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미스터 스퀴시'를 읽었다. 고유명사와 전문용어의 밀도를 견딜 수만 있다면 꼭 읽어볼만한 좋은 글이다. 이까지만 해도 충분한 감상이겠지만 이 한 마디로 일축해버리긴 아까운 소설이라 이렇게 서평을 쓴다.


   나는 원래 문학작품 그 자체를 꼼꼼하게 읽는 독법을 선호하는 편이다. 작품이 근거하고 있는 맥락과 담론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의 독해는 솔직히 말해 따분하다고 여긴다. 다만 '미스터 스퀴시'의 경우에는 평소처럼 담론을 괄호에 넣고 읽을 수 없었다. 이 소설은 주제의식이 명징하다 못해 강박적일 정도로 반복해서 드러나는 글쓰기를 구사한다. 그런 명징한 주제를 도외시한 채 서평을 진행할 수는 없기 때문에, 나는 이 소설을 관리되는 사회, (푸코적인 의미에서의) 주체화, 스펙터클이라는 맥락 아래에서 읽어낼 생각이다. 불충분한 독해이긴 하겠지만 오독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소설은 타인에 대한 대상화의 문제를 언급하며 시작해 타인에 대한 대상화의 문제로 끝난다. 수많은 마케팅 용어로 포장되어 있는 기술, 다시 말해 타인을 객관화해서 바라보고 통제하기 위해 고안된 기술은 타인을 주관과 의식을 가진 존재로 파악하지 않는다. 그것은 타인을 단지 외부세계의 자극에 반응할 뿐인 생존-기계의 형태로 파악한다. 따라서 타인은 단순한 수치가 되고 서류 위에 존재하는 데이터의 독립변수가 된다. 심지어는 신뢰와 믿음이라고 하는 가치마저도 자본으로 환원되고, '결혼 생활'이라는 상징으로 표현되는 더불어 사는 삶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삶의 양식이 된다. 이러한 방식의 근대적 합리성 -공리주의 합리성 - 은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 치명적이다. 우리가 합리화된 사회를 살아가는 이상 공리주의는 절대적 신의 형상을 대체하여 나타나며, 이것을 거부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대상화와 통제의 기술은 완전히 거부할 수도 없으며 완전히 받아들일 수도 없는 근대 사회의 딜레마이다.


   비판이론가들은 관리되는 사회 아래에서의 인간이 개인이라고 하는 종적 존재로부터 소외된다고 파악했다. 그들은 인간 소외라고 하는 청년 마르크스의 비판, 즉 '경제학 철학 초고'에서의 비판을 따라 노동자가 오직 노동자라는 유 아래에서만 살아갈 권리를 획득할 수 있는 현실을 비판했다. 그들의 비판은 여전히 유효한 지점이 있으며, 우리는 아직도 한 명의 인간이 톱니바퀴 속의 부품처럼 소모되는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미스터 스퀴시'에서 관리되는 사회가 재현되는 방식은 비판이론적이라기보다는 푸코적이다. 개인은 개인이라는 종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극단적으로 파편화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하나하나의 개인까지도 생명관리의 시스템 아래에 놓이게 하는 통치의 지식(이것들은 작중에서 인구통계학과 사회심리학이라는 형태로 표현된다)이면서, 동시에 개별적으로 권력을 체현하는 몸이 되는 개인 그 자체다. 소설 속에서 개인은 절대적인 외부적 세계 앞에서 무기력하게 소모되는 인간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들 각각은 자발적으로 타인을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까지도) 대상화하고 소외시키며, 주체적인 권력의 장치로 기능한다. 소설은 마지막까지도 각각의 인물들이 서로를 소외시키고 이용해먹을 궁리를 하는 것으로 끝난다.


   관리되는 사회는 또한 스펙터클의 사회다. 우리가 사람들과 맺는 관계는 진실한 관계가 아닌 단순한 관계의 기술로 대체된다. 진정성과 성실성은 상실되거나 혹은 자본주의의 수사로 흡수된다. 더 나아가 우리는 스펙터클에 대한 비판 그 자체가 스펙터클로 소모되는 역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반자본주의적 기치를 내거는 미니멀리즘 생활양식이 자본주의에 의해 소모되고, 자본주의에 대한 염증을 드러내는 '피로사회'와 같은 저작이 일종의 세속종교처럼 소비되는 것과 같은 현상이 만연해 있다. 소설 속에서 일상성을 관통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 빌딩을 등반하는 사람의 모습조차 도시의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볼거리로 소비된다. 우리는 매일 매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스펙터클로 대체된 유아론적인 자폐증을 경험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대안은 있는가? 아도르노의 '진정한 예술'이나 기 드보르의 '진정한 관계'처럼 진정성 있는 것이 관리의 기술과 스펙터클을 대체할 수 있다는 믿음은 이미 제시된 바 있다. 이러한 믿음을 단순한 도피로 파악하는 것 역시 순진한 오독이라고는 하지만, 하여간 무언가 진정한 대안이 있고 그것으로 도피할 수 있다고 하는 발상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미스터 스퀴시'는 그런 희망들을 전적으로 부정한다. 그 단호한 거부가 자칫하면 진부해질 수 있는 관리되는 사회라는 주제의식에 생명력을 더한다.


   '미스터 스퀴시'는 순진한 희망을 보여주지 않는다. 모든 것은 총체적 무의미 속에서 완벽하게 무의미한 방식으로 소진된다. 주인공 격의 인물인 테리 슈미트는 무언가 능동적인 대안을 택하지 않고 다만 '미스터 스퀴시'의 제품에 독극물을 주입하는 상상만을 끝없이 반복할 뿐이다. 절박하고 피로한 일상 속에서 벼랑 끝까지 내몰려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호흡할 공간을 찾기 힘들 만큼 빽빽한 밀도의 글쓰기 속에서 반복된다. 작가는 그 소진의 과정을 마치 관조하는 것처럼 담담하게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미스터 스퀴시'를 읽는 것은 무의미하고 답답하며 고통스럽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 무의미와 답답함과 고통은 단순한 소설 속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삶과 세계의 문제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