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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은 퀜틴 스키너의 <역사를 읽는 방법>에 대한 소개로 썼지만, 사실 그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려는 글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글은 정치철학사에 접근하는 중요한 방법론인 지성사적 접근(혹은 화맥주의적 접근)에 대해 소개하기 위해 쓰는 글에 가깝습니다. 그럼 지성사적 접근에 대한 글이라고 해야지 왜 <역사를 읽는 방법>을 소개하는 글로 쓰느냐, 하면 결국 지성사적 방법론에 대한 입문서로 가장 먼저 추천되는 것이 <역사를 읽는 방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서는 책 자체에 대한 소개보다도 <역사를 읽는 방법>이라는 책이 속해 있는 맥락을 소개하고 싶군요. 다만 제가 이 분야에 대한 공식적인 훈련을 받은 학자나 학생은 아니고, 단지 관심이 있을 뿐인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틀린 내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책의 저자인 퀜틴 스키너 교수는 대한민국 사람들에게는 생소하다면 생소한 학자입니다. 영국에서는 케임브리지 역사학과를 대표하는 교수이며 또한 정치사상사 분야의 대가로 여겨지지만, 한국에서의 인지도는 아무래도 이마누엘 월러스틴이나 에릭 홉스봄 같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편이죠. 비교적 최근에는 정치철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름 한 번 정도는 들어봤을 정도의 인지도는 갖게 됐습니다만, 여전히 잘 알려진 학자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 중요성에 비해 지나치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학자라는 점이 아쉽고, 그래서 저는 종종 (특히 정치철학에 관심이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 스키너 교수의 책을 추천하고는 합니다.


  지성사(Intellectual History)라는 학문 역시 우리들에게는 생소한 분야입니다. 지성사는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담론(discourse)의 역사를 추적하는 학문으로, 그것은 담론을 사회사, 문화사, 거시적인 의미에서의 역사, 경제사 등 다양한 맥락 위에서 읽어내면서 담론 그 자체가 변화해온 역사를 기술합니다. 이런 작업은 특히 방대한 텍스트에 대한 꼼꼼한 문헌학적 분석을 필수적으로 요구하며, 또한 그런 텍스트들 사이에 성립하는 역학 관계와 맥락을 중시합니다. 일부 학자들(밑에서 소개할 J.G.A. 포칵이 대표적입니다)은 이 학문의 기원을 르네상스 시대의 담론 분석까지 소급해 들어가고 있지만, 사실 지성사의 방법론을 실천적으로 정립하고 소개한 것은 거의 1960년대 이후 퀜틴 스키너를 비롯한 케임브리지 역사학과 교수들의 업적이라도 해도 좋습니다.


  지성사는 개념의 의미가 장소와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과정을 추적하는 학문인 개념사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개념사라는 이 야심찬 프로젝트는 아마도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정도로 알려져 있는 것 같은데, 이 역시 대한민국에서 유명한 저작은 아니군요. 이런 연구의 예시로는 '시민'이라는 개념의 역사를 제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시민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폴리스의 구성원'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자유민 남성'을 의미했습니다. 공화주의적 맥락 하에서 시민적 삶(civic life)이라고 표현한다면, 이것은 사회공동체 내부에서 적극적으로 정치적 문제들에 관여하는 삶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현대 대한민국에서 시민이라는 단어는 '시민권'등 (정부와 대립되는) 사회구성원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면서, 또 한편으로는 '시민의 정치 참여'와 같이 공동체의 문제들에 관여하는 정치적 삶이라는 의미 또한 내포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단순한 요약인데, 어쨌거나 이러한 개념의 전이를 추적하는 것이 개념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성사에서 중요한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크게 보면 1) 해석학적 접근과, 2) 화맥주의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둘은 나눠서 생각하는 것이 무의미할 만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접근법이라 할 수 있고요. 먼저 해석학적 접근은 아마도 딜타이의 해석학 혹은 니체의 계보학, 그게 아니라면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접해 보셨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렇게까지 어려운 개념은 아니고요.


  해석학에서는 기본적으로 '해석이란 무엇인가' 혹은 '이해란 무엇인가'에 대해 묻습니다. 이것을 묻다보면 결국 우리는 우리들이 공유하는 경험의 한계, 즉 해석학자들이 '선판단'이라고 부르는 선입견의 테두리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과 경험과 체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노력한다고 해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해석학자들에게 이 선입견은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타인의 언어를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판단과 타인의 선판단을 종합해서 생각하는 것으로 비로소 이해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게 됩니다.


  <역사를 읽는 방법>에서 소개되고 있는 예시 하나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마녀사냥이 합리화 이전의 야만성이 극도로 표출된 사건으로 기억합니다만, 실상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합리화 이후의 근대세계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기준에서 본다면, 마녀사냥은 극히 비합리적인 (베버식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전통적인') 행위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당대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의외로 비합리적인 행위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중세 후기에 성경은 신의 말씀을 담은 책으로 알려져 있었고, 당시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의심할만한 어떤 근거도 없었습니다. 결국 신의 말씀을 담은 책인 성경에서 '마녀는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중세 후기의 사람들은 마녀의 존재를 실제로 믿게 되었죠. 마녀사냥은 당시 사람들의 기준에서 본다면 지극히 합리적인 행위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화맥주의적 접근은 주로 후기분석철학, 그중에서도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에서 제시되는 '언어 게임' 이론과 관계되는 접근 방식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언어 게임' 이론을 통해 제시한 것처럼, 언어는 오직 그 언어가 사용되는 맥락과 배경을 알아야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399년에 죽었다'라고 하는 문장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소크라테스가 누군지 모른다면, 혹은 이 문장이 어떤 맥락에서 발화되었는지 모른다면 그 문장에 대한 해석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399년에 죽었다'라는 문장은 플라톤의 스승이며 인문철학자인 소크라테스가 기원전 399년에 죽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한 문장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장이 논리학 문제에서, 그러니까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399년에 죽었거나 막대는 구석에 세워져 있다'는 식으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단순히 선언문에 대해 설명하기 위한 예문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지성사학자들은 언제나 텍스트를 읽을 때 그 텍스트가 속해 있는 맥락을 파악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해석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를테면 로크의 <통치론>을 자유주의적인 저작으로 읽거나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직접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저작으로 읽는 독해 역시 지성사학자들이 보기에는 지독한 오독이 되는 것입니다. 로크는 전혀 자유주의자가 아니었으며 그의 <통치론>은 단지 휘그당원으로서 토리당의 주장에 반대하기 위한 정치적 팸플릿으로 씌었을 뿐입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직접민주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저작이 아니라 고전 공화주의의 관점에서 직접민주주의의 필연적 실패를 예견하고 그 좌절감을 써낸 저술에 가깝습니다. (사실 이와 같은 새로운 독법을 제시하는 것이 지성사학자들의 업적 중 하나입니다.)


  <역사를 읽는 방법>은 지성사의 방법론 그 자체에 대한 책입니다. 따라서 이 책 이후에는 그러한 방법론을 구체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저작들을 읽어보는 것이 도움이 되겠죠. 퀜틴 스키너 교수의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는 제러미 벤담과 아이자이아 벌린이 제시하는 자유주의적 자유 개념의 협소함을 비판하고, 공화주의적인 맥락 하에서 자유의 개념을 논하는 저작입니다. J.G.A. 포칵의 <마키아벨리언 모멘트>는 지성사 분야의 대작으로, 공화주의의 역사를 추적해나가면서 '미국은 자유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국가'라는 도식을 뒤흔드는 관점을 제시합니다. 이 두 저작은 지성사 분야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철학 분야에서 역시 중요한 저작으로,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긴 소개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