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image.php?id=3fb8d122ecdc3f&no=24b0d769e1d32ca73ded85fa11d028314c091b806630224048cd6cbd1053c69eced703a8f35d3e8c89a8d240bad3d6af20ded0aef91781ca6db541fa0150f07aaa33ee



 우리는 왜 여기서 문학을 하는가


                                                                                              - 문학과 지성 1977 여름호


 


 


                                                        밤이 깊어갈수록


                                                        우리는 누군가를 불러야한다.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았을 때


                                                        잠시라도 잊었을 때


                                                        채찍 아래서 우리를 부르는 뜨거운 소리를 듣는다.


                                                                          - 이시영, 「이름」





작년 11월경에 연구실로 한 학생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불문과 졸업반 학생이었는데, 졸업을 한 뒤에 대학원 불문과에 진학을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의대를 다시 다녀볼 것인가 고민하고 있었다. 의대에 다녀볼까 하는 그의 고민은 후진국의 대학생으로서


말장난과 같은 문학 따위는 공부해서 무엇 하느냐 하는 것에서 생겨난 모양이었다. 이제 다시 입시 준비를 하여 의대에 들어간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문학을 가지고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길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차라리 의대를 나와 무의촌에서 한 사람의 의사로서 성실하


게 사회에 봉사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하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 생각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나로서는 소위


일류 대학이라고 알려진 학교를 나와서, 일류회사에 취직한 후, 부잣집 처녀에게 장가를 가서 편안히 삶을 유지하고 싶다는 유혹에


그가 빠지지 않고서, 다시 말해 편안한 익명의 기능인이 되는 대신에, 자기에게 교육을 시켜준 사회에 무엇인가 봉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학생들이 아직도 적지 않은 것 같아, 그의 고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며, 그것이 사실 얼마나 필요한 고민인가를 새삼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에게 그러나 문학을 포기하는 것과 문학을 전공으로 삼지 않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며, 어느 분야에서 공부를 하든 문학을 


버릴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되풀이 표명된 것이지만, 문학은 써먹을 수가 없다는 것을 그 중요한 특징으로 갖고 있으며, 


그 써먹을 수 없다는 문학의 특징으로 말미암아 문학은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데, 바로 그것이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힘에 대한 감시


체의 역할을 문학으로 하여금 맡게 하는 것이다. 그 문학을 포기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봉사한다는 이름 밑에 오히려 인간을 억압하


는 세력에 봉사한다는 관념 자체는 인간에게 봉사한다는 이름 밑에 오히려 인간을 억압하는 세력에 봉사하게 될 위험성을 갖고 있다


고 할 수도 있다. 더구나 인간에게 봉사한다는 관념 자체는 그 봉사가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의 지적 우월감을 나타내기 쉬우며, 그 


우월감은 봉사의 성과가 쉽게 나타내지 않을 때, 자기가 봉사한 인간들에 대한 경멸로 나타나기가 쉽다. 






이광수의 예가 바로 그것이다. 문학을 전공으로 삼지 않는다 하더라도 문학의 기본 정신을 이해하고 있다면 그의 행위는 몸으로 쓴 


문학이 될 것이며, 그가 만일 쓴다면 그가 쓴 일기는 펜으로 쓴 문학이 될 것이다. 문학을 완전히 버릴 수 있다는 것은 결국은 인간


을 억압하는 힘에 대한 반성을 중단할 수 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내가 그에게 한 말은 대체로 그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번 방학 내내 그가 나에게 준 충격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가 없었다. 후진국에서 문학 활동을 한다는 것은 과연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인간은 완전히 억압 없는 사회를 이룩할 수 있는가, 그때에도 문학은 문학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따위가 가령 


주한 미군 철수 문제 따위로 더욱 복잡해진 머리를 아프게 짓누르는 것이었다.


 


 


후진국에서 문학 활동을 한다는 것은 과연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 문제는 오히려 후진국에서 선진국의 문학 활동을 흉


내 내는 것은 과연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라는 문제로 바꾸어져야 하리라 생각한다. 지식인들의 상당수는 아직까지 한국 문


학이 선진 외국 문학의 모방이며, 그 모방은 한국을 문화적 식민주의로 만든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 문화의 고유한 것을 


찾아내려고, 성실한, 그러나 때때로는 시간  낭비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그 문제가 한글 문제하고 결부되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헝클어져서 애국심의 강도까지가 문제시 된다. 나 자신은 한국 문화, 더 좁게는 한국 문학의 후진성을 그것이 외국 문학을 


모방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잘못 그것을 이해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외국 문학 역시 외국의 사회적 정황의 소산이지, 그것과 무관한 독립체가 아니다. 외국 문학을 그 사회와의 관련 밑에서 고찰하면, 


그것이 올바른 것인가 올바르니 않은 것인가를 판단하는 대신 그것이 유효한 것인가 유효하지 않은 것인가를 따질 수 있게 되며, 그


것은 한국 문학 자체의 반성에 유용한 힘으로 작용할 수가 있다. 외국 문학은 부인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한국 문학을 살찌우는 요


소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한국에서의 외국어 교육의 필요성에 밀접하게 대응한다. 문화적 역량은 자국 문화와 타국 문화의 대


립을 기피시키는 데서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강화시키는 데서 오히려 걸러진다. 외국 문학의 이해는 세계 문화의 중심은 어


디이며, 그 중심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무엇이며, 그것은 인간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으며, 한국 문학은 그 중심에서 얼마나 거리를


유지하고 있으며, 그것은 바람직한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한국 문학을 살찌우는 영양소이다. 주체성이라는 말은 배타성?고립성이라는 것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그것


은 역동적인 의미, 이질적인 것과의 싸움 속에서 찾아질 수 있는 의미를 갖고 있어야 한다. 한국에서 문학 활동을 하는 것은, 그러므


로 오국 문학을 모방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외국 문학과 어떻게 싸울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그 싸움의 과정에서 주체성이 드러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나의 단견으로, 현대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적 논의는 인간은 억압 없는 사회를 이룩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관한 것이다. 억압 없는 


사회라는 말로서 나는 인간이 자유롭고, 노동 자체가 유희가 되는 그런 행복한 사회를 지칭한다. 그러나 그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


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사회는 어떤 제도를 갖게 될 것인가, 아니면 거기에서는 제도 자체가 없질 것인가 따위에 대해서 유감스


럽게도 나는 아직 확실한 대답을 갖고 있지 못하다. 인간은 자유로워야 하며, 인간의 노동은 행복한 그리고 즐거운 노동이어야 한다.


  그것은 대전제이다. 그러나 그런 사회에서는 제도가 없을 것인가 하는 것에는 대답할 거리를 갖고 있지 못하다. 






한 사회가 사회로서 유지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금기와 그 금기체계 위에 세워진 제도 -기구를 갖지 않을 도리가 없다. 어떤 사회


든 그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가령 도덕적인 차원에서는 아버지와 딸,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성 관계는 금지되어야 한다. 그것


은 도덕의 기초이다. 그 기초 위에서 한 사회를 이루어나가는 여러 제도- 기구가 생겨난다. 그 도덕 -풍속을 전달?선전하기 위한 학


교가 필요시 되고, 그것이 훼손될 때 그 훼손을 제재하는 감찰기구가 생겨나야 한다. 그 경우, 그 도덕의 기초는 과연 인간을 억압하


지 않을까? 혹은 그 도덕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 기구는 인간에게 억압적인 힘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 도덕의


기초마저를 부숴야 인간은 자유스러울 수 있는가? 그때 인간은 자유스럽다고 말하는 게 의미 있을 수 있을까? (억압이 없을 땐 자유


라는 말도 없어질 것이다). 그때 성행할 것은 디오니소스교의 광란이 아닐까? 내가 해답을 내릴 수 없는 것은 그런 문제들이다. 






나는 많은 정치?경제?사회학자들이 그 억압 없는 사회를 위한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있다는 알고 있다. 그 프로그램이 확실시될 때에


는 과연 억압이 없어질까? 억압이 없어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욕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라는 반론이 있을 수도 있다. 그 


본론에 대해서는 인간은 어떻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억압을 줄여야 한다는 답변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인간은 억압 없는 행복


한 사회라는 유토피아를 향한 편력인 homo viator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나에게 깊은 인상을 준 유토피아 소설 중의 하나가 헉슬리


의 『멋진 신세계』이다. 어머니와 아들, 아버지와 딸이라는 분류 자체가 불가능하도록 아이들이 생산?제조?교육되는 억압 없는 그


신세계에서는 억압이 오히려 그리워지도록 억압 없다는 것이 지루하고 무의하게 나에게는 느껴졌다. 문제는 그래서 더욱 복잡해진다.


  더욱 무서웠던 것은 그 멋진 신세계에는 문학이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서는 고통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억압 없는 사회는 내


가 보기에는 획일화라는 가장 큰 억압에 사로잡혀 있었다. 획일화되지 않고, 개성을 갖고 있으면서 자유로운 사회가 과연 있을 수 


있는가.


 



 그 문제는 충격 문학론과 맥락이 닿는다. 억압 없는 사회를 행하기 위해서는 억압을 가능한 한 의식화?객관화해야 하는데, 그 억압


에 길든 의식은 그것을 억압이라고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상상력 자체가 보수화하여 사태 보존적인 것이 돼버리는 것이


다. 그 굳은 상상력을 깨우기 위해서는 그것에 충격을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충격을 받은 의식은 깨어나고, 자신을 마비시킨 억압의


정체를 드러내게 된다. 문제는 그 충격이 곧 제도화해버리는 데에 있다. 제도화된 충격은 그것이 오히려 인간 의식을 억압하는 역기


능을 하게 된다. 억압 없는 사회를 목표한 충격이 억압이 되는 것이다. 억압 없는 충격이 과연 가능할 수 있을까. 그것은 억압 없는 


사회라는 개념 자체가 억압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낳는다. 문학에 대한 나의 모든 논의가 더욱 선명해지기 위해서는 그 문제


들에 대한, 그것들이 문제로서 제기될 수 있는 문제인가에서부터 시작하여, 그것들이 해답이 가능한 문제들인가에 이르기까지 철저


한 반성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왜 여기서 문학을 하는가? 이시영의 시에 씌어진 그대로 해답이 쉽지 않은 문제들이 나에게 이름을 붙여달라고 채찍질을 하기 때


문이다. 그의 시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우리는 그에게 가야한다.


                     그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부르다가 쓰러져 그의 돌이 되기 위해


                    가다가 멈춰 서서 그의 장승이 되기 위해 




김현(김광남)

서울대학교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학교에서 유학했으며, 1990년 작고하기까지 서울대 불문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1962년 김승옥, 김치수, 최하림과 함께 소설 동인지 《산문시대》를, 1966년 황동규, 김화영, 정현종과 더불어 시 전문지 《사계》를 


창간했으며, 1970년에는 《문학과지성》 창간의 주축이 된다. 우리나라 1세대 불문학자이자 비평가로서, 치열한 지식인으로서 열정적으로


학문에 매진했으며, 『프랑스 비평사』, 『바슐라르 연구』, 『말들의 풍경』 등 수많은 책을 저술하고 많은 제자를 키웠다. 또한 시집 


『앵무새의 혀』, 유고집 『행복한 책읽기』 등이 있으며,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 등을 번역했다.