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조지 선더스의 단편들은 미국을 배경으로 하지만, 현재의 미국보다 조금은 더 미래인 거 같은 미국을 배경으로 삼는다. 하지만 현재와 배경 사이에 간극이 크게 느껴질 정도로 미래는 아니라, 그저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자면 언젠가 그대로 될 법한 친숙한 연장선상의 미래다. 단편 <집>에서 MiiVOX-보급형 등의 전자기기들을 진열해놓은 가게에서 묘하게 휴대폰 대리점이나 애플 스토어를 연상하게 되는 것처럼. <셈플리카걸 다이어리>에서 대리모 문제를 연상하게 되는 것처럼. 하지만 이 연장이 대부분 좀 불편하게 느껴질 법한 연장이란 점이 흥미롭다.



viewimage.php?id=3fb8d122ecdc3f&no=24b0d769e1d32ca73ded85fa11d028314c091b806630224048cd6cbd1055c69eb44dc5fd6c5c71d0042423d2247f06848c5b909f13391c66488abdf2f56179c5b57d



<셈플리카걸 다이어리> 이야기를 위에서 했으니 여기서부터 이야기해보자. 위의 사진에서 보이는 줄에 ‘걸려있는’ 여자들이 셈플리카걸이다. 머리에 줄을 통과시킨 채 장식용으로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마당에서 흔들리는 게 유일한 일인 삶. 그게 분명 옳지 못하다고 하는 딸에게 아버지는 하지만 이러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는 사람들이라면서, 오히려 직업을 이렇게라도 주는 게 실질적으로도 더 도움이 된다고 답한다. 이런 이야기가 주로 나오는 주제들에 익숙하지 않던가. 매춘, 대리모, 장기매매 등등. 무언가 돈으로 사고 파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게 되는 문제들. 거기엔 어쨌든 논쟁거리가 끊이지 않을 만한 도덕적 갈등이 얽혀 있고, 그 갈등과 별개로, 그럼에도 갈등을 제쳐두고 실질적인 이익을 봐야 한다는 말이 있다.


마지막 관점을 그 자체로 규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삶을 힘겹게 이어나가는 사람들에게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적용하는 것은 ‘유한계급’의 오만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만일 도덕적 잣대를 그 본인이 직접 갖고 온다면 자신의 행동이 옳다고 평 받기는 포기해야 한다.


이 점을 선더스는 참 안타까운 방식으로 표현했다. 주인공은 가장으로서 가족들에게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게 해주고픈 동시에, 소시민적인 가치관으로나마 자식들을 훌륭히 키우고 싶어 한다. 행운과 노력 덕택에 전자, 물질적인 부분을 채워줄 수 있게 되었지만, 정신적으로 함양시켜준 덕택에 딸 중 한 명이 그를 배신해버린다. 그 ‘도덕적’ 선택으로 인해 모든 물질적 충족이 다시 싹 빠져버리고 자괴감에 빠진 가정만 남는다. “에바(시무룩하게 나를 향해): 하지만 아빠가 그랬잖아. 아빠가 말했잖아. 용감해져야 한다고……” (p.187) 그리고 끝까지 주인공은 자신이 도덕적이지 않은 행동을 했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곁가지로, 가난한 가정의 가장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셈플리카걸>은 너무 잘 보여준다. 책임감을 갖고 살며 언젠가 형편이 나아질 거란 기대를 갖고 있지만, 동시에 그 기대가 결코 실현되지 않을 것이란 걸 안다는 게 무슨 뜻인지를. 여유롭지 못한 삶이라는 것이 사람을 어떻게 추하게 만드는지를. 그리고 자신의 삶과 현저히 비교되는 친구의 삶을 보면서 자신이 이 친구에 비해 특별히 나쁠 것도 없는 사람임에도 그저 이렇게 태어났기에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자식을 둬야 한다는 것을.


이것이 선더스의 온정이다. 독자들이 글을 읽으며 무언가 뒤틀렸다는 인상을 받게 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에게도 그렇게 살아가는 이유가 있고 그것을 딱히 이해하지 못하진 않을 것이라는 암시를 주는 온정. 이런 걸 휴머니즘이라고 부르던가? 어떤 면으로 보면 덕분에 조지 선더스 자체가 기괴하게 보이는 면이 있다. 한 손으로는 엄격하게 선악을 가르는 칼을 들고서 휘두르면서, 다른 손으로는 그들을 치료해주고 연민을 보이는 것이 병 주고 약 주는 셈이니까. 그른 행위를 하는 것과 그른 삶을 사는 것은 다르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강아지>는 이런 온정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두 전혀 다른 형태의 가정이 강아지 매매라는 순간 잠시 만났다가, 곧바로 빠른 속도로 다시 떨어져나가는 글. 어느 쪽이 ‘보다 더 나은’ 가정인지는 뚜렷하다. 마리는 아이를 충분히 이해하며 그들의 관심사에 관심을 갖고 자신이 어릴 적에 부모에게 당한 안 좋은 꼴을 결코 되풀이해주지 않으려 노력한다. 정말, 흠 잡기 힘든 모범적인 도시의 양육 방식이다. 그에 비해 캘리는 가난한 집에서 야만적으로 보일 법한 남편과 함께 정신지체 아이를 키운다. 애완동물이 새끼를 낳으면 이를 기를 사람에게 주거나 그러지 못할 경우, 그냥 죽여야 한다. 실제로 마리가 캘리의 가정을 보고 이를 경멸하며 강아지를 사지 않겠다고 하고 떠나버리자, 캘리는 남편 대신 강아지를 죽이러 간다.


이 정도로만 끝낸다면 온정의 온 자도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캘리의 내면은 언제나 남편과 자식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 차 있고, 사랑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좋아해주면서 상대가 더 나아지도록 도와주는 것” (p.57)이라는 생각을 한다. 정신지체 아이 보를 키우는 방식도 비록 괴상해보이지만 그녀 나름대로 최선의 사랑을 하고 있다. 도덕관과 개인윤리가 삐걱대며 맞물리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나의 기사도적인 대실책>에서도 그런 삐걱이는 소리로 잔뜩 긴장된 맞물림이 보인다. 주인공이 자신의 여성 동료가 권력 관계를 통한 강간을 당하는 것을 보았다. 그 대가로 동료와 주인공은 입막음 겸 진급하게 된다. 현실적인 차원에서 봤을 때, 이를 폭로하는 것은 동료에게 피해를 준다. 그리고 이 폭로가 같은 일이 다시 생기지 않게 막는다는 확실한 보장도 없다. 그렇게 그는 현실적인 도덕을 토대로 동료의 남편에게 거짓말을 하고, 동료는 고마워한다.


그런 다음 진급한 주인공은 자신의 새로운 직위에 맞게 ‘기사다운’ 언행을 할 수 있도록 보조해주는 기사생활® 약을 먹고 고양된 낭만주의와 도덕성을 토대로 생각하게 된다. 자신의 일이 얼마나 “가슴이 부풀어” 오를 만한 일이고 “모두에게 큰 환락을 안겨줄 수 있는 인생의 정거장에 도착”한 것 같은지.(pp.245-246)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고 있자면, 어제 자신이 한 현실적인 행동은 너무나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못하고 기사답지 못한 행위였다는 생각이 퍼뜩 든다. 그래서 곧바로 자신의 양심을 속이지 않고 기사도적인 방식, 공개 고백으로 자신이 목격한 것을 전부 이야기한다. 결과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고마워 죽겠네요, 테드. 잘 모르는 것 같아서 얘기해주는데 우리가 사는 도시는 코딱지만 하거든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그런 다음 그녀는 본격적으로 울기 시작하였다.” (p.249)


전술한 바 있듯, 기사생활® 같은 단어가 보여주는 미래적인 미국 풍경은 참 묘하다. <거미머리 탈출기>와 <권고>에서 그런 느낌이 강하게 나는데, 전자는 세밀한 묘사를 통해, 후자는 짧막한 암시를 통해 표현한다. “우울폭포™”, “즐거운인생™”, “환희의시간™”, “광분™”(p.95) 등의 노골적으로 제품스러운 이름을 달고 있는 신약들의 실험 대상이 되는 이야기라든가, 회사 회람판이라는 현대적인 텍스트에 “다른 모든 것은 잠시 제쳐두고 그 순간만큼은 이것이 옳은가 그른가 하는 감상적인 생각을 접어둔다는 것”(p.104), “우리 모두가 우리에게 할당된 ‘선반’을 청소하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을 뽑아서 (...) 청소를 시킬 것이며, 아울러 우리 자신이 그 ‘선반’ 위에 놓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우리가 그 선반 자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상기” (p.106) 따위의 음습한 함의가 담뿍 담겨 있다든가.


하지만 역시 가장 좋았던 단편은 <집>이었다. 단편집 을 읽던 중, 이 단편의 마지막 부분을 읽을 때 나는 정말 수사적 표현 없이 말 그대로 잠시 굳었으며, 지금도 그 이유를 명확히 알 수가 없다. 감상문을 쓰기 전에 이 부분을 명확히 해서 쓰고 싶었지만, 지금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기에 그저 얕게나마 이 단편에 대해 소개하고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만 말하는 식으로라도 쓰려고 한다. 참전용사로서 PTSD를 앓고 있는 주인공의 내면 서술로 쓰인 <집>은 귀환병인 주인공이 어떻게 원래 자신이 살던 세계를 보는지, 어떻게 그 세계가 그 사이에 그 없이 잘도 돌아갔는지, 그리고 자신이 이 세계에 맞지 않는 사람이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이따금 나오는 상징은 너무나 투박하고 노골적이라 오히려 더 주인공의 끔찍한 감정을 공감하기 쉽게 만들어준다. 


“연못에서 오물을 치우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갈퀴로 오물을 잡아챈 다음 한쪽으로 모는 일이었다. 일을 하다가 갈퀴 자루가 오물 더미 안으로 날아갔다. 그것을 주우려고 가보니 임신부처럼 배가 불룩한 올챙이들 수십만 마리가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었다. 죽은 올챙이와 죽어가는 올챙이의 공통점은 부드러운 하얀색 배가 하늘에서 갑자기 내려쳐진 갈퀴에 찢겨 있다는 것이었다. 차이점이라고 하면, 죽어가는 올챙이들은 겁에 질려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나는 몇 마리라도 살려보려고 했지만, 워낙 연약한 동물이라 내가 손을 쓰려 할수록 그들에게 고통만 더해질 뿐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집주인에게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저는 못하겠습니다. 올챙이가 너무 많이 죽어서 괴롭네요.” 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계속 오물을 한쪽으로 몰았다. 갈퀴를 움직일 때마다, 또 수많은 올챙이의 배가 찢어지겠구나, 생각하면서. 내가 계속 갈퀴를 휘두르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개구리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둘 중 하나였다. A) 나는 속사정을 다 알고도 이 역겨운 일을 계속 하고 있는 끔찍한 사람이다. 혹은 B) 사실 이것은 그리 역겹지 않고 정상적인 일이며, 정상적인 일임을 증명하는 방법은 그것을 계속 하는 것뿐이다. 수년 후 알라즈에서도 그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pp.234-235)


그렇게 참전병의 감정에는 공감하면서도 그가 얼마나 끔찍하게 보일지를 느끼는 동안, 비수 같은 독백이 마지막으로 찌른다.


“좋아, 좋다고, 당신들이 나를 보냈으니 이제 나를 다시 데려와. 나를 다시 데려올 방법을 찾으라고, 빌어먹을 인간들아. 그렇지 않으면 당신들은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개자식들이야.” (p.236)


나를 다시 데려와, 곧 이 자신이 빠진 구멍이 잘 아물어 자신의 존재가 그저 불필요한 가시처럼 작용하게 만들지 말고 자신이 원래 보내지기 전에 있었던 것처럼 돌려놓으라는 말이 얼마나 인상 깊었는지. 여기에 공감할 수 없다면 (아마 대부분이 지금 감상문만으로는 그렇게 느끼겠지만) 이 단편을 한 번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그리고 나와 같은 감상을 가졌는지 묻고 싶다. 만약 그렇게 느꼈다면, 정말 기분 좋을 것이다.


viewimage.php?id=3fb8d122ecdc3f&no=24b0d769e1d32ca73ded85fa11d028314c091b806630224048cd6cbd1055c69eb44dc5fd6c5c71d004244ebe227f06887fd11785bbea1a59a06a87ebee841027220af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