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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서는 흐름출판에서 보내준 책입니다. 책을 보내준 흐름출판사에 감사하다는 말을 드립니다.
하단에는 이처럼 도장이 찍혀있는데, 나름 한정판? 스러운 느낌이라서 좋더군요.
음.... 이 책을 읽으면서 할 말은 아주 많습니다. 주말 내에 읽겠다고 했던 다짐을 어기고 2번째 주말을 맞이한 것도 그렇고 그 기간 내에 다른 분들의 독후감이 없어서 당황했습니다.
저는 다른 sns나 블로그 및 홈페이지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동시에 이 책을 얻은 게 이곳이니 여기에만 독후감을 올리겠습니다.
0. 독후감을 쓰면서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 고민은 내가 얼마나 정직하게 써야할 것인가, 였구요.
어느 갤럼은 앞으로는 독갤에서 협찬이 없겠다고 말했습니다만, 애초에 이런 변방갤러리에 그것도 검색엔진에 잘 노출되지도 않으면서 대중적으로 이미지가 나쁜 디시인사이드 사이트에 요청했다는 것은 관계자분의 메일대로 말하자면 '솔직한 감상'이 듣고 싶은 거겠지요.
그래서 그냥 솔직하게 쓰기로 했습니다. 불만있습니까, HUMAN? 당신의 차후협찬, 내가 끊었다.
and I also, 독 갤 좋 아
1.
흐름출판은 최근에 이국종 교수님의 '골든아워'라는 작품을 출간한 것으로 알려진 회사입니다. 그 책이 인기가 있었던 것은 독자들의 요구 - 생생한 현장의 기록이자 한 인간의 영웅적(여기서 말하는 영웅적은 소시민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일을 헌신하는 행위 자체가 타인에게 동경을 불러일으키고 그게 생명과 연관되어 있다면 더더욱 그렇기에 영웅적이라는 단어를 쓰겠습니다)인 모습- 에 부응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전기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극적인 사건이 있더라도 그것은 개인적인 체험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게 아무리 극적이고 흥미로운 사건이라 할지라도 가공되지 않은 이야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네, 이 책은 3000미터 상공에서 떨어진 한 소녀의 극적인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남미의 조류학자이자 생태학자라는 타이틀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크게 유명할 이야기는 아니지요. 그녀가 자란 환경 덕분에 그녀는 학식이 높은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마찬가지로 그런 지식 덕분에 생존할 수 있었으니까요.
저는 이 책이 당시의 상황만을 기록하지 않는다는 점, 작가가 2부의 제목을 '나의 두 번째 심장, 팡구아나'라고 지은 점에서 생태학적인 이야기도 첨부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생태학을 좋아합니다. 어렸을 때 다큐멘터리를 자주 보았고 동물의왕국이라는 프로그램이 오랫동안 인기가 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그것은 대중적인 주제입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방식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우선, 이 책은 현재의 이야기 - 56살의 내가 비행기를 타고 페루로 가는 상황 - 를 과거에 추락사건과 겹치면서 서술합니다. 이런 서술은 꽤나 기교적이지만 반드시 성공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 이 이야기는 추락하는 상황부터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부모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전기물에서 시작되는 가장 최악의 서술방식입니다. 물론 저자에게 있어서 부모의 이야기는 중요합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어떻게 살아왔고 또한 일찍 돌아가신 그녀의 어머니가 어떤 분이었는지 상세하게 기술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독자는 그런 이야기에 관심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일화는 상당히 극적이지만 그는 냉정하게 말하자면 패전까지 무사히 살아남은 유대인이 아닌 독일인이었습니다. 시대적 배경상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여있는 사람은 많았고, 그 상황에서도 그는 여전히 자기만의 꿈을 좇고있을 뿐입니다. 물론 그런 게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앞에서 말했듯이 '재미조차 없는' 개인적인 체험 - 그것도 본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부모의 이야기 - 라는 점에서는 치명적입니다.
저희에게 와닿을 수 있게 변형해보자면, 패망 후의 일본 학자가 만주에서 고국 일본으로 귀한하는 여정 정도가 되겠네요. 물론 고생스럽고 힘든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에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은 누구나 고통스러웠죠, 그렇지 않나요?
갓 스물살이 되었을 때, 저는 한 노인에게서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저의 먼 친척이었고 피할 수 없는 자리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피난길에서부터 독재정권, 그리고 518민주화운동까지 거쳐간 험난한 인생을 기술하지만 저에게 있어서는 그저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단순한 사실의 나열에 불과했으니까요.
율라이네 쾨프케의 부모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한 기술에 불과합니다. 에세이는 날것의 이야기를, 단지 경험을 술술 불어내는 게 아닙니다. 에세이 또한 창작이고 그것은 가공되어야 하는 이야기인데 이 책은 1/3 분량인 100페이지 까지 같은 이야기만을 반복합니다.
네, 이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진짜 아무도 관심없는 부모의 이야기를 100페이지 넘게 하고 있습니다. 이걸 참을성있게 듣는 것은 고통과 인내의 시간입니다. 농담이 아니라 카프카의 굴이나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읽고, 제임스 조이스의 벽돌이나 잃시찾의 1권을 읽는 것과 비슷할 것입니다:(
2.
그렇다고 아주 나빴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분명 괜찮았던 부분도 있습니다. 추락 직후부터 그 이후의 이야기는 박자감을 가지고 생동감있게 출발합니다. 그것은 율리아네가 들었던 부모의 이야기가 아니라 율리아네 자신의 이야기라서 그렇겠지요. 아무리 형편없는 작가라도 자신의 경험에서 우려나오는 이야기를 쓸 때에는 그의 필력을 훨씬 웃도는 게 가능해집니다. 그것은 경험이 준 선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율리아네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그리고 생환한 뒤에 마냥 좋지만 않았던 환경들. 아버지의 거친 행동을 어린 소녀가 감당해야 되었던 부분과 기레기의 공격성과 루머로 뒤덮힌 채 아무 보호도 받지 못한 채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고통받았고, 이 부분은 흥미로우면서도 그녀의 삶에 동정심이 들었습니다.
특히 그녀의 어머니의 머리의 절반은 사라졌지만 다른 신체부위가 대부분 무사했다는 것을 바탕으로 부녀가 그녀의 어머니가 사고 직후 며칠간을 살아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정말이지, 때로는 지식이 독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거기에 비행기를 타고 독일에 오게 된 어머니의 시체는 몇 조각의 뼈로만 남았습니다. 페루에서 수습한 시신은 두개골의 절반이 날아갔을 뿐이었는데, 방부처리를 한 시체가 독일에 도착하니 뼈조각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 사체가 어머니의 것인지 철저하게 확인하고 싶어했으나 무산됩니다. 당시의 열약한 수색환경과 체계적이지 못한 사후관리 탓입니다. 당시 작가는 아버지가 편집적으로 행동한 것처럼 생각했는데, 나중에 되어서야 실제로 많은 사체가 혼동되면서 상당히 많은 수의 시신이 제대로 된 조사도 없이 일괄적으로 묻혔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한 사람의 비극은 집단에서 보기에는 그저 흥미로운 사건에 불과하지요. 이 부분은 오랫동안 생각하게 됩니다.
(참고로 여기에 나오는 베르너 헤어조크는 독일의 그 영화감독이 맞습니다. 그는 율리아네 쾨프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영화를 찍기도 했는데, 그 비행기에 그가 탑승할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운이 좋았습니다.)
20대의 젊은 시절에 페루로 돌아온 쾨프케는 여전히 그녀를 괴롭히는 세상과 마주하게 됩니다. 어느 날에는 안면식이 없던 여성이 갑자기 나타나서 그녀에게 아는 척을 합니다. 쾨프케를 귀찮게 하지요. 호텔까지 배웅하면서 그녀에게 편지를 건네면서 읽어보라고 말합니다. 편지의 내용은 뭐, 뻔합니다. 그녀는 쾨프케가 사고를 당했던 시절의 그녀의 바로 앞에 서 있었던 소년의 엄마였습니다. 그녀는 편지에서 왜 하필이면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 쾨프케를 살렸냐면서 하나님을 원망했다는 내용을 적지요.
본인 입장에서는 부조리하고 쾨프케에게 꼭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였을 테지만, 쾨프케에게 있어서는 난데없는 공격을 받은 셈이지요..
또 다른 이야기로는 엄마의 옛 동료는 쾨프케가 아니라 그녀의 어머니가 살았을 거라고 말하면서 그런데 이런, 그분의 딸이었네요, 라고 말합니다. 집단사고에서 홀로 살아남은 대가는 가혹합니다. 베르너 헤어조크의 말처럼 좋든 싫든 그녀만의 이야기가 아닌 셈입니다.
3.
책의 후반부로 넘어가면 이제 그녀는 자신의 연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서도 저를 실망스럽게 만드는 것은 그녀가 자랑하던 숲의 생태와 그곳에 서술하는 생물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다시피합니다. 팡구아나 숲이 매력적이라면 그게 얼마나 매력적인지 말해야 하는데 저자만 이해한 채로 자신의 연구와 주변 사람의 관계만 나열합니다. 네, 이 이야기에서 저희는 팡구아나 숲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지극히 관심도 없는 한 조류학자의 주변인만을 알 수 있을 뿐이지요. 그 이야기는 관심없음에서 관심있음으로 돌릴만큼 매력적이지 않고요.
개인적인 바람으로, 저는 자연이 여전히 보호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지요. 선진국은 후진국을 발판으로 계속 성장하고 있고 도시화된 세상에서 태어나 자란 많은 아이들은 자연의 보호 따위는 관심조차 없을 것입니다. 생각이 얕고 자폐적인 사람일수록 더더욱 그렇겠지요. 나약한 정신이 보호받기 위해서는 체계적이며 선진화된 문물과 제도가 필요하니까요.
하지만 그런 필요가 없더라도 결국 편의에 따라가는 게 인간의 슬픈 본능입니다. 저도 자연을 사랑하지만 도시화된 세계에서 생활하는 한, 제도에 의존하지 않고는 지금의 삶을 영위하면서 동시에 자연을 보호할 수 없습니다. 그건 정말 슬프고도 힘든 일입니다.
결국, 자연은 허물어지고 망가질 수밖에 없는 운명일 것입니다. 하지만 율리아네 쾨프케가 정말로 팡구아나 숲의 매력을 말하고 싶었다면, 그 자연이 보호받아야 한다고 믿는다면 이 지문에 그 부분까지 적었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책의 분량을 줄이는 대신 그녀의 생환기와 그 여파에만 집중하던가요.
하지만 저자는 둘 중 어느것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훌륭한 학자일 수는 있지만 좋은 작가는 되지 못합니다.
아마 그것은 쾨프케가 말하고 싶었던 부분이 독자의 흥미와 일치하지 않았던 거겠지요. 이 부분은 비극입니다.
4.
사실 후반부는 아쉬움 정도에 불과합니다. 거의 대부분의 단점은 전반부에 있습니다. 106페이지부터 읽으시면 적당히 만족할 것입니다.
책을 덮고나서 느꼈던 것은 3000미터 상공에서 추락하여 생환했던 그녀의 여정보다 그 이후의 삶이 더욱 흥미롭다는 것입니다. 선진국이라고 말하는 독일도 큰 차이가 없더군요. 90년대에도 그녀는 여전히 고통받았으니까요.
좀 더 가공된 이야기 - 허구를 집어넣으라는 뜻이 아니라, 독자에게 친화적으로 변형된 이야기였으면 좋았을 거라고 아쉬움을 남기는 것으로 제 감상을 마칩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흐름출판에 감사합니다.
해당 댓글은 삭제되었습니다.
잘쓴건 모르겠고 차후 협찬 진짜 없을지도........
사실 농담이고 주사위는 이미 던져짐. 독갤 눈팅했으니 그분도 각오했겠져
자 이제 url 보내자
시러욤
해당 댓글은 삭제되었습니다.
8ㅅ8
솔직한게 좋다는거에요
모루겟소요
정말 솔직하게 쓰신듯.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ㅎㅎ
오우 글 잘 쓰시네요 and 협찬 바사삭
ㅋㅋㅋ 담당자분이 이 댓글을 재밌어했습니다
되게 꼰대같은데 누구나 힘들다 그러니 어쩔수없다 이러는거. 독일인인 게.문제가 아니라 이 논리면 유대인이었어도 유대인이 한둘이냐 다른 유대인도 다 힘들었다고 간단히 말할 수 있는 건데. 100페이지 분량이 부담이면 부담인거지 누구나 힘들었다 이딴건 어디에도 도움안되는 말임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율리아네 아버지의 이야기가 그 시대에는 보편적인 것이었을뿐더러 차별성을 둘 정도로 이야기가 진솔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남의 인생을 가지고 고생의 우위를 두는 것은 꼰대적인 관점이나, 그게 책으로 나왔을 때에는 좀 더 냉정하게 봐야된다고 여깁니다.
당연히 책과 글은 평가의 대상이고 이 경우엔 증정까지 받았으니 그러겠지. 문제는 책에 대하여 비판하는 자세가 아니라 비판의 도구로 쓰인 잣대라는 거. 차별성이 없다, 진솔하지 않다라는 이 잣대는 마찬가지로 유대인한테도 적용될수있고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어디에나 적용될 수있잖아. 그럼 이게 비판 작용으로써 효력이 있냐는거지 여기저기 모조리 쓰이는데
차별성에 주안점을 뒀는데 정작 그 비판적 잣대도 차별성이 없음.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유대인의 이야기도 마찬가지고 한국인이나 일본인의 이야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에 만주에서 고국으로 귀한하는 일본인 이야기를 창작하거나 먼 친척의 이야기를 꺼낸 것입니다.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단순히 개인이 겪었던 격동의 서사가 이야기를 흥미롭게 만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저자인 율리아네 쾨프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부모의 이야기이고 부모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이 어떤 고통을 겪었는가입니다. 하지만 독자에게 있어서는 크게 흥미롭지 못하고 그 이유는 이야기가 보편적인 것인 동시에 그 서술방식입니다.
똑같은 상황을 겪어도 한 사람의 서술은 다른 한 사람의 서술보다 우월할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닌, 그 내면적인 감정이나 느낀 것, 그리고 이야기의 정리와 그것을 서술하는 구조에서 나타나는 차이입니다. 쉽게 말해서, 모든 자서전이나 자전적 경험의 에세이의 재미가 서로 다르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당연하다는 건 비판적 잣대가 차별성이 없다는데 해당되는 얘기같네. 100페이지씩이나 궁금하지도 않은 얘기 풀어대는 이 책의 초반부에 지적하는 비판적 잣대의 중심은 차별성의 유무지만 정작 그 잣대가 차별성이 결여돼있다는 모순. 보편적인 게 문제라지만 이 논리에 따르면 보편적이지 않은 게 없지 유대인 독일인 한국인 모조리 보편적인데. 그 시대엔 다 그랬는데.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군요. 본문에서도 분명 가공되지 않는 이야기는 한계가 있다고 썻습니다. 비판적 잣대의 차별성이니 보편성이니 하는 문제로 넘어가려고 하는데, 애초에 차별성의 유무는 체험의 차이가 아니라 서술의 차이입니다.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이야기는 한계가 있다, 라고 못박아둠으로서 저는 분명히 개인적인 체험 그 자체에는 한계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말귀를 못알아듣는거 같은데 보편성은 니가 본문에서 먼저 꺼낸 얘기고 난 거기에 따라 줄곧 얘길 계속하고 있음. 서술의 차이가 차별성을 불러일으키겠지만 서술의 차이를 운운할 것도 없이 경험이 특별하다면, 예컨대 3096일 같은 경우인 그자체로 특수성을 확보함. 차별성의 유무라 서술의 차이라고 하는 건 일차원적인 거지.
그리고 서술이 차이를 둔대도 "그 시대에는 다 그랬는데 뭘" 이란 영양가 없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있나? 본문 보니 환원주의적이진 않다만 그렇다고 환원적으로 빠질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게 아니지 누구도 아닌 본인이 "누구나 고통스러웠죠"라는데. 서술의 차이는 있어도 "누구나~" 운운할 수 있잖아 안그래? 아무짝에도 도움안되는 허무맹랑한 비판일 수밖에.
아니요. 본문에서는 보편성이라고 압축하지 않습니다. 답글에서 보편적이라고 취하고 그것은 본문의 이야기를 이해했다는 전제에서 경제적으로 압축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고난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라면 비슷한 수준의 이야기를 뽑아낼 수 있고, 실제로 국내만해도 625시절에 유년기를 보냈던 어르신들이 숱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뱉어냅니다. 반짝 성공했던 사람들도 자신의 성공신화를 뱉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분명히 말했던 것은 율리아네 쾨프케의 3000m 상공에서 추락한 것은 특별성을 지니고 있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율리아네 쾨프케 개인의 체험이고 그렇기 때문에 서술하는 시점에서 설령 누군가 자신과 비슷하거나 어쩌면 더 극적인 체험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이야기는 보편성에서 벗어납니다. 그녀의 이야기
를 기술한 영화에서 극적인 요소를 집어넣으려고 원숭이와 만나게 하거나 표범을 등장시켰으나 오히려 그 이야기가 더 하찮아지는 부분처럼요. 마찬가지로 3096도 그렇고요. 차별성의 유무라고 서술하기보다는 (개인의 경험에 의하지 않은 역사적인 이야기일 때 단순한 서술은 차별성을 잃는다) 라고 본문에서도 댓글에서도 계속 강조했는데 그 부분은 피하면서이야기하는군요? 계속 같은 곳에서 맴도는 것은 당신이 제가 말했던 부분에서 모든 이야기는 보편성이다, 라는 일부만 가지고 진실인 것처럼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책을 읽고 비난하는데 한두 줄의 문장이 아니라 긴 분량을 차지하면서 서술한 것은 분명히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1번 글의 아래쪽 몇 문단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걸 단순히 일부라고 일컫는 건 치사한 모습이지. 단어 하나나 문장 하나만을 지적한 것도 아니고 지금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 불과했으니까요" 이 분량 전체가 보편성에 관해 논하고 있는데 이는 전체 글의 분량에 따져보면 분명 일부이나 분명히 지분을 차지하고 있지 실제 예시까지 더해가면서 설명을 했고 넌.
지적이라는 건 일정한 부분에 관하여 논하는 거지 글 전체가 문제거리인 것도 아니고 어떤 부분 따위가 문제가 있다고 여겨지는 게 일반적이니까. 또 만약 글 전체가 문제가 있다면 거기에 대해 언급했겠지만 그렇지 않으니까 특정한 부분을 지목한 거고, 근데 웃기게도 부분적으로 지적하고 있다고 따지는 건 형식적으로 글의 분량에 비해서 지적받는 부분은 적을 수밖에
없는 건데 이 공공연한 사실을 빌미로 지적하는 건 상당히 황당하다는 생각밖에 안든다.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이건 보편성 운운하는 구절보다 더 웃긴 모습이지.
유대인이 아니라 독일인이다, 그보다 고통스러운 사람도 많았다, 일본 학자, 한 노인, 누구나 고통스럽다.... 이 수많은 부분'들'을 단순히 맴돌고 있다고 칭하는 건 회피야. 본인도 꼰대적인 관점이라고 인정하더니.
100페이지 분량이 왜 부담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부득이하게 채운 부분이고 그쪽에서 그 부분을 지적했으니 제가 자세하게 설명해준거지요. 일부를 지적하는 것은 옳으나 전체적인 맥락을 무시한 지적은 오독입니다. 제 이야기가 본질에서 흐려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쪽이 계속 글의 일부를 오독한 상태로 이야기의 흐름을 붙잡으려고 하기 때문이었고 저는 그게 아님을 설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런 시야를 보면 안된다고 설명하려고 말이 늘어진 거지 제 이야기의 본질은 한결같습니다. 그렇지만 계속 같은 곳에서 맴돌고 있는걸보니 그만하고 각자 생각하는 대로 가야겠지요.
되게 웃긴 화법을 쓰네 부득이하게 채웠다는 게 뭔데? 그러지 않으면 안될 이유라도 있었던거야? 해명이라고 보기엔 웃음부터 유발해서 진지하게 받아들이기가 힘든데. 그리고 오독이라니. 분량을 할애하고 예시를 들면서 보편성을 걸고 넘어지고, 그리고 피해자가 아니라 독일인이라는 가해자(그가 직접 착취하진 않았어도) 입장을 들먹인 사실을 강조하는게 왜 오독이야?
니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100페이지는 무리수다 쉴드 못친다" 이건데 그 무리수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언급된 보편성을 지적하는 거지 너의 허무맹랑한 이 잣대를 지적한다고 너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곡해됨? 한결같이 결론부로 끌고가려하는데 결론은 문제가 아냐 과정에서 문제가 있다고 보여지는거지.
예이 그냥 제가 꼰대가 되겠습니다.
선영이 새끼 존나 지랄하네 꺼져라
그게 전형적인 회피야. 그리고 선영이 타령 좀 그만해라 비판 좀 하면 선영이로 몰아가면서 찍어누르려고하네. 불만이 있으면 지적를 해라 징징거리지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