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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 가볍게 훑어보았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과 함께 속편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을 읽어보았다. 내용에 대해서는 말할 것이 그리 많지 않다. 진리든 하나의 세계든 역사관이든 무언가 명확한 한 가지를 향해 나아가는 확신을 상실한 포스트모던 시대에 문화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이야기니 말이다. <동물화>에선 그 문화의 예시 중 하나로 오타쿠 문화를 들고 하나의 전제된 큰 이야기 '현실' 대신 '모에 요소'들을 수록한 데이터베이스를 사용해 문화를 즐기는 오타쿠들의 방식을 이야기했다. 이런 이야기에서 나오지 않으면 어색한 "근대문학의 종언" 따위의 이야기도 함께 곁들여지고, 그렇다면 이들과 구분되는 오타쿠 문화의 문학은 어떤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게임적>은 여기에서 이어진다. 그리고 그 대조로서 두 가지의 특징, "만화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과 "게임적 리얼리즘"을 든다. 전자는 구 리얼리즘-그러니까 일반적 문학-이 공공성을 위해 우리가 실제로 사는 현실을 토대로 한 글을 썼고, "만화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에서는 오타쿠들의 데이터베이스를 토대로 글을 써 소통의 장을 만드는 역할을 동일하게 수행한다고 설명한다. 후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비록 감상문에선 다소 간략적으로 소개한 바 있지만) 이를 통하여 오타쿠 문화의 문학을 여타 문학과 동급으로 취급하는 것에는 어폐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그저 그렇게 구조적 동일성을 지적하는 것만으로 넘기기에는, "현실"이 가진 특권적 가치가 크기 때문이다.
아마 비슷한 비판이 루이스의 가능세계론에서도 나온 적이 있었을 텐데, 수많은 가능한 세계들을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과 같이 동등하게 존재한다고 두는 것은 우리가 사는 현실의 지위를 논증 없이 격하시키는 것과 같다는 식이다. 마찬가지로 문학이 현실을 토대로 쓰는 것이 그저 많은 사람들이 현실에 익숙하기에 현실의 세계와 언어를 쓰는 것일 뿐, 그 이상은 딱히 없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 주장을 보다 더 진지하게 논증하는 텍스트를 보지 못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최소한 환상문학에 대한 옹호보다는 훨씬 더 강력한 논증을 펼쳐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게임적 리얼리즘"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면, 죽음 이후 리셋과 함께 다시 삶을 사는 것과, 다양한 선택을 통해 매번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캐릭터들을 그리는 "게임 같은 소설"/"소설 같은 게임"이 주 특징이다.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게임을 플레이하는 플레이어를 메타-게임적 존재로 게임 안에 밀어넣으며 문학의 포스트모더니즘 글들보다 오히려 더 효과적으로 메타 구조를 활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임을 예시로 들고, 그 영향을 받아 동일한 방법론을 글에 적용시킨 소설들을 이야기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동의한다. <에버17>과 <쓰르라미 울 적에>에서 쓰인 메타적 장치들은 바스의 <키메라> 등의 소설보다 더 효과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도 하나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게 있다.
"거기에는 이미 제작된 이야기의 다수가 처음부터 상투성과 단조로움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만약 독자가 주인공이 '영원의 세계'로부터 돌아오는 <원>의 결말, 등장인물 전원이 구조되는 <에버17>과 <쓰르라미 울 적에>의 결말에 주목하고, 그것을 적당주의라고 비판하고 싶다고 해도 이 비판은 전혀 의미가 없다. 그 이야기가 적당주의적인 것은 제작자도 소비자도 모두 알고 있다. 오타쿠들의 시장은 처음부터 이러한 자각 위에 성립해 있다." (p.189)
이런 서술을 한 뒤, 저자는 위에서 말한 "게임적 리얼리즘" 특성에 맞게 메타 구조적으로 이를 분석할 경우 매우 흥미롭다고 이야기한다. 그 흥미로움에는 위에서 말했듯 동의하지만, 결국 메타성 이외, 그러니까 아래 층위에서의 이야기 자체만으로는 비판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뜻과 같다. 이후 <쓰르라미>의 일부를 인용하며 그 문체에 담긴 "교묘한 속임수"("감정을 드러내어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도대체 그것이 누구의 감정인가, 애초에 누가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 매우 모호하게 쓰여 있다. (...)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구분하는 역할을 수행하지는 않는다.")를 이야기하지만, 결국 첫 문제점은 여전하다. 그저 이를 잠시 밀어두고 그 이상의 분석을 할 수 있다고 말할 뿐이다.
<게임적>의 서두에서부터 분명하게 느껴지는 뉘앙스, 오타쿠 문화를 아래의 것으로 두지 말고 방향성이 다른 동등한 문화로 여겨 달라는 마음과는 달리 <게임적>은 설득에 실패한 것 같아 보인다. 흥미로움과 별개로, 이들은 질이 낮다. 그 설득이 본 두 책의 주장이 아닌 것만은 다행이지만.

씹덕 평론은 아즈마 히로키 이후 딱히 괜찮은 게 읍는듯
사실 그 시대 이후로 씹덕 문화가 딱히 뭔가 매력적인 발전이 있지 않았던 것도 이유인 거 같기도 하고...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에서 지칭하는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은 오쓰카 에이지의 뇌피셜?로 틀지워진 개념이라 그 맥락없이 생각하면 이상해짐. 오쓰카 에이지는 캐릭터 소설 쓰는 법 같은 비평을 겸한 작법서를 통해 리얼리즘, 정확히는 사소설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단순화된 설명을 제시하고, 사소설스러운 관찰과 심리묘사를 통해 애니메이션스러운 연출과 클리셰를 담아내는 것이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이고, 이 또한 사소설로 대표되는 순문학처럼 오리지널리티를 가진다고 주장함. 물론 이러한 설명과 주장 모두 연재환경에서 쓰인 얄팍한 내용용이고, 실증적으로 사소설과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이 무엇이며 어떤 지위를 갖는지 분석하는 일은 훨씬 복잡하고 다양한 결을 가질 수 밖에 없음.
요컨데 아즈마 히로키가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이란 개념으로 '오타쿠 문화의 문학을 여타 문학과 동급으로 취급하는 것'을 옹호한다고 볼 수는 있지만, 이러한 개념이 오롯이 아즈마히로키의 것이라고 보긴 힘듬.
<게임적>에서 그 맥락을 얇게 설명하긴 했는데, 솔직히 거기서도 좀 공감하기 힘들었던 게 사소설~애니메이션~라이트노벨의 변천 과정에서 "현실"이 변하였다(인식되는 대상으로서의)고는 하지만 수식어(XX의~)가 없는 현실과 애초에 비현실성을 내세운 현실을 동렬에 두기에는 조금... 보통 말하는 포스트모던적 현실에서는 기독교인의 현실, 흑인 이민자의 현실 등 다양하게 나뉘어지는 일자 없는 현실을 얘기하는 것이니만큼
마찬가지로 죽음 이후에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게임적 리얼리즘~이란 것도 오쓰카 에이지가 3인칭 카메라와 같았던 리얼리즘은 일본에서 작가의 시점에서 오리지널리티를 표현하는 사소설로 변화했다. 그런데 이러한 작가의 시점이 넷카마 마냥 가상의 자아를 통해 표현될 수도 있는데,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톰과 제리처럼 신체의 파괴와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미국 애니메이션과 달리 이러한 '죽음'을 중요하게 다룸으로서 리얼리티를 갖는다고 주장한 것에서 아즈마히로키가 한발짝 나아가 주장한 것임.
오쓰카부터가 자기가 대학에서 구조주의 민속학 배운 거 작법서에서도 좋다고 그대로 써먹는 사람인데, 이런 사람이 씹덕 평론에서 리얼리즘 얘기 꺼냈다고 교차적이든 사변적이든 각잡고 얘기하길 바라는 건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