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1914) 같은 소설을 읽다 보면 작가의 페르소나에 해당되는 인물들로부터 진술되는 과거의 기억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상세해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 오래전에 지나쳤을 일이 마치 지금 겪고 있는 것처럼 세밀하고 생생하기 한이 없는 것이다. 그 기억의 순도는 작가가 그 일을 겪었던 상황에서 그만큼 섬세하게 반응했고, 또 그 사건들이 작가의 의식 속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는 증거일 터이다. ‘의식의 흐름’이 단지 기법의 문제일 수만은 없는 이유도 그 점과 관련이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겪은 일들을, 비록 그것이 좋지 않은 것이라고 해도 아예 잊어버리거나 혹은 상상을 통해 가공하여 원래의 기억을 덮고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 예민해서 날카로워진 기억을 기꺼이 그대로 자신의 의식 속에 품은 채 그 고통을 감수하며 살아간다. 그 기억에 찔린 의식으로 바라보는 세상이 밝을 리가 없다. 그것은 생각만 해도 얼마나 답답한 일일 것인가. 도대체 그 일들은 얼마나 절실했기에 그에게서 떠나지 않고 오랫동안 그의 의식을 괴롭도록 사로잡고 있는 것일까.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들은 그 불행한 의식의 주체가 바로 고전적 의미에서의 작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렇게 보면 작가라는 존재는 표현의 주체이기에 앞서 운명적으로 겪어야 했던 사건으로 인한 기억을 비참이자 영광으로 자기 존재 속에 받아들인 채 의식의 일부를 늘 그것에 내어 주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과거의 어떤 시간을 늘 현재로서 겪는 사람인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 기억이 시간 속에서 변질될까 봐 늘 조심스럽게 신경 쓰며 돌보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그냥 지나쳤더라면 얻을 수 있었을 일상의 평온함 대신 기꺼이 그 마음의 지옥에 자신을 가둔 자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채우고 있는 세밀하고 생생한 기억들이 그것을 증거하고 있다.
-민음사, <필론과 돼지: 이문열중단편전집(2016)>, <형식의 균열과 텍스트의 무의식 — 이문열의 초기 소설에 잠재된 어떤 가능성(손정수)> 中.
작가를 기억을 돌보는 사람이라고 표현하다니....
논쟁과는 별개로, 참 아름다운 말 아닌가요....
작가는 기억을 돌보는 사람이지만 대신 현재를 배반하는 사람이죠
글쓰기의 소재가 되기 위해선 무엇이든 과거로 흘려 보내야하고 그런 의미에서 현재란 단지 빨리 소재가 되기 위해 과거가 되어야만 할 것들에 지나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