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내용을 확인하시려면 스크롤 해주세요.

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만두이미지

음악에 관한 책을 읽는 건 고역이다. 어느 한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절로 이를 듣고 싶어지는데, 이게 끝나기도 전에 다른 음악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곤 한다. 그럼 이제 음악을 멈추고 그 음악을 들어보든, 읽는 걸 잠시 보류하고 음악을 마저 듣든, 아니면 다음 음악을 듣는 걸 보류하고 읽어나가든 셋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어느 쪽이든 딱히 만족스러운 해결책이 아니다. 쇼스타코비치의 회고록 <증언>을 읽기 시작할 때도 이런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음악에 대한 책은 아니었다. 본인이 작곡한 음악과 다른 음악가들의 이야기가 나오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 사람들,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쇼스타코비치는 소련 치하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예술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덕분에 이데올로기의 어용 음악가라는 평을 과거에 받기도 하였고, 내부에서도 많은 비판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이런 비판에도 의미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회고록에서 조명하는 삶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그는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주인공과 같은, 체제의 존속에 협조하며 고통받는 사람에 가깝다. 그것이 살아남는 방법이다. 그는 자신을 배신한 사람들을 싫어할 지언정, 그들이 악한 일을 했다고 여기진 않는다. 그들도 살아남는 방법을 택한 것 뿐이다.



하지만 누누히 나오는 것이 그가 이런 이들을 싫어한다는 것, 그리고 이런 행위들을 추하다고 본다는 점이다. 우스꽝스러운 일화로서 소개하는 것이 있다. “보시다시피 이 두 이야기의 주인공은 그리 근사한 모습은 아니다. 두 사람 모두 어른인데도 바지를 더럽혔다. 그뿐만 아니라 두 사람 모두 창피스러운 그 일을 황홀한 표정으로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녔다. (...)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간 아첨이다. 이 무슨 저실스럽고 구역질나는 아첨인지. 이런 이야기에서 스탈린은 일종의 슈퍼맨 같은 존재가 된다.” 스탈린의 앞에서 두려운 나머지 바지에 똥을 지렸다는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늘어놓는 모습은, 아무리 관대하게 봐줘도 좋게 볼 여지가 없다. 우리는 이런 것을 추하다고 느낀다.



추함에 대한 이야기다. 스탈린이 역사와 진실을 바꾸고 모두가 그것이 바뀐 것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된 시대다. 에서 이야기하는 진실이 의미 없어진 시대다. 하지만 그런 시대에서조차, 우리의 내면에 있는 가치 판단은 여전히 작용한다. 아무리 말로 표현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는 이런 것이 추하다는 것을 알고 느낄 수 있다. 그 시대의 사람들조차도 그러하다.



다만 이상은 이 회고록에서 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쇼스타코비치와 함께 살았던 수많은 예술가들에 대한 기억과, 이들이 어떤 식으로 망가져가도록 세상이 그들을 밀어붙였는지에 대한 회한스러운 기억이다. 아흐마토바, 조셴코, 예이젠시테인, 만델스탐, 프로코피에프, 메이예르홀트, 마야콥스키 등등… 그리고 그들에 대한 기억과 일화들이 그려내는 생생한 러시아 땅에서의 사건들, 그 분위기. 진부하기 짝이 없는 표현이라고 스스로도 느끼지만, 이 진부한 표현이야말로 정말 이 책을 읽으며 겪을 경험을 잘 요약해낸다. <증언>은 독자를 그 당시의 러시아에 데려다놓는다. 어떤 체험을 할 수 있고, 그 체험을 통해 당신이 무엇을 느끼게 될지를 알려준다. 그리고 이를 사랑하게 만든다.



아직도 머릿속에서 광적으로 무덤 앞에 엎드려 절을 하며 이마를 땅에 대고 신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하는 천재 피아니스트 유디나가 생각난다. 자신을 무시하는 발라키레프 앞에서 술에 취한 채 어쩔 줄 모르고 빨간 코를 씰룩거리는 무소륵스키가 보이는 것 같다. 남편이 정부에 끌려간 이후 이웃 누구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상황 속에서 강도들에게 열일곱군데나 칼에 찔려 죽은 메이예르홀트의 아내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리고 이런 이미지들을 언젠가 글 속에서 이름과 얼굴을 지운 채 써먹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비록 쇼스타코비치 본인이 ‘뜨겁게 끓는 죽은 사람 위에 기억을 들이부어 훌륭한 고기 소스’를 만드는 것이라며 싫어한 방식이긴 하지만 말이다.



서방 세계에 대한 그의 혐오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알다시피 50-80년대의 서방 자유 진영의 소위 휴머니스트들은 다소 위선적이고 우스꽝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저들의 이상은 모호했고 실제로 고통 받는 사람들 앞에서 이상을 앞세웠으며, 자기들 나름의 선한 목표를 충족시킨 뒤에는 뒤도 보지 않았다. 68운동이나 락밴드 따위의 대중적 운동이 다 그렇다곤 하지만, 지식인들이 그랬다는 것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솔제니친이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와 <수용소 군도>를 출판하기까진 소련의 상황을 몰랐다, 라고들 변명하지만, 정말로 그 경직된 태도와 말 속에서 무언가 좋지 못한, 불길한 공모가 이뤄지고 있다는 암시를 받지 못한 걸까? 자기들의 요청에 의해 불려나온 소련의 고통 받는 지식인/예술가들과 이야기를 하며?



어쩌면 내가 너무 공산주의 진영 쪽에 이입해 이야기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태도 자체를 책의 매력에 대한 호소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그렇게 인간적인 방식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가득한 이야기의 모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