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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이북출신 청년이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 해방을 맞이했고,
본래 경제학도였으나 예술을 하고자 영화도 찍고 글도 쓰고 하다가...
어쩌다 정계에 입문하여 4선 국회의원으로 마흔 다섯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돈도 명예도 지위도 얻었지만 예술가는 되지 못하였고,
진짜로 하고 싶었던 것을 영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한이 되었죠.
  
정치가가 된 이상 자기 스스로 예술을 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하고,
더 늦기 전에 본래 하고 싶었던 문학을 다른 방식으로 해보려고...
수필을 전문적으로 싣는 독특한 포켓형 잡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져 나온 잡지가 [샘터]였습니다.
담배값보다 조금 더 싼 가격에 잡지를 만들어 팔기로 했죠.
  
피천득 교수, 법정 스님, 이해인 수녀, 최인호 등이 주요 필진이었고,
정채봉 선생은 편집장이자 동화 작가이자 수필가로 활약했습니다.
돈 있는 정치가가 취미로 만든 잡지였지만, 퀄리티는 대단했습니다.
특히 오탈자 단 하나도 용서하지 않는다는 편집부의 집념이라던지,
원고료 지급은 칼같이 지킨다는 원칙으로 문인들 사이에 유명했죠.
    
법정 스님은 샘터에 우편으로 원고를 주어 글을 연재하였는데,
중간 교정쇄를 법정 스님이 보다가 오탈자가 나와서 노했습니다.
앞으로 샘터에 원고를 줄 수 없다고 법정 스님이 엄포를 놓자,
편집장 정채봉 선생이 법정 스님의 산방 암자로 곧바로 뛰어 갔고...
그 사과에 법정 스님은 화를 풀었지만 샘터 편집부는 달랐습니다.
이후 교정쇄 마저도 오탈자를 용납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생겼고,
정채봉 선생 이하 샘터 편집부의 퀄리티는 출판계 극강이 되었죠.
    
최인호는 샘터 편집부 사무실에서 글을 쓰는 것을 좋아했는데,
육필로 흘려 쓰는 그의 글씨를 바로 알아보고 타이핑하는 사람이
오직 샘터 편집부에만 있다는 것이 바로 그 이유였다고 합니다.
최인호는 샘터에 장기 연재한 [가족] 뿐만 아니라
온갖 연재 소설과 잡문 등을 샘터 사무실에서 쓰곤 했고,
샘터 편집부 직원이 군소리 않고 바로 타이핑해 주었다합니다.
충분한 시간과 인력 여유가 있으니 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법정 스님은 언제나 암자에 머물러서 돈 쓸 일이 없어 보였는데,
원고료 지급과 단행본 인세 지불을 닥달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샘터 편집부에서는 "스님이 돈을 밝힌다"며 의아하게 여겼지만,
이후 법정 스님이 고학생들과 고아들의 대학 진학을 후원하면서
대학교 등록금을 대 주는 일에 돈을 다 쓴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이후 샘터에서는 제때 원고료와 인세를 지급하는 것은 물론이고,
등록금 시즌이 되면 법정 스님에게 선금을 미리 지불하기도 했죠.
  
문인들에게는 "내가 글 써주고 왜 구걸해서 돈을 받아야 하는냐"라는,
전 세계에서 거의 유사하게 통용되고 있는 골치거리가 있습니다.
잡지든 신문이든 출판사든 하여튼 글을 실어 출간하는 매체들은
작가들에게 정당한 원고료를 제대로 안주고 뭉개는 경우가 많고,
특히 한국 잡지사들은 원고료 제때 잘 안주는 습관이 만연해 있었죠.
진보 매체라고 정의를 외치는 곳이 오히려 작가들 대우에 소홀하고
심지어 원고료를 더 잘 떼먹는다는 속설이 있기도 했습니다...
샘터는 그래서 파격적이었습니다 - 언제나 제 때 원고료를 입금했죠.
실은 이건 샘터 사가 충분한 돈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랬던 샘터도 누적 적자로 인하여 대학로의 사옥을 팔았고,
올해 연말을 끝으로 사실상 폐간이 예정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샘터를 만들었던 김재순 의원은 몇 년 전에 작고하였고,
편집장 정채봉 선생은 55살에 세상을 떠나면서 요절하였죠.
피천득 교수, 법정 스님, 최인호 작가 등 주요 필진도 고인이 되었고,
이해인 수녀 정도가 생존해 있는데 나이 70 을 훌쩍 넘겼습니다.
이제 한 시대가 저물어 버린 것이죠.
    
[퀴즈]
짤방 사진의 인물을 맞춰 보세요.
오른쪽 두번째 인물은 샘터를 만든 김재순이고,
다른 사람들은 상당히 이름 높은 글쟁이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