김지영'의 낡은 계몽주의적 리얼리즘 그 자체를 심판대에 올릴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야 뻔한 비판을 되풀이하는 것이 될 뿐이다.
'김지영'의 긍정적인 면 하나는 전환기 여성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는 것이다. 소설에 대한 감상평을 보다 보면, '82년생 여성이 고생한 게 뭐가 있다고 징징거리냐'는 반응을 마주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내 주변에서 '김지영'을 직접 읽어본 드문 20대 남자도 그와 비슷한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전환기의 삶을 조명하는 것이야말로 '김지영'의 의도였다고 생각한다.
80년대 초반에 태어난 여성들은 전환기의 삶을 살았다. 그들은 그 이전 세대의 여성들이 그런 것처럼 전근대적이고 폭력적인 억압을 일상적으로 경험한 세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이후 세대의 여성들처럼 상당 부분 합리화된 사회를 살아가지도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전근대적 차별에 시달렸으면서도 합리화 이후 세대의 여성들처럼 '여자라서 꿀 빤 사람들'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김지영'은 그런 모호한 세대를 조명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획득했다. 합리화 이전도 합리화 이후도 아닌 시대의 여성들에 대해 이야기하려 했다는 것은 시의적절한 선택이었다. 특히 지금의 20대들에게 80년대생 여성들이란 '어머니'로도 '친구'로도 기억되지 못하는 완벽한 타자들이고,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또 하나의 긍정적인(사람에 따라서는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면모는 어쨌거나 '김지영'이 여성주의 운동의 대중화에 기여했다는 점이다. '김지영'은 흔한 오해와는 달리 그렇게 급진적이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 정치적 팸플릿으로 보자면 '김지영'은 탁월한 글이라고 평가해도 좋은데, 누구나 쉽고 평이하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공감을 이끌어내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대중성에 있어서는 이를 능가할 작품이 앞으로도 나올 것 같지 않다.
한국의 여성주의 운동이 여러 논란을 빚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순전히 나쁘다고만 말하는 것은 의도적인 기억의 왜곡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위계에 의한 성폭력이나 흔히 말하는 '연서복'스러운 행동들이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이 분명히 자리잡은 것에는 어찌됐든 여성주의 운동의 공로가 컸다. 대학가에서 크게 이슈가 되었던 '단톡방 성희롱'과 같은 사건들을 몰아내는데 앞장선 것 역시 여성주의자들이었다. 대중적 여성주의 운동은 최소한 명백한 잘못에 대해 그것이 잘못이라고 지적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었다. '김지영'은 그 소설적인 완성도와는 별개로 여성주의 운동의 기수가 된 대중서적이었으며, 그런만큼 나는 '김지영'이 사회공동체를 위해 기여한 바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부정적인 면에 있어서는, '김지영'의 한계는 내가 대중적 여성주의 운동에 돌아서도록 한 계기와 대체로 일치했다. 어떤 의미로는 그런 한계에 있어서마저 전형적인 소설이었다고 표현해도 좋았다.
오혜진과 같은 여성주의 비평가들이 이미 지적한 바대로, '김지영'의 가장 큰 약점은 남성 가해자와 여성 피해자라는 낡은 이항대립을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다는 데 있다. 비교문학과 데리다의 물을 먹은 강단 여성주의자들의 꾸준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대중적 여성운동에서 남성 가해자-여성 피해자라는 서사는 결코 추방되는 법이 없었다. '김지영'에서도 이는 마찬가지라서, 남동생은 가해자이고 김지영은 피해자이며, 남자 선생들은 가해자이고 김지영은 피해자이며, 남성 동료들과 사장은 가해자이고 김지영은 피해자이며, 시가집은 가해자이며 김지영은 피해자라는 식의 이야기만이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이 진부한 이항대립은 현대의 젠더 문제에 얽혀 있는 복잡성과 양가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며, 남성이 여성을 착취한다는 20세기 여성운동의 틀린 도식을 되풀이함으로써 대중적 여성운동의 방향성이 엇나가도록 이끌었다. '김지영'을 접한 젊은 남성들의 가장 격렬한 반발이 '너희만 힘들었는줄 아느냐'는 형태로 터져나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합리화 이전의 폭력성과 병영국가적인 한국 사회의 분위기는 그 세대 여성들에게 고통이었을 뿐만 아니라, 남성들에게 역시 고통이었다고 말해야만 한다. 한 시대와 사회의 문제에 대해 피해자와 가해자를 나눠 도덕주의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틀리기 쉬운 관점이며, 더 나아가 장기적인 현실정치에 있어서도 무익한 것이다.
물론 남편 정대현의 존재는 그런 한계를 일정 부분 넘어서려는 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그 세대 남성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이상적인 남편으로 재현되고 있는데, 역사와 사회의 한계 내에 갇혀 있는 무력한 개인이면서도 아내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남편의 모습은 가해자라고도 피해자라고도 하기 어렵다. 그러나 정대현이라는 인물이 가해자/피해자의 이항대립을 허무는 장치로 기능한다기보다는, 클리셰가 된 가족주의의 레토릭을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라는 인상을 지우는 것 역시 어렵다. 오히려 남성들은 그에 대해 '도대체 정대현처럼 좋은 남편을 둔 사람이 뭐가 불만이란 말인가'라는 식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해야만 하겠다.
남성 가해자-여성 피해자의 이분법은 곧 대중적 여성주의 운동의 배타성과도 연결된다. 한국에서 여성운동은 남성과 비남성이라는 위계적 구조에 대항해 여성과 비여성이라는 새로운 위계적 구조를 정립하는 형태로 나아갔다. TERF를 비롯한 극단주의 진영이 반여성주의자들에게는 '타락한 여성주의'로, 기존의 여성주의자들에게는 '골칫덩어리'들로 취급받고 있지만, 나는 그러한 극단주의가 여성운동의 타락도 극단도 아니라고 믿는다. 오히려 배타성과 극단주의는 여성주의 운동 내부에 상존하고 있었다고 해야만 한다.
미러링이라는 전략은 그런 배타성을 여실히 드러냈다. 처음에는 남성-비남성의 위계에 대한 풍자적 전유로 시작됐던 미러링은 어느샌가 여성-비여성의 위계를 나타내는 수단이 되었다. 풍자와 혐오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남성 소수자들은 단지 남성이면서도 약자라는 이유로 경멸의 대상이 되어 갔다. 그 악명과는 달리 메갈리아에는 여러 관점을 지닌 여성주의자들이 공존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모든 것이 뒤섞여버린 상황에서 주류로 떠오른 것은 배타적인 분파였다.
'김지영'은 다원성과 차이를 무화하고 극도로 피상화된 이원론적 세계관을 주입시킨다. 그러한 주입은 가장 조악한 형태의 프로파간다로 이루어지고, 그 조악함은 대중적 접근성을 향상시키지만 대신 정교한 인식에는 방해만이 될 뿐이다. '김지영'은 그 자체로는 결코 급진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극단주의 진영의 도구로 사용되기 쉬웠다. 즉 '김지영'의 문제는 작품의 내용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한국의 대중적 여성운동이라는 맥락 속에 놓여 있다고 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의 비여성주의/반여성주의 진영이 '김지영'에 보여준 반응은 작품의 내용 그 자체에 대한 반발에 집중되었다. 그 반발이 얼마나 타당한가 하는 문제와는 별개로, 나는 그것이 현명하지 못한 반응이었다고 생각한다. 작품 내적으로 본다면, '김지영'은 어떤 진지한 가치도 찾기 어려운 구식 리얼리즘 소설일 뿐이다. 그에 대한 무의미한 논쟁을 생산하는 것은 반대로 작품에 더 큰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이 된다. 단지 반발하는 것을 넘어 무난한 계몽소설/계몽영화인 '김지영'에 극단적인 반응을 보여주게 된다면, '한국에는 여성혐오가 만연해 있다'는 인식만을 재확대하고 극단주의 진영의 힘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나는 한국의 비여성주의 남성들이 그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보다 합리적인 관점을 갖기를 원한다. 우리는 '김지영'을 증오할 필요도 없고 비웃을 필요도 없으며 그에 대해 슬퍼해야할 이유도 없다. 필요한 것은 그것을 둘러싼 조건들과 여성주의 운동의 맥락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것은 '김지영'에 관한 논란을 생산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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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마드 이전의 메갈리아는 대체적으로 소수자 포용의 기류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함. 소수자라면 남성 또한 받아들이는 포용자들은 후에 워마드로 이주하는 반남성 집단과 대립을 하였으며, 이 점에서 관점 차가 있다고 봄.
둘 다 여러 관점의 인간들이 모인 곳이 맞다. 워마드는 그 중 반성소수자 집단이 모인거라 좀 더 균일적이지만
제가 그렇게 얘기했는데도 굳이 이 글을 다시 재유포했습니까... - dc App
제대로 봤네 오랜만에 머리로 쓴 글을 봐서 좋다. 전환기의, 별 것 아닌 것으로 보이는 것들의 나열, 그리고 진짜 멀쩡한 남편, 이런 것들이 중요한 장치지, 누가 더 심하게 고생했다는 얘기는 김지영의 힘(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을 전혀 모르고 하는 말들임. - dc App
위대한 예술가들의 역작들보다 프로파간다 쪼가리가 더 잘 팔리는게 기분나쁘고 뭐 그런거지
ㄹㅇ 책장사와 작가는 버는돈이 다르다 - dc App
사실 이거임 프로파간다가 승리하니까 불쾌함
좋은글 감사합니다 다시한번 생각해볼수있는 기회가 됬어요 - dc App
간만에 끝까지 읽은 긴 글. 감사합니다 - dc App
흠
재밌는 글이네 꽤 설득력 있다 생각함
애초에 그 책의 통계도 페미들이 비약하고 열심히 주물러서 만든 주작 통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